31화 - 주름진 도시

라파즈, 볼리비아

by JUDE

쿵. 아야 하고 소리를 냈다고 생각했는데 실제로 입 밖으로 나오진 않은 모양이다. 버스 안은 고요했고 바깥은 온통 까맸다. 수도 라파즈(Lapaz)로 가는 길은 온통 비포장도로에 구불구불한 산 길이었다. 자다가도 술에 취한 것처럼 자꾸만 버스 유리창에 머리를 부딪쳐 깨곤 했는데, 그때마다 길가의 돌멩이 하나 밟는 느낌까지도 생생하게 엉덩이에 전해졌다.


멀미가 날 것 같은 12시간을 견뎌, 아침 8시에 라파즈에 도착했다. 사방으로 철창이 둘린 버스 터미널과 입구에 총을 든 채 경계 중인 군인의 모습에 나도 모르게 가방끈을 부여잡게 된다. 그러고 보니 어느 가이드북에서 라파즈를 이렇게 표현했던 것이 기억이 났다. 노상강도와 소매치기의 소굴. 무장군인의 호위아래 터미널을 빠져나와 햇빛 아래 배낭을 내려놓고, 파노라마로 이 낯선 도시의 모습을 훑었다. 여전히 높은 고도 때문인지, 사람들의 발걸음이 하나같이 느리고 무거워보였다. 가장 눈에 띈 풍경은 하늘을 찌를 듯 높은 곳에 옹기종기 지어진 집이었다. 한눈에도 조망을 위해 품위 있게 지어진 집은 아니다, 무언가로부터 도망치듯 꼭대기를 향해 돌진하다

엎친 데 덮친 것 같은 모양새였다.



다시 배낭을 메고 걷기 시작했다. 좁은 도로로 차들이 무질서하게 엉기고, 사방이 경적으로 시끄러운 거리를 걸으면서 긴장한 티를 역력히 드러냈다. 총을 든 군인이 시내를 돌아다니는 광경을 본 것은 케이프타운과 나미비아에 이어 세 번째다. 6차선 도로변에 제일 눈에 띄는 호스텔로 서둘러 들어갔다. 손님이라곤 하나도 없는 호스텔이었다.


호의로 제공된 팬케이크를 먹으며 이 도시에서 무엇을 할지 잠시 의논했다. 라파즈에 대해 아는 것이라곤 볼리비아의 수도라는 사실뿐이다. 이럴 땐 달리 방법이 없다. 어느 스페인 정복자가 만들었을 광장으로 가보는 수밖에.


라파즈 거리에서 흔하게 볼 수 있는 구멍가게


광장에는 어김없이 대성당이 있었고, 사람들은 주로 거리에서 물건을 사고팔았다. 특별한 무언가를 판다기보다는 구할 수 있는 것을 닥치는 대로 가져다 아무렇게나 파는 느낌이었다. 화려한 벽화를 등진 어느 노파의 구멍가게 앞에 섰다. 반쯤 잠들어 있던 노파의 고개가 살며시 들렸다. 영어는 전혀 통하지 않았지만, 모든 의사소통은 한 손으로 가능했다. 내가 콜라를 가리키자 얼굴 가득한 주름을 더욱 촘촘하게 만드는 미소를 지으며 손가락 하나를 폈다. 1 볼. 콜라 한 병에 150원이다. 살짝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표정을 지으며 얼굴만 한 크기로 썰어진 수박 한 조각을 집어 들었다. 노파가 손가락 3개를 펼친다. 450원이다.


남미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라고 들었지마 쓸데없이 다가와서 집적거리거나 구걸을 하는 거지 한 명 없었다. 마침내 우리는 라파즈가 결코 위험한 곳이 아니라고 판단했다. 해발 3천 미터가 넘는 이곳에서 물건을 훔친들 뛸 수나 있을 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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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파즈는 그저 한 나라의 수도치고는 많이 늙었다. 멋들어지게 늙은 배우의 모습이 아니라 세월과 풍파에 시달려 잔뜩 주름이 진 농부의 얼굴 같다. 인구 대부분이 원주민인 볼리비아 사람들의 얼굴도 마찬가지였다. 내가 '그라시아스'(고맙습니다) 하고 말하면, 대답대신 입가에 짓는 미소조차 주름이 더해질까 싶어 미안할 정도였다.


추울 정도로 에어컨을 틀어대는 쇼핑센터나 맥도널드 같은 것도 없다. 앞으로 10년이 지나도 없을 것이다. 어떻게든 돈을 쓰려고 노력했지만, 돈을 쓸 곳이 없다. 매연을 가득 뿜어내는 낡은 차들이 뒤엉킨 로터리에, 'Samsung'이라는 간판이 걸려있는 것도 어색했다. 큰 도로 뒤편으로는 숲과 공원이 있었고, 몇 채 되지는 않지만 예쁜 집이 줄지은 동네도 있었다.


여자들은 크기가 맞지 않는 중절모를 마법사처럼 머리 위에 얹고, 등에는 커다란 봇짐을 메고 다녔다. 하나같이 작고 통통한 체형에 통이 넓은 치마와 망토를 둘렀다. 금방이라도 봇짐 안에 든 개구리 눈알을 꺼내 '비비디 바비디부'라고 외칠 모양새다.


숙소 직원을 통해 이 도시 어딘가에 전망대가 있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요란하게 생긴 달동네 버스를 탈까 하다 택시를 탔다. 15분은 족히 달린 것 같은데 천 원이 나왔다. 언덕은 킬리킬리(Killli Killi)라는 괴상한 이름으로 불렸는데, 어디에도 표지판은 보이지 않았다(처음 들었을 때는 킬미킬미라고 알아들어 깜짝 놀랐다). 아무런 조경도 없어 보러오라고 만든 전망대 같진 않았다. 의심 가득한 표정으로 몇 개 되지 않는 계단을 내려오니, 사방으로 아찔한 풍경이 펼쳐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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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좀 찾아봤는데, 피파에서 축구경기를 금지시켰대. 경기 중에 죽은 선수도 있다더라.”


준이 말했다. 당연하다. 해발 3,600m에서 축구라니. 대체 무슨 생각이냐고 묻고 싶다. 축구는커녕 저기까지 올라가서 사는 것만으로도 신기했다. 바라보기만 하는데도 숨이 턱 하고 막힌다. 상상도 하지 못할 높이까지 빼곡하게 집이 지어져 있다. 취향이 독특한 어느 예술가가 세상을 등지느라 지은 외딴집이 아니라, 굴뚝으로 하루 세번 겨우 밥짓는 연기가 솟을 것 같은 그런 집이었다.


병풍처럼 도시를 둘러싼 그 판자촌은 산맥의 중턱부터 시작해 꼬리에 꼬리를 물고 협곡의 깊숙한 곳까지 이어졌다. 꼭대기에 구름 대신 눈을 얹은 설산 일라마니(Illimani) 바로 아래에도, 시선이 닿는 모든 곳에 집이 있었다. 일라마니의 높이는 6천 미터가 넘는다. 바람이라도 불면 날아갈 것 같았고, 눈이라도 내리면 지붕이 내려앉을 것만 같다.


“무슨 수도가 이렇노. 높은 곳에 살면 낭만이라도 좀 있어야지”


그 모습이 얼굴에 주름이 가득한 볼리비아 사람들을 꼭 닮았다. 어떻게 저런 곳에 집을 짓고 살 생각을 했을까. 어쩌다가 해발 3,000m가 넘는 곳까지 집을 지어야 했을까. 라파즈에 와서 쓴 돈을 계산해보니 0이 하나 빠진 것만 같았다. 설산과 협곡이 시선을 끄는 그 풍경을 바라보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조금씩 마음이 무거워졌다. 한 칸, 한 칸, 힘겹게 언덕을 오르는 와중에도 허리만 펴면 보일 그 설산이, 실은 세상 어디에도 없는 보석 같은 풍경이라는 사실을 그들도 알고 있을까.



해가 완전히 진 뒤에 혹시나 하는 마음에 아찔한 풍경이 올려다보이는 곳까지 걸었다. 그 언덕을 한 번 쳐다보고는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전기는 들어오나 보다. 라파즈는 세계일주가 아니었다면, 내가 그토록 기회비용을 외쳐대지 않았다면 절대 찾지 않았을 도시였을지 모른다. 그랬다면 내 기억속의 볼리비아는 '환상적인 소금사막의 나라'로 남았을지 모른다. 그러나 내가 겪지 않는다고 해서, 보지 않는다고 해서 그 가난이 괜찮은 건 아니었다. 주름이 는다는 것은 여러 가지로 슬픈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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