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화 - 쿠스코? 쿠스코!!

쿠스코, 페루

by JUDE

코파카바나에서 페루 국경까지는 금방이었다. 봉고차에 구겨져 20분을 달리자 금세 출입국 사무소가 나타났다. 같은 호수, 같은 하늘, 같은 대지위에, 보이지 않는 선을 넘어 페루에 입국했다. 대기하고 있던 봉고차에 다시 올라탔지만, 차는 최대한 느릿한 속도로 달렸다. 기사는 지나가다가 무언가 움직이기만 하면 차를 세워 태웠다. 한 시간 즈음이 지나자, 3인용 좌석에 4명의 성인과 닭 두 마리가 같이 앉게 됐다.


쾅!


나도 모르게 봉고차 문을 너무 쌔게 닫았나 보다. 엄청난 소리와 반동에, 차 안에 구겨져 있는 십여 명 남짓한 사람들의 시선이 동시에 나에게 향했다. 뭐. 어쩌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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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발하기 전에, 코파카바나의 여행사에서는 분명 버스라고 말했다. 국경을 넘어 페루의 어느 소도시까지 가는. 지정석이 있으며, 천장은 허리를 펴기에 충분한 높이의 탈 것 말이다. 실제로 탄 차는 발로 차면 뒤집어질 것 같은 구식 봉고차다.


이름도 기억하고 싶지 않은 페루의 어느 작은 마을에 도착하기까지의 몇 시간은, 인내심 싸움이었다. 내가 먼저 터지던지, 봉고차가 먼저 터지던지. 터질 듯 말듯한 상태로 겨우 버스터미널에 도착했는데, 갈아탈 버스가 두 시간이나 연착이란다. 말 같지도 않은 소리다. 지나가는 행인 1에서 100까지 모조리 실어대더니, 원래 타야 할 버스를 놓친 거겠지. 사람보다 개가 더 많은 것 같은 이 마을에, 버스가 연착될 일이 뭐가 있겠는가.


결국 최종 목적지인 쿠스코(Cuzco)에는 자정을 넘어서야 도착했다. 380km를 가는데 10시간이라니, 대단한 운전 실력이다. 그 긴 시간 동안 유일하게 나를 화나지 않게 한 것은, 동아시아인이 보일 때마다 다가와 국적을 확인하는 여고생들이었다. 하얀색 블라우스에 군청색 주름치마를 입은 소녀들은, '한국인이야'라는 대답을 들으면, 일단 핸드폰부터 들이댔다.


"사진! 사진 찍어요! 사진!"


고작 준과 사진을 찍기 위해 저렇게나 긴 줄을 서다니. 딱한 일이다. 완벽한 어둠이 내린 쿠스코에서, 비를 맞으며 헤매야 하는 우리도 그랬다. 낯선 도시에서 해가 진 뒤에 숙소를 찾는 것만큼 멍청한 짓은 없다. 미라도르 롯지(Mirador Lodge)라는 이름이 붙어있던 그 숙소는, 단언컨대 남미를 통틀어 최악의 숙소였다.


'24hr hot shower'라고 적힌 간판과는 달리, 온수는 아침과 저녁 각각 두 시간 동안만 나왔다. 그마저도 뜨겁기는커녕 몸이 떨릴정도로 미지근했다. 하긴 버스가 뭔지도 모르는데 'hot'의 의미를 알턱이 없다. 화장실을 비롯해 그 어디에서도 휴지를 찾을 수 없었고, 로비에서만 가능한 와이파이도 뚝뚝 끊어져 하릴없이 시간을 보내기에도 최악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려 3박이나 한 이유는, 오로지 해발 3천 미터에서 발을 움직일 때마다 느낄 수 있는 피로감과 귀차니즘 때문이었다.


쿠스코의 언덕은 높고 가파르며, 여전히 해발 2,700미터다.


많은 사람들이 잉카의 수도였던 쿠스코에 뭔가 특별한 것이 있다고 말하지만, 내 생각에 쿠스코의 특별함은 외국인에게만 해당하는 엄청나게 비싼 물가다. 마추픽추로 가는 유일한 수단인 기차의 요금은 무려 80달러에 달했다. (당연하게도) 편도요금이었지만, 그 옆에 쓰인 글자가 나를 더 분노하게 만들었다. 내국인 5천 원.


왕복 20만 원짜리 기차에 타지 않고 마추픽추에 가는 유일한 방법은 딱 하나다. 해발 3천 미터를 오르내리는 산을 넘어 3일 내내 걷는 것.(혹은 페루 국적을 얻거나) 잉카 트레일(Inca Trail)이라는 멋들어진 이름을 붙여놨지만, 실은 스페인 정복자들이 갔던 길을 따라 걸으면서, 그들이 부수다 남은 돌덩어리를 보는 여정이다.


걸어서 마추픽추에 가는 방법


외국인에게 무려 스무 배에 달하는 요금을 받는 그 뻔뻔함이 새삼 괘씸했다. 그렇다고 쿠스코에 와서 마추픽추에 가지 않은 유일한 멍청이가 되고 싶지는 않았다. 걷지 않으면서, 조금이라도 비용을 줄일 수 있는 방법을 고민했다. 결국 오얀따이땀보(Ollantaytambo)까지는 승합차를 타고, 거기서부터 최소한의 구간만 기차를 타기로 했다. 거기에 밤 9시 막차를 고르면 기차요금이 조금 더 싸진다.


흥분된 가슴이 진정되나 했는데, 입장권 가격에 또 혈압이 올라간다. 마추픽추의 입장권은 대략 6만 원. 거기에 정상의 전망대인 와이나픽추까지 포함시키면 더 비싸진다. 페트라를 제외하면, 내가 가본 모든 유네스코 유산 중에 가장 비싼 요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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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이 미스터리한 고대 문명의 수도를 어떻게든 긍정적으로 생각하려고 갖은 노력을 했다. 하얗게 새로 칠한 페인트는 어쨌든 여행객을 위한 것이었고, 기와를 꼭 닮은 오렌지색 지붕이 가득 펼쳐진 풍경은 매혹적이었다. 멋들어진 교회가 자리 잡은 아르마스 광장을 걷는 것도 좋았고, 겨우 6천 원이면 마사지를 받을 수 있다는 점도 좋았다.


그럼에도 나는 쿠스코가, 이 도시만큼이나 역사적이며, 오로지 관광객의 지출에 의존하는 다른 도시들보다 더 싸구려 같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주말마다 열리는, 광장을 가득 메운 잉카 퍼레이드도 한 없이 싸구려처럼 보였다. 준은 챙이 넓은 모자를 쓰고 잉카의 의상을 차려입은 무용수랑 사진을 찍어달라고 아우성이었지만, '여기 있다는 이유로 돈 받을 거 같으니 빨리 나가자'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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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스코 거리는, 공사 중이 아닌 곳이 없을 정도로 곳곳에 바닥을 헤집어놓아 온통 시끄럽고 불편했다.


"외국인한테 삥 뜯더니, 도시를 아예 완전히 새로 짓기라도 할 셈인가 ”


나는 그런 풍경이 보일 때마다 쿠스코 시장(?)과 페루 정부를 향해 신랄한 비판을 쏟아냈다. 아르마스 광장을 중심으로, 쉴 새 없이 새 도로를 깔고 새하얗게 칠해진 새 건물들이 지어지고 있었다. 시 외곽의 높은 언덕을 따라, 어지럽게 그물진 현지인들의 삶과 극명하게 대비되는 모습이다. 조금씩 영역을 넓혀가고 있는 새 타일을 보고 있으니, 400년 역사를 자랑하는 잉카 제국의 돌담을 볼 수 있는 날도 얼마 남지 않은 듯하다. 관광객을 생각해 주는 것은 고맙지만, 쿠스코야 말로 관광이 주민의 일상을 비틀어 놓은, 좋지 않은 예의 대표 격이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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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타벅스에서 커피나 한잔 하자. 커피 마신 지가 언젠지 기억도 안나”


나에게 커피란, 쓸데없는데 돈을 쓰고 싶거나, 꼬드기고 싶은 여자가 있을 때 어쩔 수 없이 마시는 액체다. 준이 스타벅스에 가자고 했을 때, 나는 400년이라는 세월을 견뎌온 돌담을 허물고, 그 한복판에 스타벅스와 맥도널드를 지은 참신한(?) 발상에 감탄하던 중이었다. 머지않아 그 맞은편에 생겨난 코스트코에, '쿠스코에서는 코스트코를'이라는 완벽한 라임의 표어가 새겨지는 모습이 절로 상상됐다. 5천 원짜리 기차표를 80달러에 팔아대니, 불가능한 일도 아니다.


“여기까지 와서 스타벅스는 무슨 스타벅스야. 이런 가짜 관광지에서는 10원도 아깝다!”

“아 그거랑 이거랑 무슨 상관이야. 이런데 왔으니까 스타벅스에 가는 거지.”

"한국에도 있는걸 여기서 왜 가냐고."

“야. 그럼 네가 하루에 세 캔씩 마셔대는 콜라는 한국 가면 없어서 마시냐?”


말다툼이 벌어졌고, 진심으로 쿠스코에서는 단 한 푼도 쓰고 싶지 않았다. 하물며 한국에 가면 사거리마다 하나씩 있는 스타벅스가 아닌가. 우리는 이미 두 달 가량을 함께 보냈고, 이별을 2주 앞두고 있었다. 갈림길이 눈앞에 있으니, 아무도 지려고 하지 않았다.


그 날 오후에, 그 망할 숙소에서, 적당히 태운 갈색 피부의 미국인 아가씨가 우리에게 말을 걸지 않았다면, 그날도 끝까지 그랬을 것이다. 서로 말은 하지 않았지만, 준과 나는 그녀가 이 모든 불쾌함으로부터 벗어날 유일한 탈출구임을 직감했다. 단지 몰랐던 것은, 생각보다 우리가 멍청하다는 사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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