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추픽추, 페루
“마추픽추는 엿이나 먹으라지! 지금 당장 저 애랑 커피 한 잔 해야겠어. 400년 된 돌담 위에 지어진 스타벅스에서.”
그것이 그녀를 본 순간의 솔직한 심정이었다. 넓은 카우보이 모자에 상반신을 화끈하게 드러낸 탑을 입었고, 같이 온 네 명의 친구들도 하나같이 돋보였다. 남자라면 누구나, 부질없는 상상을 하게끔 만드는 옷차림이었다. 준은 일행 중에 유일하게 영어를 할 줄 아는 그녀를 '수박'이라고 불렀다. 매끈한 쇄골 아래로 보이는 그것은, 완벽하게 아름다운 수박을 떠올리게 만들었다.
“그럼 쿠스코로 돌아오는 날 저녁에 괜찮아? 같이 나가자. 여기 앞에 펍에서 매일 밤마다 파티가 열리거든”
걱정 말아요, 세뇨리따. 그곳이 지옥이라 해도 따라갈 테니. 그녀와 같은 날 마추픽추에 간다는 사실을 확인했을 때, 우리는 속으로 만세를 불렀다. 이럴 줄 알았으면, 일찍 출발해서 일찍 돌아오는 직행 기차를 왕복으로 살걸 하고 후회했다. 오얀따이땀보(Ollantaytambo)인지 고얀땅딸보인지하는 마을로 가는 승합차 뒷좌석에 처박혀, 갑자기 뒷 트렁크 문이 벌컹하고 열릴 때마다 그 생각이 들었다.
막상 페루 레일(마추픽추로 가는 기차의 이름)에 타고 보니, 또 생각이 바뀌었다. 기차의 외관은 잉카를 상징하는 심벌들로 제법 깔끔하게 장식되어 있었다. 그러나 네 명이 마주 보도록 고정된 좌석은, 뒤로 젖혀지지도 않고 팔걸이도 없었다. 누군가 무릎을 움직 일 때마다 네 명이 서로 쳐다보게 되는 멍청한 구조였다. 승차감은 봉고차와 크게 다르지 않았는데, 어렸을 때 탔던 통일호가 생각났다. 좀 더 정확한 비유를 하자면, '어디 한번 잘 수 있으면 자보시지'라는 의미가 담긴 기차였다.
종착역인 아구아스 칼리안테(Aguas Calientes)에는 밤 11시가 넘어 도착했는데, 장대비가 내리고 있었다. 제일 가까운 곳으로 들어간 숙소에 더운물이 나온 것이, 그 날의 유일한 기쁜 일이었다.
밤새 내린 비는 새벽녘에 잦아들더니, 숙소를 나온 8시쯤에는 완전히 그쳤다. 공기는 적당히 촉촉하게 신선했고, 물이 흐르는 도랑 옆으로는 들꽃이 만발했다. 우리를 보자마자, 사진을 찍고 싶어 하는 페루 여성들이 여기저기서 몰려와선 준을 붙들고 늘어졌다. 족히 20분은 낭비했지만, 그 독특한 취향이 싫지 않았다.
"공기도 좋은데 걸을까?"
정확히 기억은 나지 않지만 누군가가 말했고, 마추픽추로 가는 셔틀버스 정류장을 지나쳤다. 정류소의 직원이 걸어서 40분 정도라고만 했고, 산을 타야 한다는 말은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쿠스코가 해발 3300미터고, 마추픽추는 겨우 2400미터다. 기차가 내리막길을 달리지 않는 이상, 마추픽추가 산 꼭대기에 있을 수는 없지 않나. 아무튼 우리의 머릿속에는 빨리 마추픽추에 도장을 찍고 쿠스코로 돌아가, 파티를 벌이고 싶다는 생각뿐이었다.
손바닥만 한 마을을 벗어나자 금세 길이 좁아졌다. 눈앞까지 다가온 봉우리는 머리 위로 아찔하게 협곡을 이루었다. 강을 따라 구불구불하게 나있는 그 길 끝의 어딘가에, 마추픽추가 있으리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눈높이보다 한참 높은 곳에, 지그재그로 힘겹게 산을 오르는 버스가 눈에 들어온 건, 출발한 지 30분이 지났을 때였다. 곧, '마추픽추'라고 쓰인 표지판이 어마어마한 경사를 자랑하는 계단으로 안내했다.
뭐지? 어떻게 이럴 수가 있지? 해발 3300미터에서 기차를 타고 2400미터로 왔는데 왜 산을 오르지? 머릿속에 의문이 떠올랐지만, 곧 호흡이 나의 온몸을 지배했다. 숨을 쉬는 것 외에 다른 데에 에너지를 소비할 여력이 없었다. 계단을 올라 마추픽추 입구에 도착하기까지 두 시간이 걸렸다. 탈진 상태로 축 처진 어깨를 누군가가 콕콕 찔렀다.
“왜 이렇게 젖었어? 이제 겨우 아침인데.”
그녀였다. 빨간색의 달콤한 과일을 떠올리게 하는. 뜨거운 햇살에 빛나는 그녀의 금발 머리카락이 바람에 날려 코끝을 간지럽혔다. 우리가 아무 쓸모없이 체력을 낭비하는 동안, 그녀들은 벌써 관람을 마치고 나오는 길이었다. 누군가의 요청으로 일곱 명이 나란히 사진을 찍었고, 나도 모르게 그녀의 어깨 위에 손을 올리고 있었다는 사실을 사진을 찍은 후에야 알았다.
"그럼 놀다 와. 오늘 밤 잊지 말고"
마추픽추에는 도착했지만, 아직 갈길이 멀었다. 하루에 400명, 오전 8시와 10에만 입장할 수 있는 와이나 픽추 전망대에 가야 한다. 시계는 11시를 향하고 있었고, 버스를 타지 않은 어리석은 생각을 탓할 시간도 없이 뛰었다.
'경고. 추락 사망사고 발생 구역'이라고 쓰인 표지판 바로 아래에 있는 노트에 이름을 쓰고 사인을 했다. 아마도 죽어도 좋다 라는 의사 표현이었을 것이다. 와이나 픽추로 가는 길은 거의 수직에 가까운 절벽이었고, 이미 산 하나를 넘은 우리에게는 매 순간이 생사의 갈림길이었다.
“이봐. 원하는 대로 마추픽추를 두 번 다시 볼 수 없게 해줬는데, 기분이 어때?”
“두 번 다시 오고 싶지 않다는 거지, 마추픽추에서 생을 마감하는 게 아니었다고!”
“죽어도 좋다는 계약서에 사인을 한 건 너야.”
정말로 죽음이 가까이 왔다고 느낄 때마다, 그런 상상을 하며 이를 악물었다. 와이나픽추에서는 마추픽추가 손바닥만 하게 보였다. 산 봉우리를 깎아 꼭대기에 지어 놓은 계단식 논같은 모양새였다. 라파즈, 우유니는 물론이고, 쿠스코보다도 낮은 마추픽추가 왜 공중도시라고 불리는지 단숨에 이해됐다. 사방을 둘러싼 기암절벽들과 숲이, 폐허간 도시를 떠받들고 있었다.
안데스 산맥의 어느 봉우리 꼭대기에 자리 잡은 이 정체불명의 도시는, 어떻게 건설되었고 누가 살았으며, 어떻게 긴 역사 속으로 사라지게 되었는지, 알려진 것이 하나도 없다. 할 수 있는 거라곤, 형체도 없이 사라진 지붕 아래 홀로 자리를 지키고 있는 돌담을 거닐며, 이 도시가 번성했을 때의 모습을 상상하는 것뿐이다.
사람이 사는데 꼭 필요한 물은, 와이나 픽추에서부터 흘러온다. 그 물길을 따라 수로를 파고, 산 아래 우루밤바 강가에는 밭을 내어 농사를 지었을 것이다. 100년을 이어진 잉카 왕조와 문명을 송두리째 빼앗긴 슬픔을 고스란히 진 그들은, 절박한 심정으로 저 바위산의 돈을 잘라내 집을 지었을 것이다. 와이나 픽추는 침입자를 감지하는 초소다. 그대로 숨어살 수도, 그렇게 죽을 수도 없었던 사람들은, 절망 속에서 흔적도 없이 떠밀리듯 사라졌을 것이다.
상상이 끝나는 순간 감동도 끝났다. 솔직한 심정은, 입장료를 6만 원이나 받으면서 화장실을 유료로 운영하는 그 뻔뻔함에 박수라도 쳐주고 싶었다. 발가락에 힘이 들어가지 않아, 다시 마을로 갈 때는 9달러를 내고 셔틀버스를 타야했다.
“올라올 때 타고, 내려갈 때 걸었어야 되는데...”
나도 모르게 혼잣말이 입 밖으로 튀어나왔다. 세상에서 둘도 없는 멍청이가 된 것 같은 기분이었다. 아직 해가 한참이었지만, 아구아스 칼리안테는 정말이지 할게 아무것도 없는 곳이었다. 마을에 하나 있는 시장에서는 꼬마들이 방학숙제로 만들었을 것 같은 물건을 팔았다.
쿠스코로 돌아가는 기차 시간까지는 아직 세 시간이 남았다. 게다가 우리를 기다리는 사람이 있다. 기차표를 바꿔야 한다는 결론을 내렸다. 거의 두 배 가격이었지만 돈이 문제가 아니다. 진짜 문제는 따로있다.
“쿠스코로 가는 표를 바꾸고 싶은데요. 지금 당장 출발하는 걸로”
“환... 환불... 안... 안.. 돼”
이렇게 많은 사람이 방문하는 기차역 창구에, 직원이라고는 달랑 한 명뿐이다. 영어가 영 서툰 직원은, 고장 난 카드를 집어넣은 ATM 기계 마냥, 우리가 표를 들이밀면 다시 바깥으로 뱉어냈다.
“아니 환불 말고 교환이요, 교환. 쿠스코! 지금 바로! 오케이?”
“음.. 교... 교환... 안... 안돼”
한참 시름을 벌인 끝에 얻은 결론은, 이 놈에 기차표는 교환도 환불도 안 되는 모양이었다. 비가 내리기 시작했고, 이대로 세 시간 뒤에 기차를 탔다간 자정에나 쿠스코에 도착할 것이다. 결단이 필요한 순간이었다.
“야, 아픈 표정 지어봐”
“뭐?”
“아 대충 다리 좀 절어봐. 니 그 뭐고. 무릎 아프다며”
나는 미간에 주름을 잔뜩 새겨 넣고는 손가락을 들어 준을 가리켰다.
“내 친구가 아파요. 마추픽추에서 다쳐서, 쿠스코에 있는 병원을 가야 해요, 병원. 알아요? 병원?”
눈으로 신호를 보내자, 준은 으어어어 하는 괴상한 소리를 내며 자리에 주저앉았다. 거의 로보캅 수준의 연기라고 생각했는데, 직원의 손가락이 키보드를 두드리기 시작한다.
“음… 미안한데… 자리가 없어.”
아까와는 달리 매우 또렷하게 '쏘리'라는 말이 들렸다. 이런 세상에. 대체 입장료를 6만 원이나 내고도 화장실료를 따로 받는 곳에, 왜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방문하는지 모르겠다. 미간을 더욱 찌푸리며 '플리즈'를 연발했지만, 없는 표가 생길 순 없었다. 그럼 그렇지. 수박은 물 건너갔고, 파티도 쫑났다.
그 와중에도 준을 부축하며 등을 돌렸다. 녀석도 민망했는지, 매표소가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다리를 절뚝거리며 혼신의 연기를 펼쳤다. 웃음이 목구멍까지 올라왔고, 악다문 입술을 뚫고 바람소리가 빠져나왔다. 잠시 후에는 극심한 자괴감이 몰려왔다. 이 이야기만은 절대, 어디서도 하지 않기로 약속했다.
결국 예정된, 제일 마지막 기차를 타고 쿠스코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날짜가 넘어가 있었다. 가로등을 제외한 모든 불빛이 꺼진 뒤였고, 거리에 움직이는 것이라곤 둘 뿐이었다. 비는 거의 폭우가 되어 퍼부었는데, 쿠스코에 도착한 날과 똑같은 풍경이었다. 지금부터 다시 지난 며칠이 반복될 것만 같다는 생각이 들자 팔에 소름이 돋았다.
결국 다음날, 쿠스코를 떠나기로 했다. 이렇게 관광객이 몰리는 도시에, 버스터미널을 굳이 마을 외곽에 지어서, 갈 때마다 택시를 타야만 하는 것도 이 도시의 음모 같았다. 하다 못해 시내에서 버스 티켓을 살 수는 있어야 하는 것 아닌가. 미련 없이 쿠스코를 떠나기 전에, 한국의 그녀에게 보내는 장문의 편지를 썼다. 이 도시의 거대한 음모와 그 희생양이 된 두 멍청이의 이야기를 빠짐없이 담았다. 물론 수박 이야기는 쓰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