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루와 에콰도르 사이
우당탕. 쾅! 쾅! 쾅쾅!
무언가 터지는 소리에 놀라서 깼다. 버스 안은 평화로웠고, 소리의 정체는 머리 위로 나있는 스피커였다. 아무도 보는 이 없는 TV에 '분노의 질주'가 틀어져 있었는데, 무슨 네 평짜리 극장에라도 와 있는 줄 알았다. 버스 벽에 기댄 몸에 스피커 진동이 느껴질 정도로 큰 소리였다. 바로 옆자리의 준이 코를 곤다는 사실도 몰랐다.
페루의 수도 리마를 출발해, 에콰도르로 국경을 넘는 장거리 버스 안이었다. 22시간이라는 긴 이동시간을 고려해, 일부러 1등석을 골랐다. 플로레스라는 이름의 버스 1등석은 충분히 넓고 편안했다. 앉자마자 22시간을 내리 잘 수 있을 것 같았다. 문제는 버스, 아니 운전기사였다. 저녁 6시에 버스가 출발하자마자 액션 영화 한 편이 재생된 후로, 자정이 될 때까지 내리 세 편을 틀어댔다. 준과 내가 6시간을 몸부림치는 동안, 다른 승객들은 죽은 듯이 미동도 하지 않았다. 첫 번째 휴게소에 들렀을 때, 기사에게 말을 걸었다. 혹시 귀 머거 린지 확인이 필요했다.
“볼륨 다운. 오케이? 볼륨! 다운! 귀가 터질 것 같아!”
진짜 귀머거리인가 싶어 최대한 직관적인 손짓까지 동원해 나의 괴로움을 알렸다. 기사는 알겠다는 듯 이를 드러내며 고개를 끄덕이더니, 버스가 출발하자마자 영화가 계속 이어졌다. 볼륨은 전혀 줄지 않았고, 정확히 자정이 되어서야 꺼졌다. 그리곤 정확히 다음날 아침 8시에, 다시 영화가 시작됐다. 페루인에게 유전적인 청각장애가 있는 게 아니라면, 자정 이전에 잠들거나 아침 8시가 넘도록 자는 것을 법으로 금지한 것이 틀림없다.
페루에 왜 그런 법이 생겼는지 논리적인 이유를 찾지 못하자, TV로 눈이 갔다. 오늘은 폭발음 대신 입술이 벌건 여자들이 많이 등장했다. 딱 봐도 막장극이다. 신경질적으로 고성을 지르는 여자들이 1분에 한 번씩 뺨을 갈겨 댔다. 드라마 같기도 했는데, 대사가 입에서 나오는 건지 발에서 나오는 건지 알 수 없었다. 어떤 배우는 눈동자를 전혀 깜빡이지 않고 카메라를 쳐다보기만 했다. 대사를 화이트보드에 적어두고 연기하는 것 같았다.
누구에게든, 대체 페루에는 영화관이 없어서 버스에서 영화를 보는 것인지 묻고 싶었다. 놀랍게도 우리를 제외한 모든 사람들은 여전히 미동도 하지 않았다. 결국 버스가 달리는 22시간 중에, 자정부터의 8시간을 제외한 나머지 14시간 동안, 눈곱만큼도 이해가 가지 않는 영화 6편을 의무적으로 봐야 했다. 버스에서 내릴 때는 귀에 이명이 생겼는지, 준이 한참을 부르는 것도 듣지 못했다.
다른 사람의 의견이 듣고 싶어서 모든 승객이 내릴 때까지 기다렸는데, 버스에 다른 외국인은 없었다. 나는 페루인에게 유전적인 청력문제가 있다고 결론을 내렸다. 적어도 버스기사는 귀머거리가 확실하다. 버스가 여섯 번 휴게소에 들를 때마다, 기사에게 볼륨을 낮춰줄 것을 요청했다.
도착한 곳은 에콰도르와 국경을 맞대고 있는 툼베스(Tumbes)라는 마을이었다. 적도가 가까워진 탓인지, 부쩍 더워진 날씨가 한여름이다. 귀에서는 여전히 모기소리 같은 이명이 들려, 자꾸만 내 뺨을 찰싹 때리곤 했다.
터미널을 빠져나오자마자 택시기사 100만 대군이 국경으로 모셔다 주겠다고 호객행위를 했지만, 일단 배가 너무 고팠다. 유일하게 알아볼 수 있는 글자인 chicken과 soup가 적힌 가게로 들어갔다. 삼계탕 맛이 나는 수프와 치킨 덮밥, 파인애플 주스를 먹었는데도 가격은 고작 8 솔(3천 원가량)이었다. 위대한 마추픽추에서는 화장실에 다녀올 수 있는 가격이다.
허기를 채운 뒤에는 망설임도 없이 택시를 타고 국경을 넘었다. 덥고 습한 날씨 때문에 짜증이 점점 차오르던 중이었고, 간 밤의 테러 때문에 조금이라도 빨리 페루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묘한 기분이 든 것은, 막 페루를 출국한 직후부터였다.
보통 국경을 넘으면, 다음 나라의 출입국사무소가 나올 때까지 총칼을 든 군인들 외에는 아무것도 없는 풍경이 펼쳐진다. 그런데 에콰도르로 가는 길에는, 사람들로 가득해 발 디딜 틈도 없는 시장이 펼쳐져 있었다.
나는 몇 번이나 등 뒤와 정면에 있는 두 개의 간판을 번갈아 두리번거렸다. 각각 '에콰도르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페루를 찾아줘서 고맙습니다'라고 쓰여 있다. 여전히 국경을 넘고 있는 중이라는 말이다. 시장에서는 빛깔이 남다른 과일을 주로 팔았는데, 준이 깎아 놓은 파인애플을 한입 물더니 이렇게 말했다.
“죽이는데? 고기처럼 국물이 줄줄 흘러.”
“구라 치고 있네.”
무심하게 파인애플을 입으로 가져간 순간 느꼈다. 정말로 그건 내 인생 최고의 파인애플이었다. 한 입 베어 문 자리 양끝으로, 파인애플 국물이 손등까지 줄줄 흘렀다. 맛은 이가 녹을 만큼 달았다. 파인애플에서 신 맛이 난다는 것이 믿기지 않을 정도였다.
온갖 것을 파는 시장으로 이루어진 그 길은 2km나 이어졌다. 상인들은 페루 솔, 달러(에콰도르는 미국 달러를 쓴다)를 가리지 않고 모두 받았다. 등에 멘 가방의 무게도 잊은 채 돌아다니다, 한참 만에야 아직 입국심사를 받지 않았다는 사실을 기억해냈다.
“9와 4분의 3 승강장 같네”
"뭐냐 그게?"
“그 해리포터에 나오는 기차역. 9번도 아니고 10번도 아닌 거기.”
내가 생각해도 적절한 비유에 뿌듯했다. 타고 온 버스부터 뭔가 느낌이 싸하지 않았던가. 페루에도 에콰도르에도 속하지 않는 이곳에서 장사를 하는 저 많은 사람들이, 해가 지면 어느 쪽으로 사라질지 몹시 궁금해졌다.
물어 물어 출입국 사무소에 도착했을 때는, 단물이 잔뜩 고인 파인애플 봉지를 덜렁거리며, 손가락의 단물을 쪽쪽 빨아대고 있었다. 정복을 입은 입국심사관은 마냥 친절했고, 내 파인애플을 바라보며 연신 미소를 지었다. '이 친구들 뭘 좀 아는데? 에콰도르의 파인애플은 세계 최고지'라고 하는 것 같았다.
출입국 사무소를 나와 다시 뒤를 돌아보니, 멀리 환영인사와 작별인사가 나란히 적힌 두 개의 간판이 여전히 보였다. 철조망이나 무장한 군인 같은 것은 보이지도 않았고, 출입국 사무소를 빠져나온 후에도 시장은 계속해서 이어졌다. 이미 22시간이나 버스를 탔으며, 수도인 키토까지는 무려 12시간을 더 가야 했지만, 비행기를 타지 않은 것을 전혀 불평하지 않았다. 국경을 넘을 수 없는 땅에 사는 우리 같은 사람에게, 두 발로 국경을 통과하는 일은 참 흥미로운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