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화 - 다시 혼자가 된 여행자

파나마시티, 파나마

by JUDE

파나마의 더위는 정말 지독했다. 비행기에서 내리자마자 여태껏 느낀 적 없는(거짓말) 진득한 공기가 몸에 달라붙었다. 숨을 내쉬고 나서 돌아오는 공기가 얼굴에 닿을 때면, 낙지가 들러붙는 것 같은 느낌이 났다. 25달러를 부르는 택시기사의 콧김까지 끈적했다.


공항을 빠져나온 차는 반구형으로 뻗은 해안도로를 따라 달렸다. 큰길을 따라 서로 경쟁이라도 하듯 높이 솟은 빌딩이 눈에 띄었다. 웬디스나 피자헛, 맥도널드 같은 체인점이 넘쳐났고, 반짝이는 거대 기타가 붙어있는 하드락 카페도 보였다.


"허. 이런 데 하드락 카페가 있네"


입 밖으로 꺼낸 후에야 혼자라는 사실을 새삼 깨달았다. 하드락 카페가 어떤 곳이던가. 비싸고 맛은 없지만 화려한, 돈을 쓰면서 쾌감을 느끼는 자본주의의 노예들을 위한 곳이 아니던가. 혹시 내가 지금 미국의 어느 외딴 주에 있나 싶어 한동안 창밖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구시가지에 있는 숙소에는 밤이 되어서야 도착했는데, 여전히 '올라(Hola)'하고 인사하는 것이 무척이나 어색했다.


한마디로 파나마는 스페인어를 쓰면서 달러를 화폐로 쓰고, 도심에는 미국 체인점과 쇼핑몰이 가득한 나라였다. 그리고 바나나를 돈 주고 사지 않는 나라다. 호스텔 로비에 아무렇게나 던져져 있는 줄기에서 따 먹기만 하면 된다. 바나나는 아무 데나 씨만 뿌리면 자라는 잡초 같은 존재고, 거리 곳곳에 뜬금없이 바나나 나무가 자라 있었다.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덥고 습하다는 얘기다.


바나나와 바나나 맛 쨈이 발린 토스트를 먹고(왜 바나나 우유는 없을까.) 바깥으로 나왔는데, 30분 단위로 소나기와 태양광선이 번갈아 가며 쏟아졌다. 누군가 스위치를 껐다켰다하는 것 같았는데, 비는 맞는 즉시 온몸에서 물이 뚝뚝 흐를 만큼 거셌고, 태양은 다음 비가 내리기 전까지 옷이 마를 만큼 강렬했다. 그러는 동안에도 땀은 계속 흘렀고, 꿉꿉하게 마른 옷에서는 걸레 냄새가 피어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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낡고 헐벗은 모습이지만 나름의 운치가 있는 파나마시티의 구시가


가뜩이나 도로 사정이 좋지 않은 구시가지는 항상 축축하게 젖어 있곤 했는데, 덕분에 아주 낡은 중세 유럽 분위기가 났다. 좁고 경사진 골목 곳곳에 엄숙한 분위기의 빛바랜 적갈색 건물들이 있었는데, 탱크의 포탄이라도 맞은 것처럼 옆구리가 통째로 떨어져 나가 있었다. 그 사이사이 색칠된 예쁜 건물들은 저마다 메뉴판을 걸고 영업 중인 가게들이다.


나름대로 매력적인 곳이지만, 어디를 봐도 풍요로운 느낌은 전혀 들지 않았다. 건물 벽은 더러웠고, 나무로 된 문은 썩고 곰팡이가 펴서 흉가 같았다. 바다 건너편에 보이는 신시가의 마천루는 홍콩을 떠올리게 했는데, 마치 미래세계의 에덴동산 같았다.



나는 어깨를 움츠린 채 눈을 내리깔고, 울퉁불퉁한 구시가 곳곳에 자리 잡은 상인들의 좌판을 구경했다. 모자나 우산, 팔찌, 이제는 더 쓰이지 않는 옛 발보아 동전(원래 파나마의 화폐. 지금은 미국 달러를 쓴다.) 같은 것을 팔았다. 충분히 흥미를 느낄만한 풍경이었지만, 도시는 프라이팬에 달궈진 듯 더웠다. 한 발짝만 걸어도 땀이 비 오듯 쏟아졌고, 짜증을 내뱉어도 들어줄 사람이 없다는 사실이 다시 짜증을 불러일으켰다.


이럴 수가. 설마 내가 준을 그리워하는 건가? 이제 고작 이틀이 지났을 뿐인데. 시도 때도 없이 내리는 비 때문이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문이 썩지 않은 카페에 앉아 준이 없는 즐거움을 생각했다. 비싸고 맛은 없어 보이는 식당을 피해 마음껏 버거를 먹을 수 있고, 한 시간에 한 번씩 담배를 피우기 위해 멈춰 설 필요가 없어졌다. 매일같이 나갈 준비를 마치고도 로비에서 어슬렁거리다, 한참이나 뒤에 세상 못생긴 수염이 덥수룩한 사내와 함께 숙소 밖을 나서며 부끄러워 하지 않아도 된다. 그렇다. 나는 지금 완벽한 자유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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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페를 나와 곧장 신시가지로 향했다. 자유인에게 걸맞은 자본주의의 쾌락을 마음껏 누리고자 했다. 그러나 신기루처럼 보이던 빌딩 숲에 들어서자 도무지 어디가 어딘지 알 수가 없었다. 온통 크고 높기만 한 건물에는 눈에 익숙한 은행 로고가 박혀있었고, 작은 비스트로와 레스토랑 대신 거대한 백화점만 눈에 띄었다. 우표를 사고 싶었는데 우체국을 아는 사람은 왜 그리도 없는지. 비즈니스 지구라면 어디든 우체국이 있기 마련 아닌가!


결국 나는 신시가지에서 발을 떼기로 했다. 이 낯선 세계의 신도시는 그럴듯한 목적도 아름다운 추억도 없이 홍콩이 되려고 하고 있다. 그런 감상을 떠올린 스스로를 대견스러워하며 거대한 빌딩 숲에서 등을 돌렸다. 준이 옆에 있었다면 '담배 한 대 피자'라고 외치곤, 고약한 냄새와 함께 감상이 통째로 날아가 버렸을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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뚜렷하게 구분되는 파나마 시티의 신시가(왼쪽)와 구시가(오른쪽)


문제는 어딜 가도 따라오는 비였다. 처음 파나마 시티에 올 때는 핸드드립으로 유명한 어느 카페에서 마셨던 파나마산 커피 향을 떠올렸다. 커피를 마시지 않는 내가 봐도 향기로운, 와인처럼 진한 과일 향이 나는 커피였다. 그러나 현실은 하루 종일 더위와 소나기와의 기 싸움이었다.


결국 쾌적한 에어컨 바람을 뿜어내는 알브룩 몰(Albrook Mall)에서 주로 시간을 보냈다. 크리스마스를 앞두고 한껏 멋을 낸 쇼핑몰에서 샌들과 청바지를 샀다. 남미를 떠나던 날 가지고 있던 두꺼운 옷을 모두 버린 덕에 배낭이 한결 가벼워진 참이다. 역시 돈은 쓰는 맛이지.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만족스러운 쇼핑을 마치고 나자, 발걸음이 가벼운 지금이야말로 파나마 운하를 방문하는 적기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상한 기분이 들기 시작한 것도 그즈음이었다. 시외버스터미널로 이어지는 쇼핑몰 출입구에는, 피난민이 몰려든 것처럼 사람들이 많았다. 물어물어 운하로 가는 버스정류장을 찾다 갑자기 쏟아져 나온 인파에 휩쓸렸다. 다리가 바닥에서 떨어질락 말락,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던 그때 낯선 느낌이 내 바지를 스쳤다. 이상한 기분에 호주머니에 손을 넣어보니 핸드폰이 감쪽같이 사라졌다.


재빨리 뒤를 돌아보니 한 남자가 손가락으로 반대쪽을 가리키면서 알 수 없는 소리를 질러댔다. 순간 지금 고개를 돌리면 영원히 내 핸드폰을 못 볼 거라는 확신이 들었다. 일이 틀어졌음을 깨달은 남자가 뒤돌아 사람들을 헤집고 달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몰려든 인파 속에서 채 열 걸음도 가기 전에 잡혔고, 어깨에 멘 쇼핑백에 곱게 접혀 있던 새 옷들은 사방으로 흩어져 지저분한 발자국 위로 쏟아졌다.


여행 5개월 만에 처음 당한 소매치기였다. 준이 옆에 있었더라면 '쟤는 저래가지고 밥은 먹고 살겠냐. 멍청하게. 밥이나 먹으러 가자.'라며 넘겼을지 모른다. 그러나 지금 나는 철저히 혼자였고, 더위와 소나기로 인한 짜증도, 그리움으로 인한 슬픔도, 사소한 사건이 공포가 되어 심장을 죄여 왔다. 혼자인 내가 할 수 있는 거라곤 숙소 침대 위에 몸을 뉘 일 때까지 가방을 품에 끌어 앉은 채 불안한 눈동자를 좌우로 굴리는 것뿐이었다.


우리가 파나마에 대해 알고 있는 단 하나이자 모든 것인 파나마 운하


또 한차례 소나기를 뚫고 겨우 침대 앞에 섰을 때 다리에 힘이 풀려 엉거주춤 드러누웠다. 이대로 누우면 하루 종일 땀과 비에 반반씩 젖은 셔츠가 등에 달라붙어 인생 최악의 불쾌감을 경험할 것이라는 경고는 한발 늦게 울렸다.


그 날따라 유난히 천천히 돌아가는 천장의 거대한 팬 아래에서 웃통을 벗은 뒤 그녀에게 전화를 걸었다. 딩동 하는 통화연결음에 눈에서 소나기가 내릴 지경이었지만, 낮에 겪었던 소매치기와 끔찍했던 날씨 얘기만 줄줄이 늘어놓았다. 그러자 그녀가 말했다.


“준 오빠랑 있을 때는 안 그러더니 헤어지자마자 뭔가 다시 찌든 직장인 같아졌어. 여전히 여행이잖아. 좀 더 즐겨.”


파나마에서 가장 핫한 섬에 가야겠다고 마음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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