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카스 델 토로, 파나마
"파나마에서 제일 핫한 해변이 어디야?"
"음... 글쎄. 원하는 게 뭐야?"
"파티, 술, 정열."
더운 공기에 순간순간 고개를 쳐드는 짜증을 꿀꺽 삼킬 만한 파도가 있는 곳. 용광로처럼 펄펄 끓어오르는 정열과 젊음이 있는 그런 해변 말이다. 물론 거기까지 설명하지 않아도 호스텔 직원은 내 말을 정확히 이해한 듯했다.
"그렇다면 산블라스나 보카스 델 토로 정도가 아닐까?"
당장 오늘 밤 보카스 델 토로(Bocas del Toro)로 가는 야간 버스를 타기로 했다(다음 목적지인 코스타리카로 가는 방향이었다). 파나마시티를 떠나는 건 점심 메뉴를 정하는 것보다 쉬운 결정이었지만, 이놈에 도시는 시외버스를 타는 게 제일 어렵다.
버스를 타기 위해 기다리는 대합실에서 또 한 번 소매치기를 만났다. 한 소년이 내 주머니에 손을 넣기도 전에 내 눈과 마주쳤고, 놈은 태연하게 또 다른 희생양을 찾아 사라졌다. 버스는 좁아 불편했고, 9시간 동안 거의 깨어 있었던 탓에 막상 내릴 때는 몸이 제대로 움직이질 않았다.
버스에서 내린 곳은 작은 선착장이었다. 보카스 델 토로로 들어가는 보트에 타기 위해 모여든 사람은 스무 명 남짓. 대부분 가족 혹은 연인으로, 동료가 될만한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날씨마저 구름이 가득해 우중충했는데, 무언가 복선같이 느껴져 기분이 꺼림칙했다. 애초에 카리브해 따위엘 혼자 가서 뭘 어쩔 셈인 것인가.
섬 안이라도 붐비길 바랐지만, 거리는 쥐 죽은 듯 고요했다. 구름을 꿰뚫은 아침 햇살이 희미하게 지붕을 비추곤 했지만, 비수기를 맞아 장사꾼들은 가게 문을 닫고 본토로 돌아가 버린 뒤였다. 마을에 딱 하나 있는 큰길을 따라 등이 흠뻑 젖을 때까지 걸으며, 최대한 입구가 트여있는 호스텔을 찾아 체크인했다. 바깥으로 뚫린 로비의 해먹에 바닷가가 지겨워진 여행자들이 하릴없이 매달려 책이나 읽고, 바로 옆에 있는 부엌에서는 팬케이크를 굽는 냄새가 가득한 곳이었다. 나는 카운터 바로 앞에 커다랗게 매달려 있는, 아직 녹색이 채 가시지 않은 바나나로 손을 뻗었다.
"거기 독 들었어"
팬케이크를 손에 든 한 남자가 장난스럽게 말했다. 그리곤 잘 익어 보이는 바나나를 골라 손수 떼어준다. 아무렇게나 묶은 긴 머리와 맨발, 원래 백인이라고는 생각하기도 힘들 만큼 검게 탄 피부에서 한눈에 ‘생활 여행자’임을 눈치챘다. 자신을 데이빗이라고 소개한 그는 미국에서 출발해 남미로 가는 여행중이었다. 방향은 반대였지만, 나는 데이빗과 함께 생애 첫 카리브해를 보러 갈 것을 의심치 않았다.
그러나 녀석은 아침 식사를 마친 후 콜롬비아로 떠났고, 대신 이 섬에서 사귄 몇 명의 친구들을 소개해줬다. 벌써 한 달째 섬에 머물며 스페인어를 배우는 유럽인들이었는데, 우리는 같이 작은 보트에 몸을 싣고 어딘가에 있는 해변을 찾았다.
“그러니까 여기 이름이 뭐라고?”
“스타 피시(Star fish) 해변이야. 바다에서 걸을 때 발밑을 조심해. 사방에 스타 피시들이니까.”
그들은 곧 울창한 정글을 따라 늘어선 어느 야자수 그늘에 자리를 잡았다. 그리곤 각자 가져온 커다란 비치타월을 바닥에 깔더니 엎드려 누워 꼼짝도 하지 않았다.
“아무도 바다에는 안 들어가는 거야?”
“놀다 와.”
나무 그늘에 누워서 죽은 척하기가 이 섬의 신종 놀이인지는 모르겠지만, 녀석들은 3시에 돌아가는 배가 올 때까지 네 시간동안 꼼짝도 않고 누워만 있었다(잠시 일어나 어슬렁거리긴 했다). 바닷속에는 그 이름처럼 불가사리가 가득했고, 마치 누군가 장식으로 깔아놓은 것 마냥 알록달록했다. 나는 생애 처음으로 마주한 카리브해를 네 시간 동안 바라보는 기회를 가졌다. 그러고 보니 해변에 온 것부터가 오랜만이었다. 잔지바르가 마지막이었지 아마? 다시 숙소로 돌아온 뒤, 저녁에 뭐 할 거냐는 질문에 할 일이 있다고 둘러댔다. 이렇게 지루한 녀석들과 같이 있다가는 말하는 법을 잊어버릴 것 같았다.
다음날은 제법 큰 보트를 타고 조금 더 먼 바다로 나가기로 했다. 길이 사라지고 바다가 자리한 풍경에 잠시 지난 추억을 되새기기도 했다. 점점 푸르고 머릿결처럼 부드러운, 흐트러진 겹겹 구름이 바람에 스친다. 보트를 타고 가는 길에는 돌고래 서너 마리가 곁을 지나쳤다. 잔지바르의 눈부신 해변에 두고 온 생각들이 벌써 5개월이 흘렀다. '오랜만이야'하고 외칠 새도 없이 보트가 빠르게 풍경들을 지나쳤지만, 어쩐지 녀석들도 나와 같이 여행 중이라는 생각에 안도감이 들었다.
왠지 이곳에서 유리병에 돌돌 말린 편지 한 통 띄워 보내면 대서양을 지나 그곳에 닿을 것만 같은 느낌이다. 불쑥 그녀가 한국이 아니라 잔지바르 같은 곳에 있으면서 서로를 그리워했으면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의 곁에도 무언가 아름다운 것이 있었으면 했다. 나에게 ‘한국’은 아직은 돌아가고 싶은 곳이 아니다. 단지 그리운 사람이 있을 뿐.
생각이 끝나기 전에 보트가 바다 위에 설치된 나무 갑판에 멈춰 섰다. 여기저기서 모여든 여행자들이 어울려 하나뿐인 레스토랑에서 식사를 주문 중이었다. 흥겨운 레게 음악이 사방을 채웠고, 대낮부터 취한 누군가는 흥청망청 춤을 추며 바다에 빠지곤 했다.
즐기지 못하고 있는 사람은 나 하나뿐인 듯했고, 나는 본격적으로 주변을 탐색했다. ‘시체놀이’가 취미가 아니면서 적당히 즐길 줄 아는 사람, 너무 깨끗하지도 더럽지도 않은, 이왕이면 커플이 아닌 무리를 찾았다. 나는 마침내 타깃을 정했고, 기회를 기다렸다. 셋이서 돌아가며 사진을 찍는 그들이 단체 사진을 원할 때가 바로 그때다. 그러면 자연스럽게 다가가 "찍어줄까?”라고 말하는 거다.
“찍어줄까?”
"사진 좀..."
그중 한 명과 내가 동시에 입을 열었다. 내심 쾌재를 불렀다.
“고마워. 사진 찍어 줄 사람을 찾는 중이었거든.”
나는 열과 성의를 다해 대여섯 장의 사진을 찍었다. 마침 점심을 먹는 시간이었고, 속으로는 ‘빨리 초대해. 초대하란 말이야!’라고 외쳤다.
“혼자 왔어? 우리 밥 먹으러 갈 건데 같이 먹을래?”
간절히 바라면 이루어진다고 했던가. 나는 능숙하게 세 명이 자리 잡은 테이블의 빈자리에 함께 앉았다. 그들은 바다 위에 지어진 바에서 음식을 사 왔고, 나는 준비된 햄버거와 파인애플, 그리고 프링글스를 꺼냈다.
“혼자서 이 많은 걸 다 가지고 왔어?”
아니. 그건 니들 거였어. 처음부터. 모든 것이 나의 시나리오대로였고, 우리는 준비된 음식을 나눠 먹으며 이야기를 나눴다. 이스라엘에서 왔다는 아론과 슬로미는 친구였고, 이제 곧 마흔 살 생일을 맞는 윌리엄은 프랑스에서 코스타리카로 와 여행 중에 둘을 만났다고 했다.
특히 아론과 슬로미는 군대를 다녀왔다는 점에서 이야기가 잘 통했다(심지어 나보다 10개월을 더 복무했다). 이스라엘의 군대 이야기는 상당히 흥미로웠는데, 군대라기보다는 체계가 잘 갖춰진 사관학교에 가깝다는 느낌이었다. 우선 소질과 적성에 맞는 군부대(유니트라고 한다)를 선택하고, 그 속에서 개인의 소질과 능력을 개발할 수 있도록 철저하게 교육이 이루어진다. 많은 사람이 군대에서 공부하고 사업도 한다고 하니, ‘이스라엘은 여자도 군대에 간다더라’ 같은 이야기는 신선한 축에도 끼지 못했다.
점심을 먹은 뒤 보트는 해변으로 향했다. 레드 프로그(red frog)라는 이름이 붙은 해변이었는데, 백사장 뒤에 거대한 정글을 등지고 있었다. 카리브해의 종특이라고 해야할까. 끝없이 펼쳐진 백사장 대신 그 속을 알 수 없는 정글이 펼쳐지고, 그 빛을 받은 바다는 녹빛으로 빛난다.
줄을 맞추어 심어놓은 야자수가 아닌, 아무도 다듬지 않아 제멋대로인 숲은 정말 아름다웠고, 이름 모를 수초들이 바닷속에 흐드러진 바다는 그 속살도 정글 같았다. 얼핏 보면 무인도에 상륙한 것처럼, 시시각각 색을 바꾸는 원시림으로 둘러싸인 그 바닷가에서 비치발리볼이 벌어졌다.
보트는 해가 지기 전에 선착장으로 돌아왔지만, 우리는 자연스레 저녁 일정을 물어본 뒤 바에서 다시 만났다. 요란하지 않은 조명에 한쪽에는 거대한 스크린이 걸려있고, 반대쪽에서는 라이브 밴드의 노래가 한창이다. 밴드의 무대가 끝나자 누군가 외쳤다.
“오픈 잼! 누가 먼저 할래?”
악기와 마이크는 여전히 제 자리에 있었고, 누구든 노래를 부르기만 하면 맥주 1병이 공짜다. 신기하게도 그 어색한 공간에서 누군가는 계속 나와서 노래를 불렀다. 그렇게 하나둘씩 술에 취해가자 나중에는 줄을 서야 할 지경이 되었다. 우리는 바가 문을 닫을 때까지 술을 마셨고, 그 후에도 아론과 슬로미의 방으로 가 계속 마셨다. 다시 혼자가 되는 것이 싫었던 지, 새벽 세 시가 되어서야 내 방침대로 돌아왔는데, 아직 아무도 들어온 사람이 없었다. 역시 섬에서는 누군가와 어울려 흥청망청하는 것이 제일이다. 나는 ‘프링글스가 신의 한 수였지’ 따위의 헛소리를 지껄이다 잠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