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마린도(Tamarindo), 코스타리카
"코스타리카에서 제일 핫한 해변이 어디야?"
라포르투나를 떠날 때도 같은 질문을 했다. 누가 보면 여자나 파티에 환장한 줄 알겠지만, 도망치는 중이다. 지긋지긋한 비와 정글에서부터. 그렇다면 바다로 가자. 이왕이면 끝없는 백사장이 펼쳐진 태평양으로 가자. 가서 아무도 모르게 마음껏 그리움을 흘리고 오자.
눈을 뜨자마자 짐을 싸들고 뛰쳐나왔다. 하필 비가 그쳐 구름 사이로 푸른색이 비집고 나오던 아침이었지만, 곧장 버스정류장으로 갔다. 버스가 출발할 즈음에는 조금씩 해가 들기 시작했는데, 그제야 라포르투나가 어떻게 생겨먹은 곳인지 짐작이나마 할 수 있었다.
화산과 화산 작용으로 생긴 거대한 호수를 품은 마을. 시선을 호수 한가운데로 옮기자, 여전히 잔뜩 몸집을 부풀린 안개가 무언가를 숨기고 있었다. 버스가 앞으로 달리는 내내, 행여라도 화산이 그 모습을 드러낼까 싶어 고개를 계속 뒤로 젖혔다. 타는 사람도 내리는 사람도 드문 그 시골길에 여행자라고는 오로지 나 혼자였고, 화산은 끝내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아무리 세계일주 여행자라고 해도 볼 수 없는 것은 있기 마련이다.
타마린도(Tamarindo)는 멀지는 않았지만 버스를 세 번씩이나 갈아타야 했다. 독특한 발음의 이름과는 달리 전형적인 태평양 바다의 모습이었다. 끝없이 펼쳐진 백사장과 드문드문 자리 잡은 파라솔, 더 이상 파랄 수 없을 것 같은 하늘과 파도와 힘겨루기 중인 서퍼들.
탁 트인 야외에 해먹과 모이기 좋은 의자가 놓인 숙소를 잡았다. 점심때가 되자 사람들이 하나둘씩 부엌으로 모였다. 나이도 국적도 제 각각인 여행자들은, 낮에는 '왜 그렇게 긴 여행을 시작한 거야?' 따위를 묻다가도, 해가 지면 해변의 펍에서 술병을 입에 물고 정신 줄을 놓았다가, 다시 날이 밝으면 어디론가로 흩어지곤 했다.
만나고 헤어지는 것이 여행자의 일상이라지만, 그즈음 나는 혼자 하는 여행의 한계에 부딪혔다. 이대로 계속 여행을 해도 괜찮은가. 앞으로 나아갈 의지는 있는가. 준과 함께 있을 때는 한 번도 고민한 적 없는 물음들이, 새로운 사람을 만날 때마다 떠올랐다.
매일매일 겪는 이별도 나를 지치게 만들었다. 서로가 몰고 온 바람 냄새에 이끌려 어울리다가도, 그 즐거운 기억이 뿌리내릴 틈도 없이 내일이면 또 각자의 목적지를 향해 흩어지는 것이다. 그때마다 똑같은 줄거리를 읽어준 뒤, 다음날이면 헤어지는 것에 진절머리가 난 나는, 사흘째부터는 누구와도 말을 하지 않았다.
그건 일종의, '해변'이라는 장소가 여행자에게만 내뿜는 치명적인 독소다. 도시와 달리 느긋하게 앉아 내려다보기에는 너무 뜨거운 것이다. 비키니와 파도, 술과 파티는 생각할 여유를 주지 않는다. 너무 강한 유혹에 사랑과 정열을 불태우고 나면, 영혼까지 빠져나가 어느 아침엔가 쓱 하고 떠나게 되는 것이다.
그렇다고 카페에서 우아하게 커피를 들이켜며, 천천히 사색에 잠기고 싶은 것도 아니었다. 아무것도 할 게 없어진 나는, 제법 넓은 나무 그늘이 펼쳐진 한 호텔 담벼락에 자리를 깔고 누웠다. 손에는 꼬부랑글씨가 잔뜩 적힌 책이 들려있었다. 반 시간 정도가 지났지만, 몇 번을 젖었다 말랐다를 반복했을 책에서 나는 종이 냄새가 그날따라 거슬렸다. 헌책 냄새가 나지 않는 공기를 찾아 하늘 쪽으로 고개를 돌리자 나무 사이로 파란 여름의 하늘이 보였다. 새해를 불과 사흘 앞두고 있는데 말이다.
다시 고개를 내리니, 추레한 아저씨가 있는가 하면, 선글라스 대신 안경을 낀 고지식한 대학생도 있고, 예술가 분위기를 풍기는 히피들이 있는가 하면 도인같이 긴 수염을 기른 할아버지도 있었다. 특히 쏟아지는 햇빛 속에 끈적거릴 서로의 몸을 밀착시킨 채 돌아다니는 젊은 남녀의 모습은, 나를 더더욱 그늘 밖으로 나가지 못하게 만들었다.
“혼자야?”
에밀을 만난 것도 그때쯤이었다. 세상이 통째로 망한 것 같은 표정을 하고 있던 나에게 말을 걸더니 뜬금없이 가수 태양의 팬이란다.
“내가 한국인이라는 걸 어떻게 알았어?”
“니 핸드폰이랑 카메라. 그런 좋은 장비를 들고 이런 곳에 오는 사람은 한국인들 뿐이지. 한국 여자를 만나보기도 했지만 말이야.”
캐나다에서 세무사로 일하다 2주째 연말 휴가를 보내는 중인 에밀은, 내가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자 다짜고짜 술잔을 내밀었다.
“한잔해. 어차피 공짜야. 이 호텔에서 묶고 있거든”
불투명한 플라스틱 컵에 담긴 알록달록한 액체는 새콤하면서 독한 맛이 났는데, 먹다 보니 중독처럼 계속 먹게 되는 묘한 매력이 있었다. 보카스 델 토로에서 프링글스와 파인애플을 들고 다니던 내 모습이 떠오르자 녀석이 불쌍해 보이기 시작했고, 그제야 나도 입을 열었다. 물론 '여행은 얼마나, 왜 했냐'라는 질문을 하지 않은 거의 유일한 외국인이기도 했다.(대신 여자 친구가 있는지 물었다.)
에밀은 모르는 여행자와 친해지는 데에 능숙했다. 거리에서 만난 서퍼들과도, 어느 잘 차려진 식당에서 만난 한국인 부부와도, 가벼운 농담과 인사를 주고받았다. 참으로 오랜만에 먹은 비싼 식사를 마친 뒤 파도에 휩쓸려 한낮을 보내고 나니, 그래도 역시 여행은 어울리는 것이 즐거운가 싶었다. 길거리 버거의 네 배에 달하던 점심 값을 녀석이 내주기까지 했으니 말이다.
“니 밥값 정도는 회사 카드로 해결할 수 있어.”
해가질 무렵까지 녀석이 건네주는 칵테일을 연거푸 마시며 함께 밤을 기다렸다. 크리스마스와 새해 사이의 어느 즈음이던 그 날은, 해변 어디에도 파티가 한창이었다. 강남스타일이 끊임없이 들려왔고, 사람들은 얼마 남지 않은 한 해를 몸에서 털어버리려는 듯 마구 몸을 흔들어댔다.
밤이 꽤 깊었을 무렵, 그만 가야겠다 싶어 파티장을 빠져나가는 길에 에밀이 큰 소리로 나를 불렀다. 영문도 모른 채 녀석을 따라 도착한 곳은 낮 한동안 내가 등을 기대 여름의 하늘을 바라보던 바로 그 호텔이었다.
“그 난리를 치고 싸구려 호스텔에 가서 자려고? 몇 번을 씻어도 끈적거릴 거야. 베드 버그가 없으면 다행이지. 그냥 여기서 자고 가”
알딸딸한 순간에도, ‘자고 가’라는 단어를 듣는 순간 한 가지 생각이 뇌리를 스쳤다. 게이구나. 갑자기 술이 번쩍 깨는 기분이었고, 내가 생각해도 궁색한 핑계를 대며 빠져나가려던 그 순간 녀석이 팔을 잡아당겼다. 강제로 몸이 젖혀진 나를 향해, 녀석의 입술이 다가왔다. '어... 어...' 하는 찰나에 입술이 닿았고,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뭐 하는 짓이야. 이 미친놈아. 나는 빌어먹을 게이가 아니라고!”
“키스할 때 어차피 눈을 감을 텐데, 남자든 여자든 그게 무슨 상관이야?”
미친놈이다. 진짜 완전 미친놈. 그제야 정신이 번쩍 들었다. 분위기 있는 레스토랑에서 밥을 사고, 술을 잔뜩 권한 뒤 클럽에서 놀다 호텔 방이라니. 뻔해도 너무 뻔한 전개다. 단지 내가 '게이'라는 존재에 대한 자각이 없었을 뿐.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단어를 총동원해 내가 느낀 수치와 분노를 표현하고 싶었지만, 영어로 화를 내는 일만큼 어려운 게 없다. 가운데 손가락을 치켜세우며 뒤도 돌아보지 않고 그 자리를 벗어났는데, 등 뒤로 녀석이 외쳤다.
“네가 오늘 하루 종일 먹은 그 술 이름이 뭔 지나 알아? 섹스 온 더 비치라고, 멍청아”
맙소사. 나는 그 날 ‘섹스 온 더 비치’를 10잔은 마셨다. 어두운 골목길에서 혼자가 되자 눈물이 날 것 같았다. 혀가 닿은 것도 아닌데 잇몸에 피가 날 때까지 이를 닦았고, 그때 즈음에는 분노기 치밀어 올랐다. 결국 그 짜증과 화는 이번에도 고스란히 그녀의 몫이 되었다. 그녀가 ‘그랬구나’를 스무 번 반복할 때까지, 키보드를 부술 것처럼 두들겼다. 다 끝낸 뒤에는 또 이를 닦았다. 밤새 뒤척이다 아침이 왔지만, 진정이 되질 않았다. 어디 가서 하고 싶은 이야기도 아니지만, 누구 하나 들어줄 사람도 없었다. 뭐든 미칠 것이 필요했다. 이 악몽을 머릿속에서 지우려면 뭐든 해야 한다.
최악의 선택은 항상 최악의 상황에서 나오는 법이다. 뒤도 안 보고 떠났어야 할 그날, 하필이면 해변의 서핑 보이(정식 가게 없이 개인 장비로 강습을 하는 사람) 중에 한 명을 골라 서핑을 배웠다. 더 이상 뇌를 생각하는 데에 쓰지 않기 위해서였다. 두어 시간을 파도와 싸우다 다시 백사장에 올라왔을 때에는, 가방 속에 든 핸드폰이 감쪽같이 사라진 뒤였다. 그녀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었고, 모든 여행정보가 다 그 안에 들어있었다. 서핑 보이는 원래 해변가에 좀도둑이 많다며 어깨를 으쓱할 뿐이었다. 내 가방은 녀석과 일행들의 장비 사이에 놓여 있었는데 말이다.
순간 단검에 찔린 듯한 통증이 느껴졌다. 동시에, 제아무리 긴 시간이 지나도 타 마린도에서의 일이 추억이 되는 날은 오지 않을 거라는 확신이 들었다. 타마린도를, 아니 제대로 된 게 하나도 없는 이 빌어먹을 중앙아메리카에서 하루라도 빨리 떠나야 한다. 이제 내가 무너지는 것은 시간문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