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나구아, 니카라과
짐 검사랄 것도 없었다. 무장한 경찰이 바리케이드 너머에서 두리번거린다. 불과 2주 동안 두 번의 소매치기와 한 번의 성추행을 겪긴 했지만, 저 경찰이 필요한 일은 아마 벌어지지 않을 것이다. 코스타리카의 국경심사대를 통과하는 데는 30초가 걸렸다. 국경을 빠져나온 뒤에는 최대한 빨리 걸었다. 바람에 흔들리는 코스타리카 국기가 거슬리기도 했고, 지난 며칠간의 일들이 악몽처럼 떠올랐기 때문이기도 했다.
코스타리카-니카라과의 국경지대는 어딘가 아프리카를 닮은 듯한 모습이었다. 널빤지와 판자로 대충 지어진 가게들이 그랬고, 모래와 흙으로 뒤덮인 도로가 그랬다. 한 남자가 다가와 입국신고서를 내밀며 '원 달러'를 외쳤지만, 1초도 망설이지 않고 좁은 칸막이 안에 갇혀 있는 이민국 직원을 향해 곧바로 다가갔다.
아무도 지갑을 열 것 같지 않은 엉성한 면세점을 지나고 나니 도로는 온통 황무지였다. 덥고 습한 공기 때문에 그렇지 않아도 숨이 막히는 통에 버스정류장 가득 들어서 있는 '치킨버스(중앙아메리카 지역의 거의 유일한 대중교통)'를 보고 맥이 풀렸다. 그 한 장면이 니카라과가 어떤 나라인지를 백과사전보다 더 정확하게 말해주는 듯했다. 버스에 올라 닭장에 갇힌 닭의 심정을 느낀 후에야 코스타리카가 왜 '중앙아메리카의 낙원'(믿기지 않지만 실제로 그렇게 불린다)으로 불리는지 이해가 됐다. 코스타리카는 중앙아메리카에서 치킨버스를 타지 않고 이동이 가능한 유일한 나라다.
'타마린도 사건' 이후 여행의 목적이 분명해졌다. 최대한 빨리 이 대륙에서 빠져나가는 것. 멕시코까지 대륙을 관통해 가는 버스가 있었다면 기꺼이 탔을 것이다. 그러나 현실은 언제나 비현실적으로 절망적이다. 멕시코까지는 국경을 최소 세 번은 더 넘어야 한다(그 중의 하나는 전세계에서 살인율이 가장 높다는 온두라스다). 기차도, 남미의 흔하디 흔한 장거리 버스도 없다. 그걸 아는지, 중앙 아메리카의 항공권은 정말 말도 안되게 비쌌다. 결국 몇 번이 될지도 모를 로컬 버스를 타고 조금씩 나아가는 수 밖에 없다.
페리를 타는 곳까지는 치킨버스로 반 시간 정도가 걸렸다. 마른오징어처럼 버스 안에 구겨져 있는 동안 누군가의 팔꿈치가 갈비뼈를 눌러대는 통에 비명을 지르고 싶은 것을 참고 또 참았다. 천만 다행히도 오메테페(Ometepe) 섬으로 가는 페리는 널널했다.
배가 호수를 가르며 섬으로 가는 내내 두 개의 화산이 신기루처럼 흐릿하게 보였다. 미리 얻은 정보에 의하면 큰 놈이 '콘셉시온'이고, 작은 놈이 '마데라스'라고 불린다. 친절한 론니플래닛은 '오메'가 산이고, '테페'가 둘이라는 설명도 빼놓지 않았다.
작은 녀석은 이미 심장이 멈춘 지 오래지만, 큰 놈은 올해 한번 마그마를 분출했다. 그래선지 배가 섬에 가까워지자 산자락을 따라 검고 깊게 파인 자국이 멀리서도 선명하게 보였다. 꼭대기에는 고깔모자를 쓴 것 같은 구름이 걸려있었는데, 마치 그 상처를 덮으려는 것 같았다.
나도 그랬다. 부끄럽고 모욕적인 기억을 무엇으로든 덮고 싶었다. 그대로 주저앉을 수도 있었지만, 나는 주저않을 곳 조차 없는 떠돌이다. 머물 곳이 없는 사람은 벗어날 수도 없다. 결국은 계속해서 무언가를 향해 나아갈 수밖에 없는 것이 여행자의 운명이다. 그렇게 오메테페를 찾아냈다. 끝내 볼 수 없었던 단 한 가지, 살아있는 화산을 보기 위해서였다.
관광지라고 하기에는 아무것도 갖춰지지 않은 오메테페 섬은 조용했다. 해가 질 무렵 호수길을 따라 지어진 제방에서 시지프스처럼 끊임없이 다이빙을 시도하는 아이들마저 사라지니, 온 동네가 잠에 든 것처럼 고요해졌다. 앞에는 화산, 뒤에는 호수가 있는 섬에 갇혀 살아야 하는 운명이라니. 콘셉시온 마저도 활동을 멈춘다면 그나마 있던 외국인들의 발길도 끊길 텐데 말이다.
해가 완전히 지기 전에 아직 빵 굽는 냄새가 가시지 않은 가게에 들러 내일 아침에 먹을 빵을 몇 조각 산 뒤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 같은 배를 타고 왔던 다섯 명의 외국인 덕에 다음날 새벽부터 콘셉시온을 등반하는 투어에 참가할 수 있었다. 가이드와 함께 아직 공기가 쌀쌀한 새벽부터 트레킹이 시작됐다. 방문을 나서면서 '이런 게 스톡홀름 증후군이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화산 때문에 그 고생을 하고도 결국 다시 화산의 품으로 돌아오지 않았는가.
도로가 끝나고 땅이 속살을 드러낸 오메테페의 바닥은 온통 검은색 흙으로 덮여있었다. 화산재가 섞여서란다. 까맣고 고운 모래를 한 움큼 움켜쥐고 냄새를 맡아봤지만 그저 거름 냄새가 났다.
“근처에 말 농장이 있어. 길을 잘 보고 걸어야 할 거야”
트레킹은 순조로웠다. 비는 오지 않았고, 경사가 심하지도 않았다. 그러다 중턱에 올랐을 때 갑자기 짙은 안개가 끼기 시작했다. 단순한 안개는 아닌 것이 매캐한 유황 냄새가 피어나 숨쉬기가 힘들었다. 안개는 점점 짙어져 한 걸음만 더 나아갔다간 삼켜질 것 같았는데, 한참을 버티던 가이드가 결국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우리는 충분히 안개가 멀어진 곳까지 내려와 점심을 먹고, 사람이 지나간 흔적이라고는 전혀 없는 풀숲을 뒤지며 사방이 확 트인 곳으로 나아갔다. 광활한 초원이 바다 쪽으로 펼쳐졌고, 마그마가 흐른 길을 따라 위태롭게 패인 협곡 너머로 놀란 사슴 몇 마리가 도망쳤다. 무려 6시간을 걸었지만 결국 이번에도 화산의 속살을 보는 데에는 실패했다. 그저 왼쪽 발목에 통증을 느낄 뿐이었다.
미련 없이 다음날 오메테페를 떠났다. 쏟아지는 빗속에서 일주일을 기다렸던 끈기도, 누군가를 만나기 위해 파인애플을 준비하던 의지도 사라졌다. 그저 조금이라도 더 나아가 벗어나고 싶었다. 무엇으로부터 인지는 나도 잘 몰랐다.
같이 콘셉시온에 올랐던 독일인과 그라나다(Granada)로 가는 버스를 탔다. 미어터질 것 같은 치킨버스에서 내린 곳은 그라나다에서 가장 큰 재래시장 한가운데였는데, 한 걸음을 디딜 때마다 두세 번씩 사방으로 오가는 사람들과 부딪혀 밀려날 정도로 사람이 많은 곳이었다.
“쥬드. 따라오고 있어? 저기 앞에 호스텔이라는 글자가 보여. 일단 저리로 피하자고”
의욕을 상실한 나와 달리, 그는 곁에 누군가 있다는 사실이 즐거워 보였다. 분명히 그의 이름과 직업, 그리고 지금까지 여행한 나라들에 대한 감상까지 들었는데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는다. '마티아스'라는 이름을 간신히 떠올린 것만 해도 다행이었다
인파를 피해 들어간 건물은 호스텔이라기보다는 거대하고 오래된 저택 같은 곳이었다. 집 안은 온통 엔틱가구로 가득했는데, 너무 큰 집에 혼자 살기 심심한 노부부가 취미로 운영하는 느낌이 물씬 풍겼다.
“1인실은 10달러예요. 그렇지만 침대 두 개가 있는 방은 15달러에 가능해요.”
내가 생각에 잠겼을 때 마티아스는 이미 내 옆구리를 쿡쿡 찌르며 돈을 꺼내고 있었고, 이제 와서 거절할 방법은 없었다. 땀으로 흠뻑 젖은 옷을 갈아입은 우리는 여전히 발 디딜 틈 없는 시장통을 헤집고 나무 그늘이 많은 공원에 닿았다. 사람들은 유난히 과일 향이 많이 풍기는 커피잔을 손에 들고 있었는데, 이제 보니 그라나다는 정교하게 깎여진 기둥으로 장식된 중세 주택, 진녹색의 바다, 조용한 공원 등이 대단히 아름다운 도시였다.
스페인의 점령하에 있던 다른 도시들이 끝없이 성장하고 변화하는 동안 이곳은 마치 잊혀진 것처럼, 오랜 세월에 손상된 그 흔적조차 지워지지 않고 남겨졌다. 세월의 때가 묻어 원래 무슨 색이었는지 짐작조차 힘든 교회 뒤로 펼쳐진 풍경은 영락없는 중세의 유럽이었다. 그 아래 길가에 여러 대의 도요타 자동차가 세워져 있었는데, 내가 과거로 왔다기보다 누군가 그걸 타고 미래에서 온 것만 같은 느낌이었다.
많은 콜로니 도시(식민지배를 받았던 스페인 점령지)를 다녀봤지만 그라나다 같은 곳은 드물다. 평소 같았으면 하루 종일 도시 이곳저곳을 다니며 그 평화로움에 취했을 것이다. 그러나 내 심장은 조금도 뛰지 않았다. 의지도 호기심도 없는 몸을 이끈 유일한 것은 이번에도 화산이었다.
마사야 화산(Volcan Masaya)은 화산이라기보다는 거대한 구멍이 뚫린 분화구였다. 한 때 화산이었던 언덕 꼭대기까지 차를 타고 오르자 생명체의 흔적이라고는 없는 벌판이 펼쳐졌다. 시야에 닿지 않는 저 먼 곳까지도 화산폭발로 검게 패인 땅이었다. 이따금 부는 바람에는 심한 유황 냄새가 실려 왔다. 원래는 이 근방까지 민가가 있었다는데, 어느 날 폭발한 화산으로 땅이 무너지고 수많은 사람이 목숨을 잃었단다. 분화구를 끼고 이어진 계단 제일 위에는 그 희생자를 기리기 위한 십자자가 세워져 있었는데, 딱 보기에도 그 십자가를 보러 갔다가는 그 아래 새겨진 이름이 하나 늘어야 할 것 같았다.
방독면까지 쓰고 한참동안 연기가 잦아들기를 기다린 끝에 마침내 가이드의 허락이 떨어졌다. 여전히 적당히 거리를 유지하긴 했지만, 180m 깊이에서 올라오는 연기가 바람에 흔들리던 찰나 시뻘겋게 타오르는 불꽃이 보였다. 불꽃은 마치 뱀의 혓바닥처럼 살아 움직이는 듯했는데, 옛날 인디언들은 불의 여신 '챠시우티케'를 진정시키기 위해 여자를 제물로 던져 넣었다고 한다. 훗날 이곳을 정복한 스페인 군은 이곳을 가리켜 '지옥문의 입구'라고 불렀다는데, 왠지 그들이 그라나다를 내버려 둔 이유를 알 것만 같았다. 산넘고 물건너 마침내 지옥문의 입구를 보았다고 한들, 나는 여전히 오갈데 없는 떠돌이였다.
숙소로 돌아와 노트북으로 지도를 켰다. 멕시코는 커녕 니카라과를 벗어나기까지만 400km 를 넘게 가야했다. 콘셉시온 화산이후로 디딜때마다 통증이 느껴지는 왼쪽 발목을 주물러댔다. 5일 동안 도시 3개를 돌았으니 무리가 간 모양이다. 당장 내일 새벽에 마이애미로 가는 비행기 표를 끊었다. 딱히 고민되지는 않았다.
특별히 마이애미가 좋은 것도 아니었다. 대륙을 벗어나는 비행기 중에 가장 저렴했을 뿐이다. 그리고 한 달이 조금 더 남은 2월의 어느 날, 한국으로 돌아가는 비행기 표도 끊었다. 그렇게 마지막 주사위가 던져졌고, 이 기쁜(?) 소식을 그녀에게 메일로 알리고 나자 안갯속을 헤매는 듯한 기분이 조금은 나아졌다.
그렇게 그라나다에서 두 번째 밤을 지내기도 전에 다시 버스를 탔다. 공항이 있는 곳은 그라나다가 아니라 수도인 마나구아(Managua)였다. 버스에서 내린 뒤에는 더위를 느낄 새도 없이 다시 택시를 타고 공항으로 향했다. 마이애미로 가는 비행기는 내일 아침 6시지만,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았던 나는 아예 공항에서 날을 지새우기로 했다. 차창 밖으로 수도의 풍경이 스쳐 갔지만 그 어느 것에도 눈길을 주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웃은 게 언제였는지 따위를 생각했다.
공항에 도착한 뒤에도 특별히 웃을 일은 생기지 않았다. 금발에 파란 눈동자를 지닌, 누가 봐도 100% 백인 혈통의 꼬마아이가 내 앞에서 말 춤을 추긴 했지만 그걸론 역부족이었다. 다음날 6시에 떠나는 비행기의 탑승 수속이 가능할 리 없기에, 옆집에 한국인 가족이 산다는 미국 꼬마의 뒤를 따라갈 수 없었던 것은 좀 아쉬웠다.
사용하지 않는 낡은 책상을 하나 발견해 그 속에 몸을 뉘었다. 공항에서 밤을 새는 것은 나이로비에 이어 두 번째다. 갑자기 같이 사파리 투어를 했던 부주와 니콜이 몹시 그리워졌다. 마사이마라에서 같은 차를 탄 우리는 정말이지 완벽한 한 팀이었다. 파리에 사는 니콜은 내가 파리를 지나칠 때 다시 만날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보증금 사건'으로 유럽 일정이 통째로 날아가면서 재회는 물거품이 되었지만, 니콜은 ‘괜찮아. 우리 인생은 지금부터 시작이니까. 어떻게든 여행을 계속할 수 있기를 빌어’라며 다음을 기약했다. 여름이 한창이던 계절의 일이다.
이번에는 가장 최근의 기억들을 떠올려보았다. 그러자 마치 화산에 중독된 듯한 한 남자의 고군분투가 펼쳐졌다. 마침내 화산을 목격한 남자는 어느새 떠날 준비를 하고 있다. 그러자 감당할 수 없을 만큼 허무함이 밀려왔다. 그토록 원하던 것을 본 사람이 선택한 것이 고작 떠나는 것이라니. 나는 왜 사람들이 인생을 여행에 비유하는지를 알 것 같았다. 삶이라는 대책 없는 여행지를 비틀거리면서 때로는 좌절하더라도 어떻게든 목적지를 향해 나아가는 점이 닮았다. 그러다 목적지를 잃었을 때 대책도 없는 깊은 수렁에 빠지는 것이다.
탕! 탕!
갑자기 바깥에서 총소리가 들려왔다. 깜짝 놀라 창밖을 바라보니 온 도시에 커다란 불꽃이 피어오르고 있었다. 세상에. 나는 그 날이 한 해의 마지막 날인 것도 까맣게 잊고 있었던 거다. 물론 알았다고 해서 크게 바뀔 건 없었을 거다. 그녀에게 사랑을 속삭일 핸드폰은 이미 일주일 전에 도둑맞았으니까. 내 인생의 기념비가 될 한 해가 그렇게 허무하게 막을 내렸고, 그녀의 부재에도 어김없이 새해는 찾아왔다.
아마도 '가장 허무하게 2012년을 보낸 사람'으로 내일 아침 신문에 실릴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1월 1일에 '해피 뉴 이어'라는 말을 한 번도 하지 않은 사람이라는 수식어도 붙을 것이다. 한국에 돌아가면 '가장 허무하게 한 해를 보내는 방법' 같은 책을 써봐야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나는 어서 빨리 아침이 오기만을 기다렸지만, 내가 기다리는 것이 마이애미행 비행기인지, 한국행 비행기인지 헷갈리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