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리다(Merida), 멕시코
“이제 연락하지 않았으면 좋겠어.”
결국 그녀는 이별을 말했다. 이유를 묻자 '그냥 어느 순간 그립지 않아졌다'고 했다. 귀국을 한 달가량 앞둔 날이었고, 돌아가겠노라 알린 지 10일 정도 지난 날이었다. 숙소 부엌에 놓여있던 바나나 하나를 입에 넣었다. 제대로 못 자 눈이 퉁퉁 부은 와중에도 배는 고팠나 보다. 바깥은 여전히 어두웠다. 왜 이렇게 일찍 일어냤냐고 물어오는 스텝의 말에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했다. 누군가 지금 내 눈을 본다면 "아 너구나. 세계일주 하다가 사랑을 잃은 사람이?" 하고 물어올 것만 같았다.
그녀로부터 답장을 받고, 밤새 지난 6개월을 더듬었다. 처음 여행을 떠날 때 눈물이 가득 고였던 그녀의 눈동자가 제일 먼저 떠올랐다. 그녀도 나도 흔들림은 없었다. 그러나 기억은 더 나아가질 못한 채 계속 그날에만 머물렀다. 우리는 불과 2 주전 크리스마스 까지만 해도 사랑을 속삭였다. 그러다 내가 한국행 비행기를 끊고 새해가 지나는 동안 그녀 안의 무언가가 뚝 하고 끊어졌다. 나는 밤새 그 이유를 따져 묻기도 하고 달래기도 했지만, 그녀는 파타고니아의 빙하만큼 차가웠다.
누군가를 바꾸기란 원래 힘들지만, 사랑이 하기 싫다는 사람을 돌려세우기란 더더욱 힘들다. 나는 이 일이 실제로 지금 나에게 벌어진 일인지를 실감하느라 거의 밤을 지새웠다. 돈은 잃어도 찾아주겠다는 사람이 있지만, 사랑은 그렇지 않다. 당장 모든 것을 내려놓고 한국으로 갈 수는 없다. 그렇다고 이대로 앉아서 속수무책으로 무너져 있기에는 이미 늦었다. 그녀는 완고했고, 멕시코에 있는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결국 완전히 해가 뜰 즈음에는 티 나지 않게 슬퍼하는 법을 배워야 할 시점이 왔음을 깨달았다.
칸쿤에 온 지 사흘째 되던 그날, 기황이가 먼저 한국으로 돌아갔고 곧이어 택근형이 쿠바로 떠났다. 바로 다음날, 그녀의 부재에도 나는 버스에 올랐다. 세계 7대 불가사의 중의 하나인 치첸이사(Chichen Itza)로 가는 버스였다. 버스에 오를 때 몇 개월전 갑자스런 소식을 듣고, 부랴부랴 한국으로 가는 비행기를 탔을 때와 같은 느낌이 났다.
마야인의 피라미드는 이집트의 그것만큼 높지 않았지만 견고했다. 나는 그 신비로운 유적지를 몇 번이고 맴돌았지만, 내가 마야 유적지에 서 있다는 사실은 멀고도 아득했다. 이집트와 달리 모래바람에 기침을 하지않아도 된다는 정도의 자각만 있었다.
유적지내에서 이곳저곳을 떠돌다 거대한 경기장에 닿았다. 마야인들은 석벽으로 에워싸인 이 경기장에서 '포타폭'이라는 구기시합을 했다. 벽의 상단 부에 매달린 작은 구멍에 고무공을 넣는 경기였다. 점수를 매겨 승자의 목숨을 신에게 바치는 특이한 경기였단다. 가이드의 설명은 이랬다.
“제물은 나쁜 것이 아닌 더 훌륭한 것을 바쳐야 하니까요. 전사들은 영광스럽게 목숨을 바치기 위해 혹독하게 훈련을 했습니다.”
서로 죽임을 당하기 위해 경기에 참가했다니. 마야인들은 자신이 죽임을 당함으로써 비로소 신과 연결된다고 믿었다. 반대로 나는 그녀가 내 손을 놓은 어제부터 나를 지탱해 온 것들에게서 조금씩 멀어지기 시작했다. 내가 가장 믿고 의지하는 사람의 지지가 사라졌다. 단지 그 한가지 이유만으로 지난 6개월이 온통 쓸모없는 것이 되어버린 기분이 들었다. 길을 걸으면 사람들이 자꾸만 나를 알아보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저기 봐. 사랑을 잃기 위해 여행한 사람이야.” 하고. 가이드를 따르는 무리에서 급하게 빠져나와 발길을 돌렸다. 햇살이 너무 뜨거운 그 경기장은 마음껏 울기에는 최악의 장소였다.
태양도 가릴 수 있을 만큼 숲이 우거진 길을 찾았지만, 거기에는 수십 명의 장사치가 좌판을 벌이고 있었다. 그들은 마치 마야시대를 직접 겪은 양, 그들의 풍습과 문화에 대해 일장연설을 벌이며 온갖 물건을 팔았다. 그중에 나무를 깎아 기묘한 조각을 새긴 가면 앞에서 발걸음을 멈췄다. 남자가 가로누운 여성을 떠받치고 있는 조각이 새겨진 가면이었다. 가면은 총 3가지였는데 각각 마야인이 숭배했던 세 가지 우상인 사랑, 건강, 재물을 상징한다고 했다.
“사랑이야 젊은이. 당신같이 젊은 사람에게 필요한 것은 사랑이라고.”
서부극에서 방금 나온 것 모습을 한 남자의 말에 속마음을 들킨 듯 얼굴이 화끈해졌다. 급하게 돈을 쥐어주고 가면을 집어들었다. 내가 떠나자 남자는 곧장 테이블에 앉아 장비를 꺼내더니 새 가면을 만들 준비를 했다. 아마도 지어낸 말일 것이다. 사람의 목숨을 신에게 올리는 기도보다 가볍게 여겼던 마야인들이 연애나 사랑 같은 달콤한 감정을 숭배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단지 나에겐 무언가 나를 지탱해 줄 것이 필요했다.
그대로 유적을 빠져나와 메리다(Merida)라는 도시에 짐을 풀었다. 이미 어둠이 짙게 깔린 뒤였다. 그저 공원이나 어슬렁거릴 생각으로 불이 켜진 광장에 닿았는데, 제법 사람이 모여 있었다. 관광객이 많은 도시에서 으레 벌어지는 거리의 연주회 같았다. 곧 악기를 든 사람들이 하나씩 무대 위로 올라와 합주를 시작했다.
그것은 온통 낯선 음악이었다. 어디에서 어떻게 박수를 쳐야 할지 몰라 물끄러미 바라만 보고 있는데, 갑자기 광장의 조명이 하나둘씩 꺼지고, 무대 위의 것만 남게 되었다. 그러자 누가 등을 떠밀기라도 한 것처럼 사람들이 손을 맞잡고 무대로 나왔다. 음악은 멈추지 않았고, 무대 위의 사람들은 조금씩 스텝을 밟으며 몸을 움직인다. 더 많은 사람들이 나와 홀린 것처럼 흐느적거렸고, 어느새 광장은 연인들로 가득 찼다.
나는 그 모습을 숨죽이며 지켜보기만 했다. 카메라를 들어 그 장면을 내 것으로 만드는 순간, 내 앞에서 구경만 하고 있던 사람이 내 얼굴을 빤히 쳐다보는 것이 뷰파인더 속으로 보였다. 카메라를 타고, 무색의 액체가 흘러내렸다. 아마 나는 사랑이 끝난 것 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