멕시코시티 - 멕시코
“안녕하세요. 한국인이시죠?”
언제부턴가 한국인만 보이면 말을 걸어대기 시작했다. 멕시코시티(Mexico City)의 숙소 '까사 아미고'에 도착해서도 마찬가지였다. 같은 방에 있는 두 명 중에 한국인임이 틀림없는 사람에게 말을 걸었다. 남자는 이어폰을 낀 채 노트북으로 드라마를 보는 중이었다.
“어... 안녕하세요."
그래서 뭐 어쩌란 말인가. 나 같으면 그랬을 텐데 그는 그 정도로 예민한 반응을 보이진 않았다. 뚜렷한 부산 사투리를 쓰는 사람이었다. 그걸 빌미 삼아 자꾸만 말을 붙였고, 마침내 노트북을 덮게 만들었다. 세상을 떠돌다 보면 신기한 인연을 겪게 된다. 나는 탄자니아 잔지바르로 가는 보트에서 만났던 사람을(그는 배에서 내리는 중이었다.) 3개월 뒤 볼리비아 태양의 섬에서(이번엔 내가 배에서 내리는 중이었다.) 만난 적이 있다. 나보다 한살이 많은, 고향이 같은 이 남자도 그렇다. 용하 형도 서울에서 직장생활을 하다 긴 여행길에 오른 사람이었다. 그리고 한달 전, 멕시코에서 기황과 택근 형을 만나 함께 과테말라까지 가는 여행을 했다.
“세상이 좁긴 좁네요. 결국 다 따로따로 같이 만난 사이네요.”
“그러게. 택근 형은 잘 지내던가?”
“2주 전에 쿠바로 떠났어요. 그 다음엔 남미로 가신다던데요?”
재미있는 인연이다. 용하 형도 이틀 뒤면 남미로 떠난다고 했다. 역시 그렇구나. 입 밖으로 나올 뻔한 소리를 삼켰다. 나는 두 사람이 칠레와 페루 사이 국경 어딘가에서 마주쳐 반가워하는 모습을 상상했다. 이쯤 되면 이별 전문가라고 불러도 되겠다. 내가 만난 사람은 항상 나와 반대방향으로 떠난다.
“멕시코시티에 가능한 한 오래 있어. 나는 5일 있었는데 그것도 짧더라고.”
대답은 하지않고 다시 이틀 뒤에 혼자가 될 내 모습을 상상했다. 겉으론 멀쩡한 남자가 메마른 대지 위를 홀로 걷는 장면이 떠오른다. 속은 이미 문드러진지 오래다. 상상을 마치고 용하 형과 국립 인류 박물관(MUSEO NACIONAL DE ANTROPOLOGÍA)을 방문했다. 아메리카의 모든 문명이 기록된 곳이며, 지난 두 달간 뒹굴고 사랑했던 잉카, 마야, 아즈텍 문명을 한데 모은 곳이었다.
박물관에서 가장 눈길을 끈 것은 아즈텍의 달력, 태양의 돌이었다. 기원전에 이미 1년을 365일로 계산했던 마야인, 그리고 그 지혜를 바탕으로 거대한 달력을 돌에 새긴 아즈텍인. 인류는 끊임없이 진화해왔다. 그러나 거대한 문명은 단 한 번의 침략으로 와르르 무너져 사라졌다. 그 까마득한 세월이 이제는 돌덩이를 제외하고는 흔적도 없이 사라진 것이다.
테오티우아칸(Teotihuacan) 유적지도 마찬가지다. 기원전에 시작되어 7세기무렵 갑자기 자취를 감추기까지 천 년이 넘게 번성했지만, 그들에 대해서 밝혀진 것은 아무것도 없다. '테오티우아칸'이라는 말도 훗날 아즈텍에 의해 붙여진 이름일 뿐, 유적지에 남은 건 태양과 달의 신화뿐이다. 다행히도 길이만 5km가 넘는 거대한 유적지에는 그 신화를 설명하는 두 개의 거대한 피라미드가 남겨져 있었다.
가장 높은 달의 피라미드에 먼저 올랐다. 비교적 시원한 겨울이었지만, 해발 2,000m 도시에서 65m나 되는 계단을 오르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금방이라도 뛰어오를 듯 가볍던 두 다리는 점점 무거워지고, 중턱에 오르자 자연스레 허리가 굽어졌다. 사람들은 땀을 닦기에도 바쁜 두 손마저 울퉁불퉁한 바닥에서 떨어질 겨를이 없어지면 본격적으로 기기 시작한다. 그 꼴을 위에서 내려다보고 있으면, 영락없는 인류 진화의 과정이다.
꼭대기에서 보는 풍경은 기가 막혔다. 피라미드 양옆으로는 죽음의 길이라고 불리는 도로를 따라 소름 끼치도록 대칭을 이루는 크고 작은 제단이 펼쳐졌다. 자연스레 영화 아포칼립토의 한 장면이 떠올랐다. 좌우에서 많은 사람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신관이 천천히 피라미드를 오른다. 정상에 서서 포로로 잡힌 제물의 가슴을 가르고 심장을 뜯어냈다. 끝도 없이 사열한 사람들은 열광하고, 그렇게 사람들은 공포에 사로잡혀 왕과 신을 받들었다.
그런 테오티우아칸도 어느 날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폐허가 된 도시는 훗날 아즈텍 제국이 되었지만, 결국 이 땅을 지배한 것은 스페인 군대였다. 스페인이 점령한 땅은 거대한 도시로 변모했고, 오늘날 '멕시코시티'라고 불린다. 그 역사의 한 페이지에 서 있다는 생각에 흥분이 되다가도 쓸쓸했고, 처연했다.
용하 형와 아쉬운 작별을 한 뒤로는 멕시코시티의 이곳저곳을 기웃거렸다. '혁명의 탑'에서부터 '소칼로 광장'까지 이어진 길을 걷는 것은 몇 번을 반복해도 지루하지 않았다. 스페인이 지은 옛 건물들은 하나같이 거대하고 웅장했다. 우표를 사러 들린 중앙 우체국은 내부가 온통 금색으로 칠해져 있었는데, 우표가 아니라 금괴를 사야 할 것 같았다.
마침내 처음으로(여행 중) 미술관을 방문하는 순간이 찾아왔다. 결코 우연은 아니다. 멕시코 여기저기에 보이는 우스꽝스러운 벽화가 모두 한 화가의 작품을 패러디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 순간부터 그가 궁금했다.
그의 이름은 디에고 리베라(Diego Rivera). 미술관의 이름이자 멕시코에서 가장 위대한 화가다. 최초의 침략자 코르테즈, 멕시코의 꼭두각시 황제 막시밀리안, 최초의 민주 대통령 후아레즈, 독재자 디아즈까지. 그의 그림 속에는 멕시코의 역사가 고스란히 담겨 있어 진한 사람 냄새가 났다.
벽화는 얼핏 우스꽝스럽지만 매우 정교하고 사실적이다. 후아레즈의 손에 헌법을 그려, 그가 선거로 선출된 대통령임을 암시하는 식이다. 스페인 군인의 심장을 뽑아 들고 있는 아즈텍 사제의 자세는 어떤가. 유독 추하게 그려진 침략자 코르테즈의 얼굴에서는 멕시코인의 기분이 고스란히 전해졌다.
며칠간 그의 벽화가 있는 장소를 쫓아다녔다. 국립궁전과 차풀테펙 요새는 그중에서도 단연 최고였다. 결국 디에고 리베라의 그림 때문에 의지할 곳 없는 도시에서 6일이나 보낸 셈이다(단일 도시로는 최장기간이다).
도시를 떠나기 전에 가장 높은 건물인 '라틴아메리카 타워'에 올랐다. 42층부터 시작되는 전망대에는 멕시코시티의 동서남북이 배에서 보는 태평양처럼 사방에 펼쳐졌다. 자로 쟨 듯 네모지게 나열된 옛 건물들이 자연스레 유럽을 떠올리게 했다. 기원전부터 사람이 살았지만, 황금으로 일어선 도시는 황금을 노린 침략자에 의해 철저히 파괴되어 이제는 옛 향수를 느낄 수 없을 만큼 변해버렸다.
그런데도 멕시코시티에서는 특유의 사람 냄새가 났다. 소칼로 광장에서는 아즈텍 후손들이 나쁜 영혼을 쫓는 의식을 치르고, 거리 곳곳에서는 여전히 알싸한 살사 냄새가 풍겼다. 미스터리로 가득한 고대 유적, 아름다운 카리브해, 눈 부신 태양과 호수, 멕시코에 아름다운 것은 수도 없이 많지만, 결국 내가 사랑한 것은 사람 냄새가 가득 풍기는 도시 그 자체였다. 에스파냐의 군대도, 혹독한 천연두도, 결국 이들의 정신은 지배할 수 없다. 그렇다면 나도 나아가야 한다. 아무리 혹독한 미래가 기다리고 있다고 해도. 이제 남은 시간은 2주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