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스베이거스, 미국
세계일주를 했으면서 '그랜드캐니언'을 보지 못한 사람도 있다. 시각장애인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7개월씩이나 원하는 대로 세상을 쏘다니던 사람의 이야기다.
그래드캐니언으로 가는 날은 아침부터 하늘이 굳게 닫혀있었다. 비는 오지 않았지만, 구름이 심상치 않았다. 그래도 서울과 부산만큼 떨어진 그곳에는 다른 하늘이 펼쳐져 있을 거라 생각했다. 라스베이거스(Las Vegas)를 출발해 길고 긴 황무지를 5시간 달린 뒤에야 도착했다. 비는 이미 한 시간 전부터 쉬지 않고 내리고 있었지만, 가는 것을 멈출 순 없었다. 끝이 보이지 않을 만큼 넓은 주차장에는 차가 딱 한 대 있었다. 방문자센터 직원의 차인 것 같았다. 안개에 가려 앞이 잘 보이지도 않는다. 그 유명한 사우스림 앞에 섰지만, 여기가 수많은 광고에 나왔던 그곳이 맞는지 확신은 잘 서지 않는다.
협곡에서 피어난 안개로 온 세상이 하얬다. 그것은 차라리 흰 벽이었다. 그 앞에서 찍은 사진을 본 사람은 누구나 그렇게 말할 것이다. 실은 한 발만 더 내디뎠다간 뼈도 못 추스르는 낭떠러지인데 말이다. 같이 차를 타고 온 일행들이 비를 피해 차로 돌아간 후에도, 나는 꽤 오랫동안 그 하얀 풍경을 쳐다보고 있었다. 어떻게든 그 가려진 풍경이 보고 싶었다. 그러나 방문자센터의 직원은 다음 주까지 일주일 내내 비가 온다고 했다. 그랜드캐니언을 보지 못한 세계일주 여행자라니. 할 수만 있다면 그대로 그곳에 머무르고 싶었지만, 그럴 수도 없었다. 너무나 뻔한 운명이 눈앞에 펼쳐져 있었기 때문이다.
일주일 전에 도착했던 LA의 한인 민박집은 초저녁부터 시끌벅적했다. 일부러 시내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숙소를 잡긴 했지만, 찾아가는 일부터 쉽지 않았다('크렌셔 blvd에서 남서쪽으로 15분 걸으세요’라는 설명은 LA에서는 전혀 쓸모가 없다). 그래도 도착하고 보니 하숙집 사랑방같이 아늑한 곳이었다. 밖으로 나가지도 않고 투숙객들과 이야기를 나누며 한낮을 보냈다. 자고로 긴 여행을 하는 사람들은 배낭에서부터 기운을 풍기기 마련이다. 내 배낭만 해도 이미 수십 개의 국기가 엉성하게 꿰매져 있다. 손님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유학생들은 하나같이 세계일주가 언제가 꼭 이루어야 할 꿈이라고 말했다.
“꿈이라고까지 할 게 있나요 뭐. 그냥 마음먹고 한번 길게 여행하는 거죠.”
점잔 떨면서 말하긴 했지만, 어느 정도 진심이기도 했다. 긴 여행의 끝에는 어느 정도의 회의가 같이 오는 법이다. 내가 특별한 일을 했다는 생각은 별로 들지 않았다(특별한 일을 당하긴 했지만). 어딘가에서 소주병이 나타나자 누군가 고기를 굽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이제 몇 주 후면 시작될 새 학기라던가, LA 다저스에 입성한 류현진 얘기를 하다가도 누군가 내 배낭을 발견하면 어김없이 세계일주 이야기로 돌아왔다.
“그래서요? 위험한 적은 없었나요? 경비는요? 외국인이랑 썸도 타보셨나요?”
나는 끝도 없이 쏟아지는 질문에 대답하는 것만으로도 숨이 찰 지경이었는데, 확실히 한국 사람들이 '장기 여행자'를 대하는 태도는 많이 달랐다. 일단 왜 그런 선택을 했는지는 잘 묻지 않는다. 첫 만남의 어색함이라고 볼 수도 있겠지만, 아마 궁금하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뻔하기도 하고.
대신 여행 이후에 벌어질 일들을 궁금해한다. 언제쯤 돌아갈 것인지, 여행이 끝난 뒤에는 어떤 계획이 있는지, 돈은 남아 있는지, 밥은 먹고 사는지 등등. 그러다 아무 대책이 없노라 말하면 약간의 실망과 안도를 동시에 느끼는 듯했다. 아마 자신들과 별다른 바 없다고 생각했으리라.
구체적으로 생각해보지도 않은 질문에 엉터리 대답을 늘어놓다가, 잔뜩 술에 취해 잠이 들었다. 그리고 아침이 오자마자 라스베이거스를 향해 떠났다. 이제 와서 할리우드나 유니버설 스튜디오를 궁금해할 이유가 없기도 했지만, 차를 빌려 함께 떠날 일행이 생겼기 때문이었다. 차에 탄 사람은 모두 네 명이었지만, 저마다 라스베이거스에 대해 다른 환상을 품고 있었다. 예를 들면 짧은 휴가 중인 직장인에게는 돈이면 뭐든지 할 수 있는 쾌락의 도시였고, 미국에서 유학 중인 두 학생에게는 잠시나마 할리우드 스타의 기분을 느낄 수 있는 도시였다.
한 마디로 라스베이거스는 인간의 모든 욕망이 한데모여 탄생한 곳이다. 나는 스트립 거리의 화려한 외모에 시선을 빼앗기기보다 잔뜩 주눅이 들었다. 이 거대한 건물 중 한 군데서의 하룻밤을 고작 40달러에 예약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게다가 9달러짜리 스타벅스 모닝 쿠폰도 제공했다).
스트립의 모든 호텔 1층에는 축구장만 한 카지노가 있었는데, 도대체가 가난한 사람이라고는 나 혼자뿐인 것만 같았다. 밥을 먹는 식당의 테이블에도, 유리천장으로 아주 약간의 햇빛이 새어 들어오는 테라스 벽에도, 서로 얼굴을 보고 이야기를 나누어야 할 바에도 테이블 스크린이 달려있었고, 어김없이 누군가는 자신의 운을 시험 중이었다. 라스베이거스에서 게임 스크린이 없는 곳은 화장 실 뿐인 것 같았다.
우리는 온종일 단 1분도 쉬지 않고 스트립의 온갖 호텔들을 휘저었는데, 해가 지고서야 이 도시의 시작은 밤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사막의 태양이 지평선 너머로 모습을 감추면 라스베이거스의 모든 것이 깨어난다. 오랜 시간 카리브해에서 모습을 감추었던 해적선은 '트래져 아이랜드'라는 이름으로 나타나 대포에 불을 뿜고, 이때를 기다렸다는 듯이 거리의 모든 카지노가 황금빛 간판을 물들인다. 장관도 그런 장관이 없었는데 마치 태양 빛을 마주 보는 것만큼 눈이 부셨다.
더 기가 찬 것은 호텔의 조경이다. 내가 머물던 호텔의 실내 정원에는 볼리비아 4,000m 고원지대에서 고산병과 싸우며 마주쳤던 플라밍고들이 태연하게 풀을 뜯고 있었다. MGM 호텔의 1층에는 거대한 사자 우리가 있다. 어딘가의 호텔 로비에는 30m는 족히 될 것 같은 거대한 수조가 있었는데, 그 속에는 내가 홍해 바다에서 본 모든 생명체가 다 들어있었다. 미라지 호텔에서 홀로 고고하게 우리 안을 걷는 하얀 호랑이와 마주쳤을 때는 세계일주란 참 부질없는 짓이라는 생각마저 들었다. 죽기 전에 꼭 봐야 할 건축물의 21세기 버전을 만든다면 라스베이거스의 호텔들이 절반을 차지할 것이다.
나는 늘 돈으로 불가능한 일이 더 많다고 믿었는데, 이제 보니 그렇지도 않은 모양이다. 쓸데없이 거대하고 화려하게만 느껴졌던 이 도시가 어느 순간부터는 위대해 보이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불빛을 보고 달려드는 나방처럼 자신의 모든 욕망을 이 도시에 밀어 넣었다. 그러면 다음 날 이 거리 어디쯤엔가 짠하고 새로운 세상이 생기는 것이다. 사자와 호랑이는 이미 있으니 어느 날에는 알래스카의 북극곰도 나타날지 모른다. 펭귄은 어떤가. 마침내 마야의 피라미드가 들어서고, 그 위에 서서 버튼을 누르면 나타나는 숨겨진 방 안에서 사람들은 또 쉬지 않고 욕망을 밀어 넣는 것이다.
수많은 전망대 중에 하나에 올라보니 온 도시가 용광로처럼 펄펄 끓고 있었다. 나는 엉뚱하게도 이 도시가 정전되면 어떨지가 궁금해졌다. 사막 위의 신기루라고 불리는 도시에서도 꿈을 이루지 못하고 빛을 잃은 사람들은 어떤 운명을 맞이할까. 한때는 나도 이 도시에서 언젠가 그녀의 손에 끼울 반지를 사겠노라 계획했었다. 아무에게도 말한 적은 없지만, 분명 내 세계일주 계획의 일부였다. 그러나 현실은 7개월 동안이나 물고기를 잡지 못한 노인과 다를 바 없다. 그 계획은 세계일주를 하고도 그랜드캐니언을 보지 못한, 배낭 하나가 삶의 전부였던 어느 여행자의 슬픈 꿈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