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9화 - 지금 만나러 갑니다

시애틀, 미국

by JUDE

라스베이거스를 떠나기 전 마지막으로 본 것은 역시 슬롯머신이었다. 번쩍거리는 기계들은 국내선을 타러 가는 통로에서도 어김없이 누군가의 욕망을 꿀꺽 삼키는 중이었다. 2~3일 정도는 이곳에 머물며 행여나 기적을 바랄 수도 있을지 모른다. 어차피 달리 갈 데도 없으니까.


처음부터 시애틀(Seattle)로 갈 계획은 아니었다. 캐나다까지 여행을 계속할 것도 아니니까. 굳이 한겨울, 날씨가 좋지 않기로 소문난 시애틀에 단지 커피 한 잔을 위해 방문할 생각은 없었다. 그러나 거기에 레드가 있다. 누군가 손 잡아 줄 사람이 있다.


유독 빨간색에 집착하는 녀석은 레드라고 불렸다. 준과 함께 입사동기이자 동갑내기 친구다. 지난 3년 내내 회사 안밖으로 하루에도 두세 번씩 몰려다녔고, 하루가 멀다고 술을 마셨다. 아마 내가 직장생활 중 마신 술의 절반은 녀석들과 함께였을 거다. 준이 새 차를 뽑았떤 어느 금요일은 퇴근하자마자 제부도까지 가서 아무것도 하지 않고 술만 마시다 기억에도 없는 찜질방에서 깬 적도 있다.


그 레드가 때마침 시애틀로 출장을 왔다. 나는 오로지 레드를 만나기 위해 시애틀까지 날아왔다. 그러나 1월의 어느 늦은 밤, 시애틀 공항 짐 찾는 곳에서 갑자기 마주칠 줄은 몰랐다. 유난히 빨간 우산이 저 멀리 보일 때 레드를 떠올리긴 했지만 말이다. 비행기에서 내린 사람은 스무 명도 채 되지 않아 빈 컨베이어가 돌아가는 소리가 크게 울렸다. 내가 다가가자 빨간 우산을 든 남자가 먼저 돌아보며 말했다. 마치 내 발소리를 기억이라도 하는 듯이.


“여어. 왔니?”


레드는 마치 며칠 전에 약속한 모임에 나오기라도 한 것처럼 인사를 건넸고, 나는 곧장 녀석에게 매달렸다. 여행하면서 누군가 마중 나온 것도 처음이었고, 그리운 사람을 만나는 것도 처음이었다. 살이 너무 많이 빠졌다며 20kg 배낭을 성큼 메고 앞서 걷는 레드는 변한 것이 없었다. 항상 남 챙기기 바쁜 녀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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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드의 차를 타고 비가 오는 시내를 통과해 호텔에 도착했다. 로비 한편에 거대한 벽난로가 타들어 가고, 당장이라도 신발을 벗고 싶은 포근한 카펫이 깔려있었다. 침대는 지금 당장 10시간은 잘 수 있을 만큼 포근했다. 가만히 누워있으니 그 방을 감싸고 있는 이상하고도 따뜻한 기운이 느껴졌다. 누군가 그리운 사람이 방 안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온통 마음이 그윽해졌다. 출장 와서 웃을 일이 없었는데 덕분에 웃는다는 레드의 말은 내가 하고 싶은 말이었다.


“일은 할만하냐?”

“일이야 일이지 뭐. 시애틀은 날씨도 안 좋은 데다 혼자라서. 난 너처럼 혼자 어디 다닐 팔자는 아니더라고.”


맥주를 마시며 긴 이야기를 나눴다. 며칠 전에 준이 보낸 새해 인사와 근황도 공유했다. 준은 내가 중앙아메리카와 멕시코를 거쳐 미국에 도착할 때까지도 여전히 남미에 머물렀다. 새해에는 준이 스페인어 선생의 집에 초대받아 대가족과 함께 연말을 보내는 사진을 받았는데, 나는 녀석이 결혼이라도 하는 줄 알았다.


6주를 에콰도르에 머물다 콜롬비아로 떠난 준은 어느 바에서 만난 미녀들과 얼굴이 벌게진 채 술을 마시고 있었다. 그 이후로는 모든 사진이 똑같았다. 장소만 다를 뿐 항상 녀석의 손에는 맥주병이 들려있었고, 좌우에는 크고 아름다운 여성들이 서 있었다. 녀석의 얼빠진 스페인어가 쓸모가 있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니도 외로우면 여자 친구 부르지 그라노. 어차피 여기 한 달은 넘게 있어야 하잖아.”


내말에 레드는 잠시 망설인 뒤 대답했다.


“안 그래도 얘기는 했어. 얘기는 했고… 사실 프러포즈를 할까 해.”

“진짜? 축하한다 임마! 라스베이거스 가서 해. 거기 뭐 길거리에서 공연하면서 프러포즈하고 난리던데.”

“안 그래도 너 오면 물어볼까 생각하고 있었어.”


라스베이거스는 프러포즈를 위한 모든 것이 갖춰진 도시다. 멋진 조명과 근사한 호텔과 비싼 명품샵, 다시는 볼 일 없지만 기꺼이 축하해줄 사람들. 기왕이면 에펠탑 전망대에서 하라고 말했다. 라스베이거스의 티파니에 한국인 직원이 있다는 것도 빼먹지 않았다.


“근데 너는 어떻게…..”


레드가 말끝을 흐렸다. 갑자기 나도 할 말이 없어졌다. 레드뿐 아니라 준도 내게 이메일을 보낼 때마다 그녀의 안부를 함께 물었다. 1년 전 내 생일날, 넷이서 함께 클럽에서 춤을 췄던 기억이 떠올랐다(정말로 이상한 조합이었다).


“그냥… 그냥… ”


나도 말꼬리가 늘어졌다. 도둑질을 들켜 궁색한 변명을 늘어놓는 꼬마처럼 무슨 말을 어떻게 해야 할지 떠오르지 않았다. 갑자기 안데스 정상에 오른 것처럼 귀가 멍해졌고, 눈물이 흘렀다. 그것이 소리가 되어 나오는 것만은 참으려 안간 애를 썼다. 그 소리가 빗소리에 감춰 사라지길 바랐다.


그날 이후 레드는 내가 아무것도 하지 못하게 했다. 운전대를 잡는 것도 우리가 갈 목적지를 지도로 확인하는 것도, 하다못해 마트에서 산 맥주 캔을 드는 것도 직접 했다. 하긴 거울을 보고 나면 녀석의 과잉보호가 괜한 짓은 아니라는 생각도 들었다. 살이 빠져 60kg도 채 안 되어 보였고, 생기라고는 하나없이 그저 그을려서 그늘진 얼굴이 보였다. 올림픽 내셔널 파크로 가던 주말도 그랬다. 세 시간이 넘게 걸릴 거리인데도 절대로 운전대를 내어주는 법이 없었다.


길을 헤매는 바람에 늦게 도착하긴 했지만 축축하게 젖은 숲은 아름다웠다. 빙하기 때부터 존재했던 설산 아래는 어김없이 거대한 호수가 공간을 메우고 있었다. 젖은 땅은 온통 녹색 이끼로 뒤덮여있었고, 까마득하게 높게 자란 나무는 머리부터 발끝까지 온통 솜털같은 이끼를 둘렀다. 멀리서 보면 초록색 털 뭉치가 열리는 나무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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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다른 날은 준이 알려준 곳으로 도시의 야경을 보러 갔다. 다운타운을 지나 조용한 주택가 뒷산에 자리잡은 케리 파크에 오르자 마침내 이 도시의 진면목을 볼 수 있었다. 겹겹이 쌓인 구름 아래로 불을 밝히고 있는 시애틀은 내가 본 도시의 야경 중 최고라고 할 만큼 아름다웠다.


구름은 여전히 파도처럼 몰려왔지만, 도시는 아직 잠들지 않았다. 우주 비행장 같은 모습을 한 스페이스 니들(Space needle)은 말 그대로 하늘을 찌르고 있었고, 금방이라도 UFO 한 대가 상륙할 것 같았다. 하얗게 빛나는 기둥의 불빛이 노랗고 빨갛게 바뀌면 어디선가 나타난 비행선을 타고, 지금쯤은 멕시코에 있을 준을 데리러 가는 상상을 했다. 사람들이 빠져나가 고요해진 도심을 셋이서 활보하다 모노레일을 타고 스페이스 니들에 올라 우리가 다시 만난 날을 축하하는 것이다.



시애틀의 잠 못 이루는 밤은 그렇게 자꾸만 누군가를 그리워하게 만든다. 처음에는 준으로 시작해서 케냐에서 함께 사파리 투어를 했던 친구들, 처음으로 선글라스를 써보곤 환하게 웃던 잔지바르의 소녀, 토레스 델 파이네의 아람단 소녀들, 카리브해에서 만난 아론과 슬로미까지 모든 사람이 그리워졌다.


그 영화를 처음 봤을 때는 시시하다고 생각했다. 영화가 끝날 때까지 키스는커녕 서로 만나지도 못한 두 주인공에게 사랑이라는 굴레를 씌우는 것 자체가 말이다. 당시의 나는 아직 한 번도 사랑에 빠져본 적 없는 학생이었다. 오랜 시간이 지난 지금은 확실히 깨달았다. 사랑이란 만나서 전해지는 것이 아니라 만나기 전의 두근거림과 만나는 순간 흔들리는 눈동자라는 것을. 결국 누군가를 사랑하게 되는 것은 그 작은 흔들림 때문이다.


“내일 스페이스 니들에 올라가 볼까? 가고 싶니?”


레드의 말에 나는 조용히 고개를 저었다. 그곳에서 누구를 만날 계획도 없거니와(시애틀의 잠 못 이루는 밤의 마지막 장면에서 두 주인공은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에서 마주친다.), 더는 내 발걸음이 가볍지 않았기 때문이다. 차가운 겨울 바다를 알록달록 물들인 불빛을 보면서 나는 그저 여행의 끝을 생각하고 있었다.


나는 여행이 끝나는 날을 미리 정한 것을 후회했다. 니카라과에서 한국행 비행기를 끊은 바로 그 순간부터 여행을 끝내기 위한 여행이 되어버렸다. 타성에 젖은 것이다. 비록 일주일에 단 한 번 햇빛이 비치는 도시(시애틀의 겨울은 미국내에서 악명높다)에 있다고 하더라도 여행자만큼 두근거리는 인생을 살기란 쉽지 않다. 당장 이 도시를 감싼 저 구름 너머의 도로를 달리면, 캐나다로 가는 국경이 코앞이다.


나는 상상력을 동원해 캐나다의 광활한 도로를 달리는 모습을 떠올렸다. 기나긴 길 끝에서 거대한 설산이 나타났고, 그 설산을 넘자 아름다운 호수가 보였다. 카누를 저어 호수를 가로지르자 이번에는 거대한 강이 내 앞을 가로막았다. 그 뒤에는 다시 또 광활한 산맥이 펼쳐졌다. 결국 어디에선가는 멈춰 서야 했을 것이다. 그 결말을 미리 정하다니 참 바보 같은 짓이었다.


마음 한구석 어딘가에는 이대로 캐나다로 떠나고 싶은 마음도 분명히 있었다. 그러나 상상을 멈췄다. 비행기 표 핑계를 대긴 했지만, 나는 이미 너무 지쳐 있었다. 거울 속의 웃지 않는 남자를 혼자 마주하는 것도 더 이상은 싫었다. 이제 나는 훨씬 더 까마득한 것이 기다리는 곳으로 돌아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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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샌프란시스코에서 하려고 했던 것들을 취소하고(할 것도 없었지만) 최대한 레드의 호텔에 머물렀다. 그러다 귀국 삼 일 전에야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했다. 하루 정도 차를 빌려 교외의 해안도로를 달리고, 그 유명한 블루보틀 커피를 음미했다. 쓰기만 할 뿐 아무런 감흥도 느껴지지 않았다. 언제나처럼 도시의 가장 높은 곳에 올라 이별을 준비했다. 시애틀에서 나흘이나 아무것도 안하고 쉬었는데도 몸은 계속해서 피곤하기만 했다.



귀국 전 날, 마지막으로 멕시코시티에 있는 준에게 노트북을 보냈다(무려 120달러나 들었다). 여행이 끝이 났으니 더이상 가슴이 두근거리지 않는 사람과 함께있을 이유가 없는 것이다. 사막에서의 그 호된 시간도 견디며 할 일을 무사히 완수한 녀석이다. 그 속에는 언제 이렇게 되었나 싶을 만큼 까마득하게 쌓인 사진들로 가득했다. 나는 120724_south_africa라고 쓰인 폴더를 시작으로 지난 7개월간의 일들을 모조리 훑었다. 둘도 없는 바보라며 손가락질하며 웃을 일도, 가슴 저리게 아픈 일도 있었지만, 겹겹이 쌓인 기억은 사진에 비해 구체적이지도 선명하지도 않았다. 대신 돌아가서 만나야 할 사람의 얼굴만은 선명하게 떠올랐다. 노트북을 부치고 나니 배낭이 절반은 가벼워진 느낌이었다. 나는 충분히 담담했고, 한국으로 가는 비행기에 올랐다. 그날만큼 비행기 엔진 소리가 고요했던 적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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