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년 만의 유럽 여행기
오스트리아와의 만남은 계획된 것은 아니었다. 프라하에서 부다페스트로 한번에 가기에는 너무 멀어서 급하게 방향을 틀었을 뿐이니까. 체코로 가는 국경 근처에 있는 잘츠부르크를 한 마디로 표현한다면 '여유'라고 할 수 있겠다. 언제 어디서 타던 여유 있는 버스, 관광지라고 하나 있는 모차르트 광장에 모여든 사람들도 서울의 어느 초등학교 등굣길 보다 덜 붐빈다. 언덕에 올라서 보면 건물보다 숲이 더 많다. 모처럼이니 사나흘은 쉬어야겠다는 생각에 차를 빌려 교외를 달렸다. 여행의 묘미는 대부분 이런 데서 나온다. 우연히, 어쩌다가, 갑자기.
4월의 끝이 다가오던 그즈음, 해가 뜨는 시간이 부쩍 길어졌고 누릇노릇하던 침엽수들은 완전히 녹색으로 옷을 갈아입었다. 볼프강 호수가에는 한쌍의 백조가 서로의 목을 비비며 교태를 피운다. 온 유럽이 녹색으로 빛나는 그즈음에 오스트리아를 방문한 게 행운이었다는 생각이 들만큼 여유로운 풍경에 차를 멈추어 풀밭에 몸을 뉘었다. 호수 건너편에는 독특한 질감의 침엽수들이 쏟아질 것처럼 하늘까지 뻗어있었는데 그 모습 위로 어떤 얼굴이 떠올랐다.
사람들은 그를 '밥 아저씨'라고 불렀다. 하나도 안 쉬운데 참 쉽다며 손으로 몇 번 스윽스윽 하면 생겨나던 숲과 나무들. 하얀 캔버스에 그의 그림이 완성되어가는 과정을 멍하니 지켜보다가 "참 쉽죠?"라는 대사를 들으면 극심한 좌절감을 느끼곤 했다. 인터넷도 없던 시절이었지만 그가 그림을 그리는 장면은 가상현실이나 다름없었다.
물론 밥 아저씨에 대한 그리움이 어느 직장인을 미술학도로 만들지는 못했다. 나는 너무 짧았던 그의 생애를 안타까워하며 다시 차에 올랐다.(밥로스는 나이 50에 림프종으로 사망한다.) 그가 버릇처럼 말했던 것처럼 인생을 느긋하게, 그저 내버려 두면서 보낼 수 있으면 좋겠다. 적어도 오스트리아는 그런 사람들이 모여 사는 것처럼 보였다.
밥 아저씨. 웃으면서 뼈 때리던 그 말투와 머리 안에 뭔가 숨겨놨을 거 같은 헤어스타일이 아직 생생하네요. 저는 나름대로 괜찮은 어른이 된 거 같은데, 사실 아저씨 때문에 미술은 진작 접었어요. 거기서 잘 지내시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