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행기를 타지 않은지 어느새 1년이 넘었다. 대륙의 나라들 간에는 이동 금지령이 내려졌고, 우리 같은 섬나라(북쪽이 막혀 있으니 사실상)는 비행기를 탈 수 없으니 사실상 전 세계가 고립된 채 살아야 하는 시대가 됐다. 작년 10월, 무심하게 다녀온 발리 여행이 마지막이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산아래에서부터 바다까지 맞닿은 계단식 논과 군데군데 서있는 야자수, 스쿠터를 타고 그 해변의 풍경 속으로 들어가는 모습은 이제 TV에서나 볼 수 있다.
다가올 인생의 변화를 예감할 때, 두려움과 설렘 사이를 아슬아슬하게 줄타기하는 그 기분이 그리울 때 이제는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다. 차라리 그 기분을 몰랐으면 나았을까. 비 온 뒤 물이 고인 놀이터에서 아무 생각 없이 뛰어놀 수 있는 어린아이들과 달리 나는 이미 너무 많은 세상을 봐 버렸다. 저 창 밖에 뭐가 있는지 아는 사람이 못 본 채 살아가야 한다고 생각하니 그저 막막한 것이다.
볼리비아 해발 3800미터에 있는 티티카카 호수에 가면 섬이 하나 있다. 태양의 섬이라고 불리는 그 섬에는 내가 본 가장 순수한 사람들이 산다. 호수변에서 작은 보트를 타야 들어갈 수 있는 태양의 섬에 첫발을 디디면 바람 냄새를 몰고 온 여행자에게 꽂히는 무수한 눈동자를 제일 먼저 느낀다. 마치 집합이라도 한 듯 선착장 맞은편의 낮은 계단에 앉아 있는 아이들의 시선이다. 그저 커다란 배낭에 희한한 검은 안경을 쓰고 배에 타고 내릴 뿐인 그 광경을 아이들은 마치 단체 관람하듯 바라보고 있었다. 학교도 놀이터도 없는 외로운 섬에서 나고 자란 아이들에게는 그 모습이 영화 속 장면처럼 느껴질 법도 하다.
그렇게 배에서 내린 사람들이 모두 흩어지고 나면 섬의 모든 것이 고요해진다. 도로도 없는 섬에 자동차나 호텔 같은 게 있을 리 없다. 숙소라고 해봐야 민박 네댓 개가 전부고, 해가 떠 있는 동안은 수도와 전기도 들어오지 않는다. 세월의 흔적이 훈장처럼 얼굴에 벤 주인아주머니는 그 사실을 알리면서도 계속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 전기야 아무려면 어떠랴. 태양의 섬의 묘미는 순수의 세계에서 까마득히 멀어진 우리는 감히 상상도 할 수 없는 그 삶을 살짝 엿보는 데에 있다.
숙소에 대충 짐을 놓고 모든 것이 천천히 흘러가는 섬의 꼭대기에 올랐다. 바람은 제법 강했고 해가 지기까지는 아직 두어 시간이 남은 시간. 나는 어느 바위 위에 앉아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호수와 호수 너머 세상을 바라보기만 했다. 이제 노을이 질 즈음 먼 호수 위 갑자기 나타난 구름이 하늘을 집어삼키고 설산도 구름 뒤로 몸을 숨겼다. 그 먼 구름 사이로 붉은 노을과 비가 동시에 쏟아지더니 쾅쾅하는 번개 소리가 시간차로 들렸다. 마치 영사기로 필름영화를 틀어놓은 것처럼.
여행을 가서도 아무것도 하지 않은 건 그때가 마지막이었던 것 같다. 하루에 다섯 번 들고 나는 배가 섬에서 유일한 이벤트고 TV와 전화가 없어도 아무렇지 않은 사람들. 세상과 단절된 채 그저 구름이 흘러가는 대로 천천히 살아가는 사람들. 몰라서 아무렇지도 않은 사람들. 이제와 내가 그렇게 살 수 있을까. 지금도 눈만 감으면 그 시린 풍경이 눈앞에 생생한데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