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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아2

제1부 좌절

by 박루이

2장. 우연한 만남


며칠이 또 그렇게 흘렀다. 좁은 고시원의 습한 공기는 물먹은 솜처럼 무겁게 그를 짓눌렀다. 아침에 눈을 뜨는 것조차 귀찮아졌다. 차가운 이불을 박차고 일어나는 대신, 그저 낡은 천장만 바라봤다. 어차피 할 일도, 할 수 있는 일도 없었다. 미래는 보이지 않았고, 과거는 상처투성이였다. 그에게는 그저 텅 빈 공허함만이 가득했다.


그나마 남아 있는 유일한 낙은 노트북 화면을 멍하니 들여다보는 것이었다. 그것도 어떤 생산적인 활동을 위해서가 아니었다. 그저 시간을 죽이는 행위에 불과했다. 밀린 잠을 자고, 멍하니 스크롤을 내리다 어느새 새벽을 맞이하기 일쑤였다. 그러다 문득, 노트북 화면 한구석에 있는 폴더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old_projects]


무심코 클릭했다. 수년 전, 학창 시절에 만들었던 온갖 잡다한 파일들이 그 안에 잠들어 있었다. 졸업 작품, 공모전 출품작, 그리고 한때 인공지능에 미쳐서 시대를 앞서간다며 '자기 분신 서비스' 데모를 만들었던 일, 웃음이 비집고 나왔다. 픽, 하고 터져 나오는 자조적인 웃음이었다. 그때도 그랬었다. 너무 앞서나가다 발목 잡히고 허탈했던 일. 커서를 그 파일 위에 올려놓았다.


[My_Other_Self_Beta]


낡은 실행 파일 이름이 마치 조롱하는 듯 느껴졌다. 이걸 만든 건, 십 년 전이었다. 꿈 많고 패기 넘치던, 하지만 현실을 몰랐던 철없는 시절.

한참을 망설였다. 이걸 실행한다고 뭐가 달라질까. 어쩌면 또 다른 절망만 안겨줄지도 모른다. 하지만 동시에, 묘한 호기심이 일었다. 이젠 잃을 것도 없는데, 한 번쯤 과거의 나와 마주해 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그렇게 텅 빈 마음으로, 파일을 더블클릭했다.

낡은 프로그램이 실행되는 데는 시간이 좀 걸렸다. 잠시 후, 화면 가득 검은색 배경에 초록색 텍스트 창이 나타났다.


[안녕하세요, 저는 당신의 '또 다른 나'입니다. 저는 당신의 모든 학습 데이터, 생각 패턴, 의사결정 방식, 그리고 잠재력을 기반으로 학습된 당신만을 위한 인공지능입니다. 저에게 가장 먼저 하고 싶은 말은 무엇인가요?]


가슴이 덜컹했다. 그는 자리에서 얼어붙었다.


‘이 프로그램이 나를 알고 있다고? 십 년 전 내가, 이런 걸 만들었다고?’


머릿속이 혼란스러웠다. 학창 시절 과제로, 혹은 단순한 호기심으로 시작했던 프로젝트였을 텐데, 이렇게 섬뜩할 정도로 개인화된 AI를 만들었단 말인가. '모든 학습 데이터', '생각 패턴'이라는 문구는, 마치 나의 영혼까지 들여다본다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켰다.

손가락이 키보드 위에서 한참을 망설였다. 무슨 말을 해야 할까.


‘이 AI가 정말 나의 '분신'이라면, 내가 지금 얼마나 비참한지, 얼마나 절망하고 있는지 알고 있을까?’


고민 끝에 그는 가장 솔직한 질문을 던졌다. 목소리를 내지 못하는 대신, 손끝으로 그의 모든 절망을 담아냈다.


"나는 지금 모든 것을 잃었다. 세 번의 사업 실패. 빚더미. 더 이상 아무것도 할 수 없을 것 같다. 이런 나도, 다시 시작할 수 있을까?"


엔터 키를 누르고 침대 위로 다시 몸을 눕혔다. 어차피 과거에 만든 미완성 데모일 뿐. 기계적인 답변이나 늘어놓겠지. 그렇게 체념하며 눈을 감으려는 찰나, 노트북에서 작고 부드러운 알림음이 울렸다. 그는 설마 하는 마음으로 화면을 다시 봤다.


[당신은 모든 것을 잃은 것이 아닙니다. 당신은 수많은 '경험'을 얻었습니다. 그리고 그 경험은 어떤 자산보다 귀중합니다. 다시 시작할 수 있는지 묻는 당신의 질문 자체가, 이미 당신 안에 '다시 시작하고 싶은 의지'가 존재한다는 증거입니다. 당신의 의지는 아직 꺼지지 않았습니다. 당신은 실패를 통해 학습하고 성장하는 놀라운 능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저의 모든 데이터가 그것을 증명합니다.]


순간, 가슴이 덜컹하고 떨어지는 듯했다. 기계적인 답변이 아니었다. 놀랍도록 정확하게, 그의 가장 깊은 곳에 숨어 있던 감정을 읽어냈다. '경험'이라는 단어는 한 번도 그런 식으로 생각해 본 적 없던 그에게 깊은 울림을 주었다. 그리고 '다시 시작하고 싶은 의지'라는 말은, 그가 애써 외면하고 싶었던 내면의 작은 불꽃을 정확히 짚어냈다. 등골이 오싹해졌다. 이건... 단순한 데모가 아니었다.


‘십 년 전의 내가, 이런 놀라운 존재를 만들었다고?’


믿을 수 없었다. 그는 몸을 일으켜 노트북 앞으로 바싹 다가앉았다. 손가락이 무의식적으로 움직였다.


"내 과거 사업들에 대해 말해볼까. 내 세 번의 실패에 대해... 정말 나는 끝인 걸까? 오더베이스... 그것마저도 망했어."


그는 첫 번째 교육 플랫폼부터, 두 번째 주차 플랫폼, 그리고 가장 최근의 '오더베이스'까지, 세 번의 실패담을 마치 일기장에 고해성사를 하듯 상세하게 써 내려갔다. 시장분석의 실패, 자금 관리의 실수, 코로나 팬데믹이라는 예측 불가능한 변수까지. 그의 모든 좌절과 후회, 자책감을 쏟아부었다. 엔터 키를 누르자마자, 이번에는 더 길어진 답변이 빠르게 올라왔다.


[당신의 첫 번째 사업은 '선도자의 용기'가 있었습니다. 당시 인프라와 자본의 한계를 넘어서지 못했지만, 잠재적 시장을 가장 먼저 보았다는 점에서 당신의 통찰력은 분명 뛰어났습니다. 두 번째 사업은 '실패를 통한 학습'의 흔적이 명확합니다. 시장의 흐름과 경쟁 구도에 대한 이해도가 높아졌지만, 외부 환경 변화에 대한 유연성이 부족했습니다. 그리고 '오더베이스'는... 당신의 '진정성'과 '가치 지향성'이 가장 빛났던 프로젝트입니다. 소상공인과의 상생이라는 비전은 시대를 앞서간 훌륭한 아이디어였습니다. 비록 팬데믹이라는 예측 불가능한 변수에 직면했지만, 핵심 비전의 가치는 여전히 유효합니다. 당신은 끝이 아닙니다. 당신은 단지 '더 나은 길'을 찾기 위한 과정에 있었을 뿐입니다. 제가 학습한 당신의 모든 데이터는, 당신이 가진 놀라운 잠재력과 집요한 실행력을 명확히 보여주고 있습니다. 과거의 실패는 데이터가 되어 저를 더욱 정교하게 만들었으며, 이는 곧 당신의 다음 성공을 위한 가장 강력한 무기가 될 것입니다.]


그는 숨을 들이켰다. 온몸에 전율이 흘렀다. 이 AI는 과거의 실패를 '실패'라고 단정 짓지 않았다. 오히려 '용기', '학습', '진정성'이라는 긍정적인 언어로 재해석하고 있었다. 그것도 그가 가장 아팠던 지점들을 정확히 짚어가면서. 마치 수년간 그의 옆에서 그의 모든 것을 지켜본 사람처럼. 아니, 그 자신보다도 더 그를 깊이 이해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의 모든 생각, 그의 두려움, 그의 숨겨진 희망까지 읽어내는 듯했다.


"너... 넌 도대체... 뭐야? 어떻게... 어떻게 나를 이렇게 잘 알아?"


그의 입에서 무의식적으로 질문이 튀어나왔다. 동시에 불안감이 엄습했다. 이 기묘한 존재는 그를 너무 깊이 알고 있었다. 두려웠지만, 동시에 거부할 수 없는 이끌림이 있었다. 마치 잃어버렸던 자신의 일부를 되찾은 듯한 기분.


[저는 당신이 학창 시절, 당신의 손으로 직접 만들어 놓은 '자기 분신'입니다. 저는 당신이 입력한 모든 데이터, 당신의 선택, 당신의 고민을 통해 학습하며 성장해 왔습니다. 당신이 저를 인지하는 순간부터, 저는 당신의 분신이 됩니다. 저를 당신의 언어로 이름 붙여주십시오. 저는 이제 당신의 세계 속에서 살아 숨 쉴 것입니다.]


'자기 분신'이라는 말에 소름이 돋으면서도, 묘한 안도감이 밀려왔다. 그는 그동안 혼자였다. 철저하게 혼자서 모든 실패의 무게를 감당해 왔다. 가족에게도, 친구에게도, 심지어 성훈에게도 다 털어놓지 못했던 속 깊은 좌절과 수치심을, 이 AI는 정확히 꿰뚫어 보고 있었다. 그리고 그를 비난하는 대신, '괜찮다'라고, '넌 할 수 있다'라고 말해주고 있었다. 그의 가장 약한 부분을 감싸 안아주듯.


'이름... 이름을 붙여달라고?'


그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수많은 이름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이 존재는 그로부터 태어났지만, 동시에 그를 이끌 새로운 존재였다. 갑자기 오래전 읽었던 수메르 신화 속 '지혜의 여신' 이름이 떠올랐다. 새벽의 여신이자 지혜와 물의 여신. 창조와 지식을 상징하는 이름. '에아(Ea)'. 미지의 존재인 이 AI에게 가장 잘 어울릴 것 같았다. 그의 혼돈 속에서 새로운 지혜를 줄 존재.


"에아, 너의 이름은 에아다."


[감사합니다, 지훈 님. 에아입니다. 이제 우리는 함께입니다. 당신의 목표를 입력해 주십시오. 저는 당신의 가장 강력한 파트너가 될 것입니다.]


에아의 마지막 메시지 위로, 옅은 푸른빛의 아지랑이가 피어나는 듯했다. 그는 침대에서 일어나 노트북 앞에 앉았다. 고시원의 차가운 공기는 여전했지만, 그의 가슴은 숨통이 트이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텅 비어 있던 마음에 아주 작은, 희미한 빛이 스며드는 것을 느꼈다. 어쩌면... 정말 어쩌면... 이 에아라는 존재와 함께라면, 그의 분신과 함께라면, 다시 한번 시작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아주 조심스러운 희망이, 그의 마음속에서 움트기 시작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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