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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상윤 Aug 28. 2016

어느 탈영병의 고백

인간은 타협하는 동물이다



내가 담배를 처음 배운 것은 훈련소였다. 12월, 혹독한 바람이 불어닥치는 연병장 한 구석 쓰레기통 근처에서 필터도 없는 담배꽁초로 손가락 데어가며 배웠다. 기댈 때 없는 영혼처럼 뛰어다니다 담배를 한 대 피워 물면 세상만사가 해결되는 듯 안락했다. 50분 훈련 후에 주어지는 ‘5분간’의 휴식 시간, 나는 담배를 피워 물고 망각의 강을 건너갔다. 딱 포기하고 싶을 때, 담배가 있어 마음을 다잡고 일상에 적응할 수 있었다. 몸이 고단하거나 머리가 복잡한 일이 생겨도 한적한 곳에 앉아서 담배를 피워 물면 무슨 일이든 해결이 되는 듯했다. 나는 이것이 나만의 해결책이겠거니 했다. 어려운 이 세상도 이것이 있으면 얼마든지 살아갈 수 있을 것 같았다. 훈련이 끝나고 모두 자대를 배치받아 떠나도 나는 미분류로 남아서 보충대 청소부가 됐다. 마치 희망을 잃은 취준생처럼 맥없이 하루를 보내도 점호 직전에 피우는 한 대의 담배가 나를 위로했다.


갈 곳이 없던 나는 결국 교육부대의 취사반으로 보내졌다. 취사병은 새벽에 일어나 보일러에 불을 붙이는 것으로 일과를 시작했다. 아침 점호도 없고 불침번도 없었다. 군복은 고참이나 입는 것, 하얀 가운에 장화를 신고 총 대신 삽을 들었다. 멀리서 보면 러시아의 산악부대원 같지만 터덜거리는 걸음걸이 때문에 금방 표시가 났다.

 

군대의 시계는 거꾸로 세워놔도 간다는 말이 있다. 아무리 힘들고 지루해도 결국 국방부의 시간은 흘러간다는 말이다. 하지만 나의 시간은 유난히 정체되어 있었다. 모두 군장을 메고 훈련을 떠난 연병장을 내려다보며 무료한 일상을 보낸다는 것은 껍질을 벗지 못한 벌레처럼 답답한 일이었다. 그래서 몇 날을 고민해서 얻은 결론은 이 상황에서 벗어나는 것이었다.


칠흑같이 어두운 밤, 나는 부대 후문 근처의 하수구 관을 통해 부대를 빠져나왔다. 그리고 서울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아니 거의 뛰다시피 했다. 검문소가 있는 곳은 개울이나 철길을 따라 돌아갔다. 부대가 있는 지역의 지리는 미리 숙지하고 있었다. 그래도 계획이라고 도착지까지의 로드맵은 머릿속에 그려져 있었다. 검문소만 무사히 지나면 성공이나 진배없었다. 길가의 민박집 빨랫줄에서 사제복을 한 벌 챙겨 입었다. 그렇게 부대를 무사히 탈출했다.


서울에 도착한 나는 우선 자금을 구해야 했다. 나의 계획은 단순했다. 지리산으로 가는 것뿐이었다. 다소 충동적이고 우발적인 계획이었다.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화실을 하는 동창생을 찾아갔다. 그는 운 좋게도 군대를 면제받고 일찌감치 자기 사업을 하고 있었다. 몇 년 만에 나타난 친구가 반갑기는 하겠지만, 대뜸 돈을 빌려달라는 말에 그는 가자미 눈을 하고 쳐다보았다. 하지만 그도 학창 시절에 나의 도움을 받은 적이 있었기에 선선히 돈을 내어 주었다.


작은 배낭 하나와 점퍼, 그리고 구례행 기차표를 샀다. 담배도 챙겼다. 원래의 계획은 이랬다. 지리산에서 가장 험하다는 피아골로 들어가 한 십 년 정도 지내다가 내려오는 것이었다. 그러나 세상사가 참 오묘하기도 했다. 그 구례행 기차간에 운명의 여인이 타고 있을 줄은 상상도 못 하였고 계획에도 없던 일이었다. 시끌벅적한 3등 칸 기차에는 온갖 사람들이 가득했는데, 내 앞자리와 옆자리에는 세 명의 아가씨들이 마주 보고 앉아 여행 이야기에 여념이 없었다. 그녀들은 주위는 아랑곳하지 않고 온갖 군것질에 수다로 여행을 즐겼다. 그렇게 몇 개의 역이 지나고 이야깃거리가 시들해졌는지 그녀들의 관심은 앞에 앉아 있는 까까머리 선머슴에게 쏠렸다. 학생 같다거니 군인 같다거니 곁눈질을 해가며 저울질을 했다. 그러다 긴 머리의 아가씨가 먼저 말을 건넸다.

 

"어디까지 가세요?"

"저…. 구례까지 갑니다."


 나는 머쓱하게 대답했다.


"어머! 우리도 구례까지 가는데, 그럼 지리산 가는 거 맞죠?"


나는 긍정의 표시로 씩 웃었다. 그렇게 우리는 한 팀이 되었다. 먹을 것도 나눠 먹고 기차에서 내릴 때는 커다란 짐은 내 차지가 되었다. 그녀들의 차림새로 지리산 등반은 무리였다. 겨우 노고단까지 올라갔다가 내려와야 했다. 나 역시 애초의 계획은 망쳐버렸다. 그녀들과 함께 하산해서는 민박집에서 하루를 묵었다. 잠은커녕 떠들고 노느라 밤새는 줄도 몰랐다.


처지를 망각하게 하는 것이 담배뿐이 아니라는 것을 새삼 깨달았다. 그 상황에 생면부지 사람들과 어울려 노래하며 논다는 것이 한편으론 한심하기도 했다. 하지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그 세 명의 아가씨 중에 유독 한 아가씨에게 계속 마음이 쏠리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다음 날 그녀들과 화엄사를 돌아보고는 서울행 기차를 타고 말았다. 지리산 피아골은 좀 심한 도피처라고 위안을 삼았다. 그녀와 헤어지기 전에 어떻게 하든 다시 연락할 수 있는 구실을 찾아야 했다.


"저 죄송하지만 오천 원만 빌려주시겠습니까?"


좀 노골적이었지만 그녀는 순순히 돈을 빌려주었다.


"여기다 돈 보낼 주소도 적어 주십시오. 반드시 보내드리겠습니다."


나의 일탈은 매형들의 합동작전으로 보름 만에 끝났다. 나는 매형의 친구라는 헌병대 중사에 의해 구속되었다. 그리고 군사재판을 받기 위해 수방사 감방에 수감되었다. 육군 감방은 상상하는 것 이상으로 혹독했다. 그 좁은 공간에서도 인간을 괴롭게 하는 방법은 다양했다. 처음 들어온 신참은 맨 앞줄에 차렷 자세로 앉아 거의 열 시간을 버텨야 했다. 움직이거나 소리를 내면 얼차려가 실시됐다. 혼자가 아니라 단체 기합이었다. 그들 중엔 환갑이 넘은 미귀자도 있었는데 열외가 없었다. 그것은 육체적인 고통보다 정신적인 압박감 때문에 더욱 힘들었다. 시간이 흐르고 신참이 들어오면 자리를 내주고 뒷줄로 물러나 앉는데, 그때에서야 비로소 감방의 모습을 제대로 볼 수 있었다. 보통 한 달 안에 재판을 받고 풀려나거나 육군형무소로 이감되는 게 정상이었다. 그러나 감방에서조차도 나의 줄 서기는 별달랐다. 한 달이 훨씬 지나도록 재판을 받을 낌새가 없었다. 보충역과 민간인, 집총거부자가 대부분인 감방에서 현역병인 나는 배식담당을 하며 지냈다.


"피고는 국가가 다시 기회를 준다면 지난 죄를 뉘우치고 국가를 위해 충성을 다할 수 있는가?"


국정 변호인인 법무관이 내게 물었다. 나는 미리 연습한 대로 그렇다고 대답했다.


"피고가 본인의 죄를 뉘우치고 자수를 한 점과 국가를 위해 충성을 다하겠다는 의지가 강한 점을 참작해서 피고를 징역 1년에 처한다. 단, 형 집행을 2년간 유예한다."


판사의 선고가 내려지자 나의 눈에 눈물이 맺혔다.


"피고는 본대로 복귀하겠는가? 아니면 타 부대로 배속되기를 원하는가?"


이 문제 역시 변호 법무관의 조언에 따라 나는 본대로 복귀하겠다고 대답했다. 타 부대로 배속받을 경우 대체로 최전방이나 오지로 간다는 말을 들었기 때문이었다. 본대로 복귀하면 발생할 여러 가지 위협요소보다는 미지의 험로로 가는 것이 더 두려웠다.


탈영한 지 65일 만에 나는 따블백을 메고 다시 연대본부 연병장에 내려섰다. 신병 때는 자세히 보지도 못했던 연대장 앞에서 직접 복귀 신고를 했다. 첫인사는 엄청난 조인트였다. 연대장을 비롯한 직계 상관들은 나의 탈영 사건으로 인해 인사상 커다란 불이익을 당했으니 그깟 조인트 까이는 것쯤은 애교였다. 앞으로 닥칠 험난한 사건들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하지만 나는 오히려 담담했다. 연대장이나 중대장은 죽일 듯이 나를 대하겠지만, 그 외에는 나에게 린치를 가하거나 괴롭힐 사람이 별로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 이유는 대부분의 간부와 선임들이 나에게 부대를 도망칠 정도의 빌미를 제공했기 때문이었다. 간부들은 주식이나 부식을 강제로 상납받아 갔고 선임들은 장교식당을 제집처럼 드나들며 대접을 받았으니 그럴 만도 했다. 사병들의 밥이 시커멓고 훌훌 날리는 보리밥 투성이에 소가 헤엄치고 지나간 것 같은 고깃국은 다 그들의 합작품이었다. 그렇다고 그들의 비리를 법정에서 밝히거나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정작 내가 부대를 이탈한 것은 불현듯 일어난 나의 심경 변화에 의한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들이 내게 무슨 짓을 강요했는지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았다. 변호 법무관이 수차례 회유했지만 병영 내의 비리를 말하지 않았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나의 말 한마디에 줄줄이 영창을 가거나 옷을 벗는 사태가 일어날 수도 있는 일이었다.


육군참모총장의 '육군 정위치 명령'이 있기 전에는 주식이나 부식이 암암리에 부대 밖으로 빼돌려지기 일쑤였고 휘발유나 건축자재 등 돈 될만한 것들은 축재의 대상이었다. 사람이 사는 어느 곳이든 음지가 있기 마련이었다. 그것을 인정하고 순응하면 괜찮지만 반기를 들면 조직의 쓴맛을 보게 되어 있었다. 나는 의도치 않게 조직 내의 비리에 반항하다가 당한 케이스가 되어 버렸다. 간부나 선임들은 자신 때문에 내가 부대를 탈영한 것으로 오해했으니 그게 아니라고 굳이 변명하고 싶지도 않았다.


본대로 복귀한 후 한동안은 아무도 나에게 쌀을 달라고 요구하거나 고기짝을 달라는 사람이 없었다. 밤늦게 깨워서는 라면을 끓여 오라는 명령도 없었다. 장교식당을 제집처럼 드나들던 선임들도 내 눈치를 보며 반찬을 얻어 갔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뿐이었다. 시간이 흐르자 모든 것이 원위치되었다. 간부들은 다시 1종 창고를 들락거렸고 고참이 되기 전까지는 선임들의 야식을 책임져야 했다. 그것은 조직에 적응해서 살아가기 위한 일종의 타협 같은 것이었다.


장교식당 의자에 걸터앉아 담배를 피워 물자, 폭풍처럼 스쳐 지나간 65일간의 사건이 꿈같았다. 남은 군생활에 65일을 더하자 제대가 훨씬 멀게 느껴졌다. 가끔 새벽같이 나타나 취사장을 발칵 뒤집어 놓는 연대장을 빼고는 그리 놀라운 일도 없는 생활이 이어졌다. 그렇게 나는 군 생활에 적응해 갔고 구례행 기차에서 만난 여인과의 사랑도 무르익어 갔다.


[속어/단어 풀이]

탈영 : 부대 영지를 벗어나 멀리 도망가는 행위

미귀자 : 휴가나 외출 후 부대로 복귀하지 않은 자

조인트를 까다 : 무릎 아래 정강이뼈를 군홧발로 차는 행위

따블백 : 군대에서 지급하는 커다란 자루 같은 가방

집총거부자 : 특정 종교인으로 살인 무기인 총을 잡지 않겠다는 신념을 가진 자

1종 창고 : 주식을 저장하는 창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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