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미터 수심의 수영장과 트라우마

잊고 있던 기억 속의 조각을 찾다

by 살구름 Salgurum

호주는 나에게 제2의 고향 같은 곳이었다. 시드니에 친척분이 계셔서, 어린 시절부터 자주 오갔다. 몇 년 전, 내 미래를 걱정하며 전문직을 선호했던 전 연인의 권유로 원하지 않는 전공과 장거리 연애를 선택하고, 유학을 떠났었다. 나는 결국 3개월 만에 다시 서울행 비행기에 올라탔다. 그리고 포기한 나를 자책하며, 후회의 몇 년을 보냈었다.

이제는 자유의 몸이 된 나는 원하는 전공을 선택했고, 유학을 준비하기까지 딱 3개월이 걸렸다. 바쁘고 정신없는 서울은 시드니와 비슷했기에 고요하고 평화로운 도시인 애들레이드를 선택했다. 가족도, 친구도 없었지만, 오히려 낯설고 고독한 곳으로 떠나 숨고 싶었다.


막상 영어도 제대로 준비되지 않은 채, 학사 전공과 다른 사회복지 석사를 하려니 막막했다. 게다가 사회복지 특성상 네트워킹이 필수였다. 소심한 I의 성격인 나였지만, 최대한 에너지를 끌어올려서 학교 행사며, 동아리며 빠지지 않고 참석했다. 그러던 어느 날 한 모임에서 수영 이야기가 나왔다. 호주는 바다로 둘러싸인 커다란 섬나라이기에 호주 사람들은 기본으로 수영 스킬을 장착하고 있다. 나도 물을 좋아하고 접영을 배우다 만 실력을 갖추고 있었기에 나도 수영 좀 할 수 있다고 말했다.

"해양 구조 봉사하면 수영 강습도 무료고, 수영장도 이용할 수 있는데 같이 갈래?"라는 친구의 제안이 나를 바다로 이끌었다.


해양 구조 봉사 (Surf Lifesaving)는 다양한 단계가 있는데, 어린아이부터 성인까지 훈련받고 테스트를 통과해야 한다. 나의 첫 번째 단계 SRC (Surf Rescue Certificate), 수영장에서 5분 안에 200m 수영하기, 바다에서 10분 안에 100m 달리기, 100m 수영하기였다.


8월의 호주는 한국과 반대로 겨울의 끝을 달리고 있었다. 16도 정도의 날씨여서 한국처럼 추운 겨울은 아니지만, 날이 따뜻해지기 전까진 매주 수영장에서 훈련한다. 영어도 잘 못하는데 수영강습은 제대로 알아들을 수 있을까 하는 불안함을 품고 수영장에 들어섰다. 정말 오랜만의 수영이었다. 수술 후 1년은 반신욕도, 수영도 하지 못했다. 물개라 불릴 만큼 물을 좋아했는데, 너무나 감격스러운 순간이었다. 물에 살짝 발을 담그고 닭살이 올라오는 물 온도에 적응하며 물속으로 들어갔다. 그런데 발이 땅에 닿지 않았다. 처음 물에 들어가 본 사람처럼 발버둥 치다 겨우 벽을 붙잡았다. 다른 사람들은 다이빙하며 물에 첨벙 뛰어들었다. 심지어 물구나무를 서서 다이빙하는 사람도 있었다. 수심은 3m였다. 투명하다 못해 새파란 바닥을 바라보니 울렁거리며 현기증이 살짝 났다. 수영장 끄트머리에 걸터앉고 잠시 휴식을 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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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나 원래 물 무서워했었지.' 어린 시절 물에 빠졌던 기억이 새삼 떠올랐다.

그 당시 여름엔 항상 계곡에 놀러 갔다. 지금은 안되지만 그땐 산속 계곡에서 수박도 먹고 고기도 구워 먹고 했었다. 물이 얼마나 맑았는지 송사리, 소라를 잡으며 놀았다. 4살 정도였던 걸로 기억한다. 물길을 걸어가던 나는 슬리퍼가 미끄덩 벗겨져 버렸고 수심이 깊었던 건지 아니면 그냥 넘어져 놀란 건지 물속으로 계속 가라앉았다. 어린 나이였지만, 눈앞에 악기를 연주하고 노래를 부르는 환상 속의 인어공주들이 보였고, ‘아 나 이렇게 죽는구나’ 싶었다. 그렇게 체감은 몇 분이 지난 거 같은데, 몇십 초 후에 할머니는 나를 꺼내 들고 바위 끄트머리에 앉혔다. 세상 서럽게 울던 나는 그 후로 물을 무서워했었다. 몇 년이 지난 후, 초등학교에 입학하고 물 공포를 극복하기 위해 수영장을 다녔다. 키가 나름 커진 나는 땅에 발이 닿는다는 안정감으로 수영에 재미를 붙였다. 그게 내가 물을 좋아하게 된 계기였다.


기억의 한 조각을 찾아내며 다시 깊은 수심의 수영장 물을 바라봤다. 여긴 수영장이고, 강사님도 있고 라이프가드도 있고, 심지어 친구는 프리다이빙도 한다는데 나 하나 정도는 구해줄 수 있지 않겠어?라고 다독이며 몸을 담갔다. 그렇게 몇 번을 왔다 갔다 하면서 안정을 찾아갔다. 조금만 긴장해도 수영장 물을 흠뻑 마셨기 때문에 정신 차리고 호흡하려고 노력했다. 움직이다 보니 물의 온도는 적당하게 느껴졌다. 긴장을 풀고 주변을 둘러보니 나이가 지긋한 할머니, 할아버지부터 초등학생 아이들, 심지어 장애인 분들까지 수영을 하고 있었다. 다들 어떤 목표와 마음가짐을 가지고 이곳에 왔는지는 모르지만 얼굴에 활기가 돌았다. 그 사이에서 나도 생기를 되찾아 갔다. 그리고 오랜만에 시원하면서 착 붙는 물의 감촉을 느끼며 점점 불안감이 걷어지고 있었다.


"바다에서 수영할 땐 파도 때문에 배로 힘들 거야. 그리고 바다에서도 발은 안 닿는걸?" 친구의 말을 듣기 전까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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