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살리고 살리고 Jan 12. 2018

나를 가장 나답게 하는 것

『생각을 걷다』 (김경집, 한겨레출판, 2017)

몇 년 전 연애에 대한 사실적인 묘사로 일부 마니아(mania)를 형성했던 드라마가 있다. ‘연애의 발견’이다. 여주인공은 과거 남자 친구와의 사랑이 끝난 후, 새로운 사랑을 시작한다. 이 전 연애의 깨달음으로 남녀 사이의 주도권을 쥐며 ‘이만하면 행복하다’고 여기며 지내지만 옛 남자 친구의 등장으로 여러 갈등을 겪는 스토리다. 나열한 스토리는 단순하지만 마지막 장면의 대사는 잊을 수 없다. 옛 남자 친구와 다시 시작하기로 결심한 여주인공은 의도적으로 우연한 만남을 가장하여 해후한다. 그가 왜 왔냐고 묻자, 이렇게 답한다. “너랑 있을 때 내가 가장 나 같아서”


곁에 있을 때 내가 가장 나답게 느껴지는, 나의 진짜 모습을 발견하게 해주는 무엇. 인문학자 김경집의 『생각을 걷다』 (한겨레출판, 2017)는 그러한 만남을 주선한다. 바로 ‘히말라야’라는 산을 통해. 거대한 자연 앞에 저절로 숙연해짐은 인간의 욕망과 욕심을 자연히 거둔 ‘나다움’이다. 그곳은 어떠한 꾸밈도 필요 없다고 말한다. 치장하지 않은 나를 받아들이면 타자 또한 있는 그대로 받아들임이 가능하다. 저자는 우연히 지하철 광고에서 히말라야의 사진을 본다. 그 사진 한 장으로 오랫동안 품었던 꿈을 실행한다. 그를 먼 타국까지 이끌게 된 선택은 자신의 더께를 걷어내고 비우는 과정이었다. 힘들게 내딛는 발걸음마다 따르는 끊임없는 질문은 자기를 더욱 자기답고 탄탄하게 만들었다. 


산행은 마음의 의지, 의식, 관념도 중요하지만 몸의 움직임, 느낌, 감각의 중요성을 깨닫게 한다. 히말라야를 사진으로만 경험한 독자는 풍광의 아름다움만 본다. 단면만 아는 것이다. 그러나 저자의 경험은 그러한 독자를 히말라야로 데려다 놓는다. 산소 결핍에 안개 자욱한 날씨, 쏟아지는 졸음을 간간히 견디며 힘겨운 산행을 함께하는 동안 독자는 천근만근의 다리가 되고, 최소화된 움직임이 되며, 가쁜 호흡이 된다. 숨을 쉴 수 없어 잠조차 잘 수 없는 장면에서 독자는 그 힘겨운 사투에 함께 뛰어든다. 급기야 비몽사몽에 몸의 균형감각을 잃고 의식을 잃을 뻔했던 순간 정신이 들어서 주저앉고 보니 벼랑 끝이었다는 경험은 독자의 근육까지 수축시켰다 단번에 풀어놓는다. 인간이 유기체임을 깨닫게 한다. “아무리 의지가 강해도 몸을 이길 수는 없다.”(p.194) 몸이 있어야 의식이 있고 의지가 생기는 법. 가쁜 숨이든 깊고 무거운 한숨이든 중요치 않다. ‘숨’을 쉬고 있음에 저절로 고마움이 따른다. 


여행에 필요한 짐은 ‘관심’과 ‘겸손함’이다. 그의 짐을 풀고 얻은 ‘깨달음’이 독자에게 울림을 준다. 네팔로 향하는 공항에서 시작하여 그의 삶의 못자리로 돌아오는 모든 순간이 ‘기승전 깨달음’이다. “달라지는 풍경이 중요한 게 아니라 달라지는 내 마음의 밀도가 중요한 것이다.”(p.114)의 대목에서 보듯 이 책을 단순한 여행기로 여긴다면 심각한 오해다. 자연과 사람에 대한 관심과 그것에서 얻은 깨달음이 자기 성찰로 이른다. 자신을 가장 낮은 곳으로 지긋이 내려놓는다. 그 거대한 산을 한 권의 철학서로 만든 비결이다. 

  

“안나푸르나에 들어서면서 계속해서 고산병에 대한 두려움을 떨치지 못했다. 난생처음 겪을 통증인 데다 짐작조차 되지 않으니 두려움은 눈덩이처럼 커질 뿐이다. 그러나 정작 두려워해야 할 고산병은 내 마음 안에 똬리 틀고 있는, 오랫동안 품어 와서 그 존재가 너무나 자연스러운 집착과 퇴행성 사고다.”(p.74)


독자는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한 힌트를 얻는다. 저자가 여정에서 얻은 깨달음을 통해 지나치기 쉬운 개념을 재해석하고 올바른 척도를 제시하기 때문이다. 겁은 부끄러운 일이 아닌 자연스러운 감정인데 비해 비겁은 창피한 일이므로 겁과 비겁을 혼용하는 것을 주의하라 당부한다. 또한 체념과 수용의 차이를 발견한다. “체념은 내 의지와 상관없이 이루어지는 일을 그대로 받아들여야 하는 수동적인 행위이지만 수용은 내가 주체적으로, 능동적으로 선택하는 행위이다.”(p.328) “관용은 결코 물렁물렁한 무골호인의 몫이 아니다.”(p.229) 작고 가벼운 일에 합리화의 변명과 같은 비겁을 거두어 내자. 수용의 ‘능동성’과 관용의 ‘단호함’을 잊지 말자. 

 

이 책은 여백마저 아름답다. 저자의 깨달음이 마무리되어 다른 장으로 이어지는 공간마다 「매일이 나의 삶이다」의 주제로 ‘시’와 그의 여정이 녹아든 ‘삽화’가 묘사된다. 그중 ‘길’과 ‘오아시스’를 보며 이전 시간을 지낸 사람들과의 연결을 발견한다. 길은 수많은 이들이 걸어서 생긴 길이므로 감사해야 하고, 오아시스는 우연히 만나는 선물이 아니라 앞 세대가 다음 세대를 위해 파놓은 우물이라 했다. 혼자 이룬 것은 없다는 시구에 남는 여운은 독자로 하여금 살면서 놓치는 부분까지 돌아보게 한다.


‘내 안의 신이 그대 안의 신에게 인사합니다.’라는 뜻의 인도 인사말 ‘나마스테’, ‘내 안에 있는 불성을 온전히 깨닫고 꺼내어 내 삶으로 드러내는 것’이란 뜻의 불교 인사, ‘성불하십시오’. 모두 자신으로부터 시작한다. 자신을 알지 못하면 함께 연대해 살아야 할 인간 사이를 오가는 인사는 가능하지 않다. 모든 관계의 시작은 나의 발견이고 자기 성찰에서 비롯된다. 저자는 책 끄트머리에 이렇게 말한다. 누군가 자신보다 어린 사람이 살아가야 할 시간에 대해 묻는다면 자신의 경험을 얘기할 뿐 그마저도 “성공한 삶보다는 내가 만족했던 것들에 대해 이야기해줄 뿐이다.”(p.324) 


저자는 자신보다 어린 사람을 예로 들었지만 이 책은 살날이 남은 분 모두에게 필요하다. 자신의 발견과 가치관을 여행길에 오롯이 담은 이 책을 사랑하는 사람에게 선물해봄은 어떨까. 정사각 판형에 살구색 표지, 두툼한 책은 리본만 더하면 딱 선물 포장이다. 특히, 부양의 책임으로 여행을 꿈으로만 간직한 채 열심히 살아가는 현대인에게 선물로 주기 가장 좋은 책이다. 더불어 “이 책의 인세 가운데 30%는 네팔의 아이들에게 도서관을 마련하는 비용으로 보내기로 했다.”(p.343)고 하니 어렵지 않은 방법으로 기부하고자 하는 분께 이 책을 권한다.

매거진의 이전글 모두가 주인이 될 수 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