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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살리고 살리고 Jan 17. 2018

출생이 사고라니요.

『자기 앞의 生』 (에밀아자르, 문학동네, 2015년)

태어남은 신성하고 행복한 일이었다. 이 책을 읽기 전까지는. 에밀 아자르의 소설, 『자기 앞의 』 (문학동네, 2015년)은 이 생(生)을 사는 독자에게 생각하고 싶지 않은 ‘출생 사고’란 단어를 던진다. 인간의 존엄은 마땅히 누려야 할 권리로 알았다. 따라서 누구나 태어나는 순간이 축복 속에 이뤄짐을 의심 없이 여겼던 것이다. 존엄은 마땅히 누려야 하지만 그 출발은 다를 수 있었다.


“출생 사고란 얼마든지 있는 일이며, 그들이 훗날 더 잘되어 훌륭한 어른이 된 예도 많다고 했다.”(p.246) 주인공 모모는 창녀의 자식으로 태어난다. 그런 그에게 프랑스 도시에 사는 어느 미국인 의사가 용기를 주기 위해 한 말이다. 그가 전하려던 용기에 비해 ‘출생 사고’란 단어가 주는 충격은 크다. 출생은 사고에 의해서도 발생하는 것임을. 그렇게 태어나서 사는 것은 피곤한 일일 수 있음을. 자신이 선택하지 않았지만 어렵게 생을 살아내야만 하는 사람이 우리 주위에 있음을. 사회가 부끄러워 드러내지 못하는 수많은 것들을 이 소설은 보여준다.


주인공 모모는 특별한 아이다. 자신이 10살인 줄 알지만 실제론 14살 아이다. 나이를 떠나 그는 흔한 10대의 모습과 다르다. 출생은 비루할지 몰라도 누구보다 독립적이고 건강한 가치관을 가지고 있다. 모모의 특별함은 로자 아줌마의 사랑과 보살핌을 통해 영향을 받았다. 로자 아줌마는 모모와 같은 ‘사고’로 태어난 아이들을 프랑스에서 가장 가난하고 지저분한 빈민촌의 어느 아파트에서 보살핀다. 그녀 역시 과거 창녀였다. 나이가 들어 더 이상 그 직업을 할 수 없게 되자 주위에서 버림받을 위기에 처한 창녀의 아이를 돌보는 것으로 생계를 유지한다. 사랑만큼 전염성이 강한 것도 없다.

 

모모에게 그의 출생 배경은 중요치 않다. 지나간 일과 선택할 수 없는 과거에 연연하지 않는다. 보이지도 만지지도 못하는 행복이란 가치에 매달려 미래에 현재를 담보로 바치는 미련을 떨지 않는다.


“나는 행복해지기보다는 그냥 이대로 사는 게 더 좋다. 행복이란 놈은 요물이며 고약한 것이기 때문에. 그놈에게 살아가는 법을 가르쳐주어야 한다. 어차피 녀석은 내 편이 아니니까 난 신경도 안 쓴다. (중략) 나는 나쁜 상황을 헤쳐 나가기 위해 모든 것을 다 해본 다음에야 그 행복이란 놈을 만나볼 생각이다.”(pp.104~105)


자기 앞의 생을 바라볼 뿐이다. 더불어 ‘행복’이란 관념에게 충고하는 그의 모습이 당차다. 주도하는 그가 아름답다. 지난 생 보다 다가올 ‘죽음’에 대한 선택을 고민하는 게 대견하다.


‘나’의 출생은 나의 의지로 선택할 수 없다. 누군가에 의해 태어나진다. 모모는 남들 다 가진 자신을 낳아준 사람을 보지 못했다. 부모가 있었다는 유일한 증거는 ‘나’의 존재를 통해 있었다고 믿는 걸로 스스로 위로하고 위안받아야 하는 수밖에 없다. “너를 낳아준 사람이 있다는 유일한 증거는 너 자신 뿐이란다.” (p.49) 태어나는 순간부터 불평등을 안고 사는 것이다. 그러나 죽음은 선택이 가능하다. 충동에 의한 죽음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생명을 유지할 돈이 없고 고통스러운 숨을 이어가야 하는 사람에게 편안하게 생을 마감할 수 있도록 하는 안락사. 이것이라도 선택할 수 있는 권리를 달라는 모모의 외침은 태어나는 순간 출발점이 달라 삶을 가까스로 유지해야 하는 이의 주장이라 더욱 설득력이 있다.


“그녀는 정해진 법 때문에 자기 뜻대로 죽을 수도 없다는 생각을 할 적마다 울음을 터뜨렸다. 법이란 지켜야 할 무언가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나 보호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다.”(p.118)


“로자 아줌마가 개였다면, 진작 사람들이 안락사시켰을 것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항상 사람에게 보다 개에게 더 친절한 탓에 사람이 고통 없이 죽는 것도 허용하지 않는다.”(p.130)


“더 이상 살아갈 능력도 없고 살고 싶지도 않은 사람의 목구멍에 억지로 생을 처넣는 것보다 더 구역질 나는 일은 없다고 생각한다.(p.300)


소수자에게 있어 차별 없는 삶은 그들과 가장 먼 가치다. 알제리 출신의 아랍인 모모와 그를 돌봐주는 전직 창녀 출신 로자 아줌마, 성소수자를 대변하는 세네갈 출신의 여장남자 롤라 아줌마, 이슬람 종교를 믿는 하밀 할아버지 등. 세상은 그들을 가진 것 없는 비루하고 더럽고 추한 자로 여겨 평범한 사람들과 다르다는 이유로 갈라서 다른 편에 나눈다. 소수자를 향한 편견은 그러한 인생을 어쩔 수 없이 받아들여야 하는 그들을 더욱 외롭게 한다. 그럼에도 이들 앞의 생은 결코 어둡지 않다. 그들 인생에 결코 끼어들 수 없을 것만 같은 ‘사람 사이의 온정’이 스며들었기 때문이다. 이웃의 말벗이 되기도 하고 도움을 주고받고 인정해주고 보듬고 이해하며 출생지, 인종, 젠더, 나이를 초월한 사랑과 우정을 배우는 것으로 말이다. 사람에게 상처받은 사람이든 상처를 주는 이든 모든 인간은 사랑을 나눌 수 있다는 점이 세상이 허락한 유일한 평등 인듯 하다.


프랑스에서 가장 권위 있는 콩쿠르 상을 수상한 『하늘의 뿌리』의 저자 ‘로맹 가리’는 이 소설의 저자 ‘에밀 아자르’이다. 자신이 ‘로맹 가리’ 임을 속이고 ‘에밀 아자르’란 가명으로 새 삶을 선택한 작가 역시 공평함에 있어 자유롭지 못했다. ‘에밀 아자르’ 활동 초기에 『그로칼랭』을 집필 후 지인에 의해 그 글이 로맹 가리의 작품이라고 폭로됐음에도 당시 비평가들은 믿지 않았다. “로맹 가리는 그런 글을 쓸 능력이 없다!” 며 단언한 비평가도 있었다. ‘로맹 가리’로 굳어진 편견의 잣대로 이미 그는 공정한 평가를 받을 기회를 잃은 것이다. 그에게 ‘공평함’은 자기 앞에 던져진 ‘생’이자 남겨진 숙제였으리라. 그는 그 숙제를 끝내고 자살로 삶을 마감한다. 사람들이 칭송하는 ‘에밀 아자르’가 바로 그들이 편견 안에 가둔 ‘로맹 가리’였음을 밝히며. 작가는 자신의 삶을 마지막까지 주도했다. 『자기 앞의 생』은 그러한 작가의 예고편이 아니었을까.


그는 삶과 죽음을 평등하게 보았다. 인간이 두려워해야 할 것은 ‘죽음’이 아닌 ‘고통스러운 삶의 경험’ 임을 일깨운다. “생이 그녀를 파괴한 것”(p.152)처럼. “왜 세상에는 못 생기고 가난하고 늙은 데다가 병까지 든 사람이 있는가 하면 그런 나쁜 것은 하나도 가지지 않은 사람이 있는지 모르겠어요. 너무 불공평하잖아요.”(p.248) 모모는 사랑하는 로자 아줌마의 죽음 앞에서 태연하게 버티려고 애쓰던 속마음을 끝내 털어놓는다. 그리고 그 사랑을 그의 방식으로 지켜낸다. “인생에는 원래 두려움이 붙어 다니기 마련이니까.”(p.33)라며 자신을 다독일 줄 아는 모모. 그럼에도 이 소년을 마음 편히 응원할 수 없다. 책의 맺음말 이후 그의 앞에 놓인 생은 ‘외로움’이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다른 사랑이 되도록이면 빨리 찾아오길 기도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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