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한산성』 (김훈, 학고재, 2017)
소설은 작가가 지어낸 이야기다. 소설 속 인물과 독자는 작가의 ‘상상’이라는 다리를 통해 만난다. 이해할 수 없는 인물이 나오더라도 ‘이건, 작가의 상상이야’라는 안도감에 독자는 소설과 일정한 거리감을 갖는다. 독자와 직접적인 관련이 없는 허구 인물에 대한 이야기는 수용이 비교적 쉽다. 그러나 역사를 토대로 한 작품은 ‘객관’이란 필터가 붙어 논쟁거리가 된다. 사실에 근접한가에 대한 판단을 시작으로 ‘역사적으로 어떻게 평가해야 하는가?’란 역사관까지 더해져 다툼이 끊이지 않는다. 그러나 이러한 다툼으로 인해 소설로 만들어지지 않는다면 어찌 될까? 하나의 작품이 '역사적 사실과 평가와 다름'의 이유로 사장되는 것보다 처음부터 창작되지 못하는 ‘침묵’이 더 두렵다. 역사를 소재로 한 소설도 상상력의 범주 안에 있으며, 상상으로 펼쳐내는 다양한 인생의 모습과 견해를 독자의 삶에 어우르는 데 있어 소설의 기여도가 상당하기 때문이다.
그간 들여다보지 못했던 역사의 부분을 재조명하는 데 성공한 소설이 있다. 김훈의 『남한산성』 (학고재, 2017)이다. 이 소설은 1636년(인조 14년)에 일어난 병자호란을 배경으로 한다. 2017년에는 10년 간 100쇄를 기록하여 아트 에디션으로 재발행되었다. 인기를 증명하듯 영화로도 제작되어 다른 견해를 가진 두 인물(김상헌, 최명길)이 언론에 집중되기도 했다. 마치 그들이 현재 살아있는 정치인 인양 기사화되고 수많은 댓글의 주인공이 되었다. 2017년은 김훈 작가에게 의미가 남달랐을 것이다.
김훈은 언어로 그림을 그리는 작가다. 그의 문장은 스케치 수준이 아닌 미세한 펜으로 그린 정밀묘사에 가깝다. 인물의 감정을 직접 대놓고 가르쳐 주지 않으며 기교적 표현도 없다. 분명하고 촘촘하게 묘사할 뿐이다. “성안의 시간은 빛과 그림자에 실려 있었다. 아침에는 서장대 뒤쪽 소나무 숲이 밝았고, 저녁에는 동장대 쪽 성벽이 붉었다. 빛들은 차갑고 가벼웠다. (…) 해가 중천에서 기울기 시작하면 밝음의 자리와 어둠의 자리가 엇갈리면서 북장대 쪽 골짜기에 어둠이 고였다.”(p,214) ‘빛’이란 글자가 순식간에 떠올라 3D 입체의 홀로그램 영상으로 바뀌어 오감을 작동케 한다. 시간과 공간의 이동에 따라 바뀌는 빛의 색을 보고 성벽의 붙은 빛의 질량을 느끼며 얼음 같이 날카로운 공기를 호흡한다. 문자가 표현할 수 없는 글자 사이의 틈새까지 언어로 메우는 능력은 언어 고유의 한계를 시험하는 듯하다.
『남한산성』은 ‘명나라’와의 신의를 지켜 대의와 명분을 따르자는 기존 질서에 대해 질문한다. ‘명’을 아버지의 나라로 모시든 ‘청’의 무자비하고 잔인한 요구를 받들든 두 나라와 대등한 위치에 있지 못하는 것은 같다. 그러느니 치욕을 견디고 살아있는 것을 택해야 함을 ‘끼니’로 묘사해 보여준다. ‘생’의 절실함을 역설하는 것이다. 보리밥 한 그릇에 뜨거운 간장 국물 한 대접을 마시고 캄캄한 성첩으로 오르는 군병, 그들에게 개를 잡아 뜨거운 국물에 조밥을 말아 한 그릇씩 먹인 노파, 대한이 지나자 성안에 개 짖는 소리가 끊겼다는 구절에선 전쟁으로 점점 궁핍해지는 참혹을 체험한다. 인간의 삶은 포만에 웃고 공복에 운다. 그저 생을 잇는 존재임을 확인한다.
한 국가의 대의를 결정지어야 할 조정의 모습 또한 역설이다. 어느 내관이 빙고에서 ‘밴댕이 젓’ 한 독을 찾았다며 임금에게 분배 대상과 방법에 대해 묻는다. 이는 ‘전쟁’이란 위급한 상황에 임금과 나눌 논제로 적절하지 않아 보이나 이 또한 먹을 것이 귀한 전쟁의 참상으로 이해한다. 부마는 빼더라도 후궁까지는 보내라는 임금, 밴댕이를 토막 치는 게 어떨지 궁리하는 신하의 모습이 답답하다 못해 처연하기까지 하다. 적을 물리치기 위한 방법으로 성첩에 돌을 모으던 중 ‘백성들이 잔돌만 줍고 있으니 돌의 굵기를 단속해 달라’는 청은 잔망스러워 임금의 자리가 무색할 지경이다. 성 안의 빈곤한 것은 먹을 것만이 아니었다. 책임을 떠안는 이 또한 드물었다. 임금 한 사람에 의존해 사는 인생 또한 애달파 보이긴 마찬가지다.
한 나라 백성의 마음을 지키지 못한 치욕은 어떠한가. 정명수는 극천의 세습 노비로 태어났다. ‘나라’를 버려야 살길이 있음을 알 정도로 직감이 뛰어나고 눈치로 단련된 예민한 총기를 가진 이다. 여진 말과 몽고말을 배워 청의 용골대 통역사로 일한다. “먹고살며 가두고 때리는 일에 귀천이 있었던”(p.248) 나라에 대한 복수심은 그를 모진 냉혈한으로 만들었다. 말과 행동은 남한산성의 혹한보다 더 서늘했다. 그의 마음에 온정을 심어주지 못한 참담한 운명이 안타깝다. 그가 전쟁 패배에 일조했음에도 “나는 그가 악독한 만큼 가엾다.”(p.425)는 작가의 말에 수긍이 쉽다. 왕이 머리를 조아려 패배를 인정하는 것은 제 백성을 제대로 거두지 못함에 비하면 오히려 떳떳하다. 가까운 것을 도리어 알아보지 못하도록 하는 신분제도가 어리석을 뿐이다.
『남한산성』은 스스로 가라앉는 배다. 전쟁을 통해 적이 바라는 것은 무엇일까? 무력 대응을 통한 극적인 승리는 자국에도 희생이 따른다. 가장 쉽게 이기는 방법은 압박을 통해 내부 분열을 일으켜 스스로 망하게 하는 것이다. 청의 ‘칸’은 이를 너무나 잘 이용했다. 그 과정에서 명나라와의 의리를 지켜 대의를 이루겠다는 김상헌과 청의 요구에 응해 삶을 택하자는 최명길의 주장은 사실 애국하는 마음에선 다를 바가 없다. 왕의 결심은 더디었고 급기야 사대부들은 최명길을 죽이자는 편과 진작 청의 요구를 들어야 했다는 편으로 갈라졌다. 일반적이지 않는 전시 상황에서 가장 시급한 건 재빠른 대처다. “칸은 이 무력하고 고집 세며 수줍고 꽉 막힌 나라의 아둔함을 깊이 근심하였다.”(p.285) 내분으로 인한 산성 밖의 침묵은 적을 근심시킬 상황에까지 이른다. 산성 밖에서 이를 지켜보는 독자는 산성 안의 인물을 통해 산성의 균열을 감지한다.
남한산성은 인간의 삶을 가로막는 것을 상징한다. 무장한 적보다 무서운 것은 저항할 수 없는 무력감이었다. 산성에서 버티면 굶어 죽고, 나가면 포탄에 의해 죽는 상황에서 어떠한 결정도 쉽게 내리지 못하는 ‘무력감’은 주체적 삶을 가로막았고 인간을 시들게 했다. “강한 자가 약한 자에게 못할 짓이 없고, 약한 자 또한 살아남기 위하여 못 할 짓이 없는 것이옵니다.”(p.366)라고 읍소 하는 최명길이 돋보이는 건 명분보다 실리를 주장해서가 아니다. 그러한 무력감을 깨우는 일침이기 때문이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의 임금에게 노를 건네어 가라앉는 배를 구하려는 시도였다.
이 책은 대한민국이라는 테두리 안에 운명공동체로 만난 우리에게 당면한 일에 대해 당면하고 있는지를 묻는다. 시대가 바뀌어 이젠 왕이 아닌 모든 국민이 주권을 가지게 되었다. 보호하고 책임져야 할 대상이 있고 선택할 수 있는 권리가 있다면 행동해야 한다. 감수해야 할 치욕이라면 각오해야 한다. 단, 그것이 남에게 보이는 데 있어 창피함인지, 책임져야 할 대상을 제대로 거두지 못해 생긴 수치심인지를 구분해야 한다. 그것이 삶을 가로막는 성을 여는 열쇠이자 책임의 다른 말이다. 열쇠는 주권을 가진 모두에게 있다. 일독을 권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