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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살리고 살리고 Jan 14. 2018

끈기 없는 나를 위해

[마흔의 일기]

   

난 왜 끈기가 없을까. 별다른 기대 없이 남편에게 물었다. “찹쌀로 밥을 지어먹어보면 어때?” 3초의 정적이 흐른 후 빵 터졌다. 그럼 끈기가 생길지도 모른다나? 허허허. 웃었지만 맘은 아리었다. 그렇게 해서 끈기가 생긴다면 죽을 때까지 찹쌀밥, 찹쌀떡, 찹쌀도넛, 찰떡 아이스, 찰 호떡을 매일 먹어도 그간 고열량 탄수화물 위주로 단련된 몸은 기꺼이 감당해낼 것이다.

    

사십 인생에 오래 한 게 있나 생각해도 밥벌이로 다닌 직장생활 10년이 고작이다. 육아휴직으로 2년 쉬었으니 실제 워킹 데이는 8년. 육아를 위해 떠난 지 꼬박 3년이 지났으니 앞으로 자식의 하교시간이 남편 퇴근만큼 늦어지는 때가 올 때까지 10년이라 치면, 전업주부로서의 시간이 그 시간을 곧 추월하지 않을까. 

   

전업주부는 오래 할 수 있을까 두려움이 생기기 시작한다. 사는데 무리는 없다. 사람들에 부딪혀 상처받거나 일로써 드는 긴장감도 없다. 혼자 있는 시간도 제공되고 육아가 익숙해지니 취미생활도 누린다. 돈을 벌어야 한다는 책임감에서 벗어나니 세상 편하다. 사랑하는 아이들과 오랜 시간 함께 할 수 있어 무엇보다 좋다. 따져보면 이렇게 좋은 직업이 없다. 그런데 시간이 갈수록 불안감이 든다. 반복되는 일상이 무료하고 지루하다. 직장생활의 스트레스에 비하면 천국이라 여기면서도 빈 방에 홀로 있는 듯 고립된 불안감이 따름은 어쩔 수 없다. 아무리 닦아도 밀리기만 할 뿐 잘 털어지지 않는 먼지 같다. 과거는 역기를 내리지 못하는 역도선수의 삶이었다. 스트레스가 갈수록 무거워져 가까스로 버텼다. 역기에 비하면 먼지가 낫다. 상대적이며 자위적 위안을 하는 수밖에. 

   

한국에서 가장 약속잡기 힘든 사람이 ‘40대 남성’이라 할 만큼 40대의 남편을 둔 나는 남편 얼굴보다 아이 친구의 엄마를 더 자주 본다. 남편이 일찍 퇴근해주길 바라는 건 나 대신 아이를 봐달라는 게 아니다. 아이의 눈높이와 아이의 언어에서 벗어나 내 언어로 내 세상을 남편과 나눠 무료함을 씻고 싶은 욕구에서 비롯된 요구다. 남편은 고민이 있으면 동굴로 들어간다. 다 정리한 후 나와 술을 사이에 두고 정리된 고민의 과정을 이야기하는 걸 좋아해 주니 그나마 다행이다. 어렸을 땐 동굴을 보지 못했는데 이제는 그 기다림의 시간을 알게 되었다. 시간이 준 선물이다.

    

전업주부를 오래 할 생각은 없다. 무료한 시간과 다투며 나태해지는 나를 볼 자신이 없어서다. 그렇다고 딱히 어떤 꿈을 갖기도 힘들다. 다시 경력을 이을 기회가 생긴다고 해도 사십이 넘은 여성인력에게 주어지는 기회란 이전 직장의 연봉과 근로조건을 넘어설 수 없는 현실을 잘 안다. 늙었고 배도 불렀다. 다양한 사람들의 예상할 수 없는 행동에 대한 면역체는 늘어난 데 비해 소신과 용기가 늘었다. 그냥 지나쳐지지 않는 문제에 대해 속으로 생각하던 것을 내뱉어내고야 만다. 이젠 스트레스를 주게 생겼다. 사회생활은 무리겠다.

   

난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끈기도 없는데 반복된 일상을 해내야 하는 나는 꿈도 없는데. 눈이 펑펑 오는 명절 전날의 고속도로나 출퇴근길 몇 건의 접촉사고로 꽉 막힌 올림픽대로에 갇힌 차 속에 있는 답답함은 목적지가 있기에 얼마든 견딜 수 있다. 전업주부는 목적지가 없다. 아이들의 성장? 남편의 승진? 가늠할 수도 없고 정량화할 수 없는 가정의 행복? 아님 피스(Peace)? 이것은 나의 목적이 아니다. 가족 전체가 바라는 그림이다. 

    

답이 없는 고민을 계속할 내가 아니다. 그것도 끈기가 있어야 할 수 있다. 그냥 이 시간을 파보기로 했다. 틈틈이 좋아하는 책을 읽고, 글을 쓰는 것으로. 얼마 전 재미 삼아 타로를 봤다. 선배 언니가 타로를 배웠다며 봐주겠다고 했다. ‘글쓰기를 계속하면 어떨까?’에 대한 답으로 노예에서 벗어나는 카드를 펼쳤다. 그땐 돈이 되는 다른 공부를 시작하자고 결론을 내렸는데 시간이 흐르니 그 카드가 정답이다. 시간은 내 젊음을 가져가는 대신 반드시 무언가는 내놓는다.  

  

‘희생’은 전업주부의 덕목이다. 자연히 나 자신이 배제될 수밖에 없다. ‘노예에서 벗어난 삶’, 구속과 억압으로부터 벗어난 나의 광복은 나 자신을 살리는 일이어야 한다. 좋아하는 일로 내 시간을 파는 것. 여태껏 목표한 바를 이루기 위해 살았는데 그것 없이 살 수 있는 기회기도 하다. 남편 월급에 무임승차했지만 ‘희생’을 지불했다. 40년간 목표한 바를 이루기 위한 삶을 살았다. 피곤하다. 앞으로 남은 삶은 내가 하는 일이 곧 목적이 될 것이다. 목적이 내 삶 속에 들어오니 ‘골인(Goal in)’이다. (합리화의 달인이 된다. 이 또한 시간의 선물인가?) 

   

여전히 끈기는 없다. 그러니 멀리 보지 말고 하루를 살자. 나 자신에게 느끼는 실망을 조금이라도 줄이기 위해 지금 여기, 하는 일에 최선을 다하자. 그것만큼 훌륭한 인생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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