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색 인간』(김동식, 요다, 2018)
마을에 독서토론 모임이 있다. 『회색 인간』(김동식, 요다, 2018)을 주제로 10명 남짓 모였다. 신변잡담으로 흐르는 수다 모임이 아니다. 책을 읽고 자유 논제 및 찬반 논제를 출제하여 별점부터 토론 후기까지 형식을 갖추어 생각을 나누는 수준 있는 독서토론회다. 각자의 생각을 들고 앉아 물음표를 그리고 고개를 끄덕이는 동안 미세먼지가 장악한 회색도시의 회색 인간들이 각자 또렷한 컬러를 가진 존재로 되살아나는 느낌이 들었다. 『회색 인간』은 그런 책이다.
총평 중 압권은 ‘문학계의 서태지 등장’이다. 김동식 작가를 표현한 말이었다. 짧은 단편임에 반해 충격적인 스토리 전개, 뒤통수치는 반전, 깔끔한 결말, 보여주는 소설이 아닌 말해주는 소설, 가요계의 서태지의 등장과 같이 지금껏 없던 획기적인 소설임에는 누구도 반박하기 어려우리라.
1990년대 서태지의 등장은 충격이었다. 사랑을 주제로 한 아름다운 발라드 가수들의 인기가 한창일 때 등장한 서태지는 파격이었다. 게다가 고등학교를 중퇴하다니! 그가 10대의 나이에 메탈 밴드의 대표주자인 시나위의 베이시스트로 활약한 배경을 두고서도 뛰어난 음악적 실력보다 학교도 안 다니는 긴 머리 날라리 소년이라는 보수적인 시선이 더 우세했다. 당시 획일적인 교육 문제를 비판하는 ‘교실이데아’, 한반도의 평화를 노래한 ‘하여가’등, 높은 인기에 아랑곳하지 않고 사회 곳곳의 문제를 비판하는 노래를 작사 작곡한 연주가 겸 싱어송라이터임에도 불구하고 ‘중퇴자’란 배경을 두고 그를 끌어내리거나 또는 우상화하기에 바빴다.
김동식은 이제 막 책을 냈다. 그의 이력이 눈에 띈다. “주물공장에서 일했던 노동자요, 지금까지 읽은 책은 10권에 불과하오, <오늘의 유머>란 사이트에 글을 올려 댓글을 스승 삼아 공부했소. 어떻소? 이런 그가 이렇게 참신한 소설을 썼다오. 참 대단하지 않소?” 그의 반전 인생을 이용한 마케팅을 인터뷰나 기사를 통해 들이댄다.
이러한 홍보가 한마디로 불편하다. 그를 서태지와 동일선상에 둔 이유는 서태지가 중퇴자고 김동식이 노동자에서 작가로 전향한 인물 이여서가 아니다. 서태지가 ‘아이돌’의 탈을 쓰고 예측할 수 없는 변주에 맞춰 댄스를 추지만 가사는 무거운 사회문제를 다뤘던 것처럼, 김동식은 인터넷 용어란 쉬운 문장으로 인간의 욕망과 사회 곳곳의 문제를 꼬집고 있기 때문이다. 그때나 지금이나 그들이 예술로 세상에 내놓은 작품보다 예술가의 배경을 중요시하는 구태의연함은 여전하다. 본질을 흐리는 극적 드라마를 경계해야 하는 이유다.
『회색 인간』은 문학계의 센세이션을 일으킨 소설임에는 틀림없다. 쉽고 간결하며 내용이 명확하다. 누구나 할법한 상상의 한계를 뛰어넘는다. 그렇다고 내용이 가볍지만도 않다. ‘우리에게 진정한 평등은 무엇인가?’, ‘왜 사람들은 소수자를 욕하는가?’, ‘획일적인 사회의 인간을 살릴 수 있는 일은 무엇인가?’, ‘이분법적인 사고 계속하면 그러한 사고로 인해 뒤통수 맞는다’, ‘인간아, 언제까지 욕망할래?’등. 어려워서 꺼내고 싶지 않지만 반드시 고민하고 함께 풀어야 할 문제를 제기한다. 현대판 우화다.
여성 평화학 연구자 정희진은 자신의 책(『정희진처럼 읽기』)에서 “공부를 잘하는 방법? 지적으로, 정치적으로 빼어난 글을 쓰는 방법? 책상에 여덟 시간 이상 앉아 있을 수 있는 몸이 첫째다.”라고 지적했다. 공부와 노동은 동일하다는 뜻이다. 작가 또한 노동자다. 김동식을 보는 우리의 시선은 노동과 공부의 격차가 있길 바라는 마음에서 출발한다. 김동식은 주물공장에서 이미 글 쓰는 작가가 갖춰야 할 소양의 절반 이상을 이뤄냈다. 공장 노동자에서 소설가로의 전향은 극적 드라마가 아닌 충분히 예상 가능한 결과다. 다음 작품이 벌써 기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