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살리고 살리고 Jul 19. 2018

‘자본주의’ 위의 집

『변신』(프란츠 카프카, 문학동네, 2018)


‘집’은 과연 ‘안식처’일까? ‘가족’은 과연 ‘사랑’일까? 흔히 가정을 그렇게 표현한다. 누군가에겐 따뜻한, 쉴 수 있는, 편안함의 단어가 허락되기도 하지만 어떤 이에겐 고달프고, 무겁고, 지긋지긋한 공간일 수도 있겠다.
   
프란츠 카프카의 『변신』(문학동네, 2018)은 한 인간이 하루아침에 갑충이 되어 겪는 스릴러나 공포물이 아니다. 우리 시대의 흔한 가정의 모습, 정확히 말해 모든 가치를 ‘돈’에 기준 삼아 벌어지는 결과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재연 드라마’라고나 할까. ‘인간’이 ‘벌레’가 된 과학적 근거를 궁금해할 겨를이 없다. 가족이 오히려 더 냉혹할 수 있다는 진실을 대면하게 한다. 그 과정을 표현한 ‘리얼리티’가 시쳇말로 ‘쩐다’.
   
어느 날, 해외 영업을 하여 가족을 먹여 살리던 그레고르가 자고 일어나니 ‘갑충’으로 변했다. 아버지의 빚을 갚는 것을 보람으로 여기고 여동생을 음악원에 보내기 위해 돈을 버는 것을 낙으로 살았다. 그래서일까. 벌레가 된 자신보다 이들을 더 이상 도울 수 없는 것에 더 괴로워한다. 이쯤 되면 독자는 당연히 가족들이 그레고르의 모습을 안타깝고 슬퍼하며 어떻게든 도울 것이라 기대하기 마련이다. 
   
그러나 웬걸. 더 이상 돈을 벌 수 없는 그레고르를 인정해가는 가족들의 모습은 분노를 넘어 참담하기까지 하다. 사업으로 진 빚을 두고도 좋지 않은 건강을 이유로 일하지 않았던 아버지는 몰래 모아두었던 투자금을 찾고 직업을 구했다. 벌레로 변한 그레고르에게 먹을 것을 갖다 주며 관심을 보였던 여동생은 어느 순간부터 진짜 ‘벌레’ 취급을 하더니 급기야 “우리가 저것에서 벗어나야 한다.”(p.111)며 생명체 취급조차 하지 않는다. 벌레 이전에 그레고르는 가족에게 그저 돈이 필요할 때마다 쪽쪽 빨리는 ‘빨대’였음이 드러난 것이다.

여기서 퀴즈. 벌레 이전의 그레고르와 이후의 그레고르의 공통점은 무엇일까? ‘빨대’에서 ‘벌레’로 변신했을 뿐, 단 한 번도 ‘그레고르’로 인정받은 적이 없다는 점이다.
   
프랑스 철학자 ‘가브 리엥 마르쉘’은 이렇게 말했다. “인간이 인간이기 위해서는 ‘가족적’이어야 한다.”* 즉, 사람이 가진 성격, 재산, 외모, 직업 등과 같이 그가 소유한 무엇에서 벗어나 ‘존재’ 자체로 인정받을 수 있는 최초의 관계가 가족인 것이다. 존재가 아닌 인간이 소유한 것으로 재단하고 판단하는 인간은 어쩌면 벌레와 별반 다르지 않다고 이 책은 말한다.
     
이 책은 ‘존재’의 가치를 두지 못한 채 소유의 언어로 살고 있는 우리에게 강력한 일침을 준다. 적어도 가정에서만큼은 ‘존재’ 자체로 인정하고 사랑해야 한다고, 돈보다 사람의 존재 가치가 더 높다고 알려준다. 만약 가정에서 “너 학원 보내는 돈이 얼만데 놀고 있니? 공부해!”라고 말한 경험이 있는 분, 또는 일터에서 집으로 돌아온 아버지를 보는 둥 마는 둥 인사도 없이 지내고 있는 분께 반드시 일독을 권한다. 
   
결국 벌레가 된 그레고르는 어떻게 될까? 다시 ‘사람’으로 변신할 수 있을까? 아니면 가족들의 따돌림을 견디지 못해 가출에 성공한 후 순수한 ‘벌레’로서의 삶을 살까? 100여 년 전, 카프카는 이 땅 위의 집이 결코 ‘안식처’가 될 수 없음을 예견했다. 개인의 이익이 기준인 자본주의 위의 집은 그래서 여전히 위태롭다. 

*『철학카페에서 문학 읽기』(김용규, 웅진 지식하우스, 2015)에서 참고.                                                    

매거진의 이전글 위험한 책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