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내를 모자로 착각한 남자』(올리버 색스, 알마, 2018)
암환자가 있다. 방광암. 수술로 암 조직을 떼어 낸 후 주기적으로 관찰 중이었다. 어느 날 폐로 전이됨을 알게 된다. 수술로 제거할 수 없는 상태. 항암을 해야 한다. 환자는 비뇨기과 의사에서 혈액종양내과의 방광암 전문의로 옮겨진다. 암세포를 죽이기 위해 항암을 실시한다. 방사선도 쬔다. 암세포는 작아졌지만 환자는 영양실조로 병원에 입원한다. 면역력이 극도로 약해져 생을 마감한다. 그의 사인은 애초의 방광암도, 전이된 폐암도 아니다. 폐렴이었다.
이 과정에서 만난 의사들은 모두 분야별 최고 전문가였다. 전문화, 세분화, 분업화된 병원의 시스템은 완벽했다. 그러나 환자는 온전하지 못했다. 그들은 너무나 전문적인 나머지 암세포를 죽이는 데만 온 힘을 기울였다. 아무것도 먹지 못한다는 환자의 말을 들어주거나 바짝 메말라가는 모습을 눈여겨본 의사는 없었다. 전문은 곧 분업이다. ‘먹지 못하는 것’은 그들의 분야가 아니었다.
위 사례에 공감하는 독자라면 이들에게 ‘희망’과 ‘위안’을 주는 책이 있다. 『아내를 모자로 착각한 남자』(올리버 색스, 알마, 2018)다. 올리버 색스는 영국 태생의 미국에서 활동하는 신경과 의사다. 이 책은 연구 사례를 담은 보고서지만 딱딱한 논문이 아니다. 여러 감동적인 이야기의 모음집이다. 그는 ‘병’을 이야기하지 않는다. 그가 진료하는 환자들이 그의 책을 통해 삶을 이야기한다. 그것이 이 책의 강력한 힘이다.
이 책이 문학적 힘을 갖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 아내를 모자로 착각한 남편의 사례를 담은 표제작과 같이 환자가 경험한 구체적 상황이 글에 녹아있다. 병을 안고 살아가는 환자의 갖가지 우여곡절과 희로애락이 담겨있다. 의학적 원인 및 소견(도 있지만)이 중심이 아니다. 질병이 삶의 일부가 된 과정을 차곡차곡 쌓아 기록해 두었다. 저자는 ‘질병만 치료하면 임무 끝’이 아닌 ‘질병을 안고 사는 사람들에게 더 좋은 삶은 무엇일까?’라며 ‘생’(生)을 질문한다.
저자는 ‘특이함’을 ‘특별함’으로 둔갑시킨다. 시각을 담당하는 뇌 부분에 이상이 생겼지만 음악을 가르칠 때만큼은 전혀 다르다. ‘인식 불능증’이라고 인식할 수 없을 정도로 음악을 제대로 이해하고 가르치는 음악교수, 발작을 통해 어렸을 적 기억을 되찾아 심리적인 안정과 현실감을 얻은 C부인, 자폐증을 겪지만 예술 분야나 숫자 등에 특수한 재능을 보여주는 사람들의 이야기 등이 그렇다.
가끔은 상식도 뒤엎는다. 환자들이 일반인보다 분별력 있게 판단을 하는 경우다. 「대통령의 연설」은 언어상실증과 음색 인식 불능증 환자에 대한 이야기다. 단어는 인식하지 못하지만 말하는 사람의 표정을 읽어 어떤 말을 하는지 파악할 수 있는 언어상실증 환자가 있다. 이와 반대로 음색 인식 불능증 환자는 언어에 대한 감각은 대단하지만 목소리에 담긴 감정을 판단할 수 있는 능력을 상실한 환자다. 이들은 모두 대통령의 연설을 듣고 감동하지 않았다. 언어상실증 환자는 거짓말이라며 폭소를 터뜨렸고 음색 인식 불능증 환자는 문장이 엉망이고 조리도 없다며 비난했다. 그렇지만 정상인은 대부분 쉽게 잘 속아 넘어간다.
“이것이야 말로 대통령 연설의 패러독스였다. 우리 정상인들은 마음속 어딘가에 속고 싶다는 바람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실제로 잘 속아 넘어간다. (‘인간은 속이려는 욕망이 있기 때문에 속는다.’) 음색을 교묘한 말솜씨를 발휘할 때 뇌에 장애를 가진 사람들 빼고는 전부 다 속아 넘어간 것은 바로 그 때문이었다.”(p.151)
다양한 환자들의 삶을 통해 세상에 쓸모없는 것은 없음을 서서히 깨닫게 된다. 수학에서 계산을 전혀 할 수 없는 한 자폐 소년이 있다. 과학적으로는 도저히 설명할 수 없는 방법으로 소수(素數, 1과 그 수 이외의 자연수로 나눠지지 않는 수)를 알아맞힌다. 원래 기억 속에 내재되어 있는 건지, 직관인지 알 수 없다. 그는 숫자가 보인다고 말한다. 그가 말했다. “소수(素數)야 말로 또 다른 세계를 향해 열려있는 창문인 것입니다.”(p.351)
소수(素數)를 ‘적은 수효’의 뜻을 지닌 소수(少數)로 바꾸어 보면 어떨까. 소수자인 그들이야 말로 또 다른 세계를 향해 열려있는 창문이 아닐까? 사회화된 인간 표준에 가깝도록 ‘과잉’은 싹둑 잘라내고 ‘부족’은 채워 규격화하지 않는다면, 모양부터 살펴 특별한 점에 주목한다면 어떨까. 그들은 기꺼이 또 다른 세계로 가는 창문을 열어주는 안내자가 될 것이다.
부분에만 집중하기보다 전체를 놓고 문제를 볼 줄 아는 시야를 가져야 한다. 그러기 위해 진짜 문제가 무엇인지 고민해야 한다. 문제라고 생각되는 것이 달리 보면 문제가 아닐 수도, 아닐 때도 있다. 대부분의 문제는 문제가 무엇인지 모른다는 사실을 ‘모르는 것’에 있다. 도통 모르겠다면 하나만 기억해두자. 환자의 ‘삶’을 우선했던 ‘올리버 색스’처럼. ‘사람이 먼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