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속죄』(이언 매큐언, 문학동네, 2017년)
『속죄』(이언 매큐언, 문학동네, 2017년)를 한 문장으로 요약해서 알려달라는 남편의 질문에 쉽게 답하지 못했다. 철없는 아이의 거짓말이 부른 남녀의 파멸에 대한 이야기라 얼버무렸다. 책날개에 있는 책 소개를 참고한 것이다. 하지만 ‘거짓말에 의한 파멸’과 같이 인과관계가 딱 떨어지는 이야기라면 소설보다는 유아도서 혹은 막장드라마로 분류되어야 마땅하다. 삶은 그토록 호락호락하지도 단순하지도 않다.
브리오니는 13살, 부잣집 막내딸이다. 어느 날 언니(세실리아)와 파출부의 아들(로비)이 분수대 연못가에 있는 모습을 멀리서 보게 된다. 로비가 세실리아에게 구애를 한다고 생각한다. 예상과 달리, 세실리아는 갑자기 옷을 벗더니 속옷 차림으로 코를 막고 연못에 들어가 한참 후에 수면 위로 나온다. 연못 밖으로 나온 세실리아는 옷을 입은 후 꽃병을 들고 집으로 향한다. 브리오니는 상황을 이해하지 못하면서도 로비가 회심의 미소를 짓고 있을 게 분명하다고 추측한다.
로비는 연못에서의 일을 회상하며 타자기 앞에 앉는다. 자신의 실수로 깨진 꽃병, 그 조각을 줍기 위해 연못에 들어간 세실리아에게 사과의 편지를 쓰기 위해서다. 사과 끝에 진심을 담았다. “꿈속에서 난 너의 보지에, 너의 그 부드럽고 젖어 있는 보지에 키스를 해. 상상 속에서 난 하루 종일 너와 사랑을 나눠”(p.126) 이 부분을 차마 전달할 수 없어 손 글씨로 다시 사과의 내용만 담았다. 그리고는 브리오니에게 전달해달라고 한다. 브리오니가 편지를 들고 뛰어가는 순간, 깨닫는다. 오해의 소지가 가득한 첫 번째 편지를 봉투에 담았다는 사실을.
브리오니는 그 편지를 몰래 뜯어보고 충격을 받는다. 설상가상으로 로비와 세실리아가 서재에서 몰래 사랑을 나누는 장면을 목격한다. 벽에 붙어 있는 세실리아와 그녀에게 더 밀착한 로비. 숨소리도 거칠다. 브리오니는 로비는 위험한 사람이라 확신한다. 사촌 언니인 롤라가 성폭행을 당한 밤, 유일한 목격자인 브리오니는 자신의 짐작을 현실화시키고 만다. 로비가 범인이라고 증언하여 로비는 감옥에 가게 되고 세실리아와의 사랑은 격정의 상태에서 그대로 중지된다. 손에 땀을 쥐게 하는 스토리 전개와 섬세한 감정 묘사로 인해 머리와 심장에 종이 쉼 없이 울린다. 여기까지가 총 3부 중 1부다.
3년이 지났다. 그들은 더 최악의 상황을 맞는다. 제2차 세계대전이 일어난 것이다. 로비는 감옥에서 3년을 보낸 뒤 참전을 선택하여 매일을 죽음과 싸운다. 갖은 고초를 겪은 후 고국으로 가는 배를 타기 전날 밤, 꿈과 망상 사이를 허우적대다 자신을 돌아본다. “우리는 매일 서로의 죄를 목격하면서 살고 있다. 아무도 죽이지 않았다고? 그렇다면 죽게 내버려둔 적도 없는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죽게 내버려두었나?”(p.369) 브리오니를 용서하지 않겠다던 결심이 희미해지는 순간이다. 죄는 돌이킬 수 없다. 그러나 인간은 상황에 따라, 우연에 의해, 운명과 의지가 삶과 뒤섞여 이처럼 달라진다.
브리오니는 죄를 지었다. 그 죄로 인해 로비는 구속, 전쟁, 이별 등을 겪었다. 세실리아 또한 사랑하는 사람과 가족을 잃었다. 어떤 행동으로도 그들의 삶을 돌이킬 수 없다. 따라서 죄를 씻는 것은 불가능하다. 지나간 시간을 무슨 수로 되돌린단 말인가. 브리오니는 로비에게 속죄하는 마음으로 전쟁 부상자들을 돕는 간호 보조의 삶을 살지만 이는 고통의 원 플러스 원(1+1) 일뿐이다. 죄는 돌이킬 수도, 씻어낼 수도 없다는 사실에 대한 자각만이 속죄의 유일한 가능성이다. 그 자각이 앞으로 나아가게 한다. 살아 있는 존재로서 차츰 나아가다 보면 예상치 못한 새로운 창이 열린다. 때로는 희망이 기다리고 있기도 하다.
“사람을 불행에 빠뜨리는 것은 사악함과 음모만이 아니었다. 혼동과 오해. 그리고 무엇보다도 다른 사람들 역시 우리 자신과 마찬가지로 살아 있는 똑같은 존재라는 단순한 진리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 불행을 부른다. 그리고 오직 소설 속에서만 타인의 마음속으로 들어가 모든 마음이 똑같이 소중하다는 사실을 보여줄 수 있었다. 이것이 소설이 지녀야 할 유일한 교훈이었다.”(p.67)
나는 이 소설을 통해 브리오니, 로비, 세실리아의 마음속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그들의 마음이 모두 똑같이 소중해서 숨 막히는 고통을 경험했다. 브리오니에게 분노하던 내가 용서의 카드를 만지작거리게 만든 2, 3부의 전개도 만만치 않으니 반드시 읽어보시길 권한다. 영화 ≪어톤먼트, Atonement≫를 통해서도 확인이 가능하다. 소설을 영화화한 것 중 원작에 가장 충실하다. 반전을 거듭한다. 브리오니가 거짓말을 하게 된 진짜 이유도 따로 있다. 격정의 순간에 정지된 로비와 세실리아의 사랑은 다시 ‘재생(replay)’될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