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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살리고 살리고 Nov 22. 2018

개인에게 광장이 되라고 하지 마라.

『광장』(최인훈, 문학과지성사, 2015) 그리고『아픔이 길이 되려면』

 이토록 무거운 주제를 아름다운 문장에 넣어 수십 년 간 이어온 보물 같은 책. 도서관, 서점, 중고 책방, 서재, 또는 교과서, 심지어 수능 문제의 국어 지문으로 수 백, 수 천만의 사람들이 읽었을 책. 나의 조악한 문장으로 서평을 쓰는 것이 오히려 독이 되는 건 아닐까, 그의 문장을 얼룩지게 만드는 건 아닐까.

     

 최인훈의 『광장』(문학과지성사, 2015)은 분단 이데올로기를 산 이명준의 이야기다. 명준이 태어난 남한은 자유주의를 택했다. 그러나 명준의 아버지는 월북했고, 명준은 빨갱이 자식으로 주홍글씨가 붙었다. 명준은 어쩔 수 없이 월북하여 새로운 삶을 꿈꾼다. 그러나 그곳은 체제를 맹목 하다 보니 혁명은 없고 ‘스탈리니즘’이란 새로운 종교만 남았다. 그가 꿈꾼 사회는 어디에도 없었다. 

    

 남한과 북한에는 그가 각각 사랑한 여성도 등장한다. 명준은 텅 빈 남한의 광장에서 외로울 때 윤애와 사랑을 나누며 버텼다. 북한의 광장은 복종 아니면 자아비판이란 양자택일만이 존재한다. 그곳에서 명준은 은혜를 통해 자신의 비굴함을 용서했다. 사랑이란 밀실에서 위로받을 수 있었던 것이다. 불온전한 광장에 놓인 명준에게 사랑의 밀실이 없는 것은 상상하기 힘들다. 사랑의 밀실은 곧 그의 숨구멍이었다.

       

 이제 분단은 더 이상 정치적 이데올로기의 문제가 아니다. 분단은 남·북한 체제를 유지하기 위한 통치수단이 되었다. 북쪽은 김 씨 일가가 장악했고, 남한은 대의민주주의란 감투를 뒤집어쓰고 자본을 숭배하는 나라가 되었다. 분단은 이제 없어서는 안 되는 도구다. 이명준의 광장은 지금에 보니 도리어 순수한 것 아닌가.

     

 저자의 의도가 어떻든지 간에 독자는 자신의 삶만큼만 해석할 수밖에 없다. 수십 년이 지난 지금의 우리 삶도 지난 과거에서 몇 보도 나아가지 못했다. 오히려 남쪽의 한국은 사회가 개인을 보호해 주지 않기로 작심한 듯하다. ‘쌍용자동차 해고’, ‘삼성반도체 직업병’, ‘소방공무원의 인권’, ‘가습기 살균제 사건’, ‘세월호 참사’ 등. 나의 광장은 팀플레이는 없고 개인종목만 있다. 이러한 광장의 상태를 객관적 자료와 조사를 통해 보여주는 『아픔이 길이 되려면』(동아시아, 2018)의 저자 김승섭 교수는 이렇게 말한다.  

    

 “언론에서 세월호 유가족 분들의 상처를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라고 부를 때, 저는 조심스럽습니다. 외상 후 스트레스와 관련된 의학적 치료는 분명히 중요하고 필요하지만, 한국 사회의 온갖 모순들이 집약된 구조적 폭력에서 기인한 트라우마를, 개인적인 수준에서 진단하게 되고 그것이 개인적 수준의 치료‘만’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하는 게 아닌가 우려스러울 때가 있습니다. 그것이 세월호를 ‘교통사고’라고, 운이 없었다고, 개인의 책임이었다고 말하는 입장과 과연 얼마만큼 다른가에 대해 고민하게 됩니다.”(p.176)


 사회 구조적 문제를 개인에게 전가하는 데 있어 쉽게 등장하는 ‘스트레스’는 한국 사회 최적의 발명품이다. 사회는 악한자의 승리를 위해 움직였고 개인은 자기 스스로를 보호해야 했다. 피해자가 스트레스를 받는다고 하면 치료하라며 ‘돈’을 준다. 자본주의스러운 해결법이 아닐 수 없다. 악함은 개선되지 않는다. 악한자는 계속 악함을 대물림하며 구조화시킨다.   

   

 이명준도 자기가 태어나거나 선택한 자리인 ‘광장’에 만족하지 못했다. 나 또한 그렇다. 못마땅함을 넘어 분노가 서린다. 그러나 이주할 용기와 능력이 없는 이상 이 사회는 내 광장이기도 하다. 내 광장을 위해 어떤 노력을 기울여야 하는지를 사회역학 학자의 언어로 알려주는 『아픔이 길이 되려면』을 『광장』과 함께 권한다. 건강한 광장을 만들기 위한 질문과 성찰을 얻을 수 있다.  

   

 1961년 최인훈은 서문에 이렇게 썼다. “광장은 대중의 밀실이며 밀실은 개인의 광장이다.”(p.19) 사회도 개인도 따로 존재할 수 없다. 그러나 각각의 역할은 있다. 약자 보호, 불합리, 불평등 구조개선, 공동체 활성화 등이 사회의 역할이고 개인은 항상 이기심을 뛰어넘으며 살아야 한다. 그러나 지금 우리 사회는 개인에게 최소한의 광장도 내어주지 않는다. 사회는 사회문제로 입은 피해도 개인이 알아서 해결하라며 개인에게 ‘광장’이 되길 강요한다.      


 광장이 되지 못한 개인은 명준이 위로받았던 사랑의 밀실조차 갖지 못한다. 사랑은 밀고 당기다가 주고받는(Give & Take) 거래가 된 지 오래다. 소외된 개인은 SNS에서 댓글로 깨작깨작 소통한다. 그곳이 밀실인지 광장인지 분간조차 어렵다. 개인은 사회의 약자다. 약자에게 짐을 옮겨 놓고 버티지 못한다고 비난하는 사회는 그것을 이루는 구성원의 원망을 사고 고통을 가중시키며 결국 희망을 잃는다. 사회의 목적이 ‘루저(loser)’ 양산인가?      


  사족. 1997년, 여의도 광장이 공원으로 조성되기 위해 첫 삽이 떠올려졌다. 집회를 막기 위해서라는 소문이 돌았지만 김영삼 정부는 도심에 숲을 조성하기 위한 거라 홍보했다. 그 정부는 분명 예상했을 것이다. 정권이 바뀌지 않는다면 광장에 시민이 모일 사건이 많을 것을. 당시 정권은 바뀌었지만 우리의 광장은 상당히 축소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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