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격지심
"엄마, 엄마는 왜 선생님이 아니야? 내 친구 ○○네 엄마는 선생님이래."
"엄마가 선생님이었으면 좋겠어?"
"응. ○○가 부러워"
딸이 유치원 다닐 때 했던 대화다. 여기까진 괜찮은 대화였다. 그러나 부럽다는 말을 듣는 순간 자격지심 버튼이 눌리고 말았다.
"참나, 선생이 얼마나 번다고. 엄마 회사 다닐 때 선생님보다 돈 더 많이 벌었어. 그러니 부러워하지 마."
말하면서도 창피하고 말을 마치고도 부끄러웠다. 부러운 건 나였다.
"그런데 왜 엄만 회사 안 다녀?"
급 수습. "너네 키우는 게 더 좋아서."
"우리 엄마도 회사 다니면 좋겠다."
내가 어떻게 그만둔 회산데. 그만두겠다고 하니 상무가 '닭짓'하지 말라 했다. 마치 '닭대가리냐'의 준말 같은 이상한 어법이었다. 해방에 기쁜 척, 속내는 "야근 더럽게 많이 시켜서 도저히 애를 키울 수 없잖아!"를 끝까지 "애 키워야 돼요!"라고 눈물과 할 말을 모두 삼키며 나온 회산데. 이제 와서 다니라니. 겨우 7살인데 다른 엄마와 비교를 하는 아이가 조금 원망스럽기도 했다. 딸과 시시비비를 논해봤자 아이는 "그럼 자기 때문에 그만둔 거냐"라고 생각할까 봐 하려던 말을 거두었다. 너 때문만은 아니니까.
며칠 전, 회사 동료들을 만나고 왔다. 직장을 그만둔 후 4년이 지난 지금은 5시 반만 되면 pc가 자동으로 꺼진다고 한다. 그러면서 다들 현주가 조금만 버텼다면 좋았겠다고 말한다고 했다. 나와의 생활이 그립다는 뜻으로 읽어도 될까? 주부로 주저앉은 내 모습이 안타까운 맘에 얘기했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칼퇴근이 가능한 좋은 세상이 되었건만 그들의 고민은 여전했다.
만약 남편이 회식이 있다면 '나 오늘 회식'이란 문자 한 통이면 된다. 그러나 엄마는 사정이 다르다. 회식이 잡히면 먼저 그날 남편도 회식인지 아닌지를 묻고 이후 아이를 보육기관에서 픽업할 누군가를 섭외해야 한다. 보통 친정엄마나 아이의 친구 엄마다. 섭외에 실패하면 본인이 아이를 픽업하여 집에 데려다준 다음 회식에 좀 늦게 참여하거나 한다. 일찍 퇴근하면 만사가 형통할 줄 알았는데 육아가 여성에게 지우는 짐은 세상이 변해도 그대로다. 그들의 고민에 깊이 공감했다.
이제 그들과 나는 다른 삶을 사는 사람이 되었다. 과거에 붙들려 "이런 선택을 했었다면 더 잘 살았을 텐데."라며 그들의 좋은 점만 보며 내가 가지지 못한 것을 더 부각해 더 이상 스스로를 작은 존재로 만들지 않는다. 모든 순간에 맞닥뜨린 사건, 선택, 경험, 인연, 그리고 우주의 기운이 지금의 나를 만든 것이니 그때도 지금도 나는 잘 살고 있다.
누군가의 눈에는 좋은 직장을 그만두는 게 '닭짓'으로 보이고, 어떨 때는 '나도 직업 있었다!'라며 묻지도 않은 말로 발끈할 때도 있지만 자식에게 내 손으로 직접 모이를 주고 있는 지금의 삶도 나쁘지 않다. 더불어 이런 글을 남길 수 있게 되었으니, 미흡해 보이는 나를 들키기 싫어서 침묵했던 그때보다 여러모로 더 건강해진 건 틀림없는 사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