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낡아가지만 아름다워서』(최수이, 책늘, 2018)
"'써야 한다'는 당위보다 '쓰고 싶다'는 자연스러움이 편한 아마추어지만, 언젠가는 플로베르나 서머싯 몸이 말하는 '영감' 즉, '그분'을 경계하며 꾸준히 글을 쓰는 사람이 되고 싶다. 글도, 나도, 낡아가더라도" (p.7) 『낡아가지만 아름다워서』(최수이, 책늘, 2018)의 머리말이다.
나는 저자를 독서토론 및 서평 모임을 통해 거의 매주 만난다. '다북다독'의 첫 서평집이 태어나게끔 집도한 독립 출판사 '책늘'의 사장님이자 학원 원장님이기도 하다. 십여 년 전 방영했던 '올드미스 다이어리'를 변함없이 후원하는 덕질 여왕에 드라마와 책에 늘 빠져 있다. 책을 이렇게 많이 읽는 여성은 난생처음 봤다. 빠지면 헤어 나오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리며 헤어 나왔다 하더라도 절대 버리는 법이 없다. 새롭게 빠지는 것이 있다면 바뀌기 마련인데 그냥 다른 아이템이 하나 더 추가될 뿐이다. 그녀가 가장 많이 받는 질문은 이렇다. "잠은 언제 자요?"
"무엇엔가 빠지면 한껏 짙어진다. 시에 빠지고. 드라마에 빠지고. 커피에 빠지고. 책에 빠지고. 글쓰기에 빠지고. 책 만들기에 빠졌다. 각각의 짙은 색깔들을 모아 언젠가 햇빛 아래 널어봐야지." 그래서 책날개에 소개된 그녀가 너무 적절하다. 그녀는 잘, 깊게 빠진다. 모든 색을 담아내는 흰 도화지 같다. 아니, 장인의 정신과 땀을 품어 긴 시간 만들어진 질기고 고운 한지의 느낌이다. 낡을수록 아름다워지는.
이 책은 그녀가 빠졌던 것들의 일부를 서평, 에세이, 시로 표현한 것이다. 150페이지에 담아 얇은 사이즈라 금방 읽을 줄 알았다. 그런데 깊이가 남달라 책 한 장을 넘기기가 수월하지 않았다. 끄덕임, 한숨을 오가기도 하고 '이런 표현을 어떻게 쓸 수 있지?' 하며 놀라운 감탄사를 연발하다가 부러움에 장이 꼬이기도 했다.
"서너 시간 만에 훌쩍 읽어버린 이 소설 때문에 며칠을 앓았다. 괴로웠다. 나 자신의 추한 얼굴을, 그 숙이고 있는 얼굴의 턱을 억지로 들어 올려 마주한 느낌이다." (p.41)
"누구를 죽일 수도 있는 힘을 가진 것이 글이다. 앞으로 나는 글을 통해 교양 있게 험담을 해야겠다. 고아하게 시 속에 비웃음을 담아야겠다. 그러나 그 이전에, 내게 부족함 '너그러움'을 사러 가야겠다. 정말 누군가를 죽여서는 안 되겠기에." (p.93)
"눈물이 담뿍 고이기만 하고 흘러내리지는 않는 딱 그만큼이라 신파가 되지 않는 고급 진 위로." (p.95)
서평 모임에서 눈으로 훑었던 글, 블로그로 빠르게 읽어 내리며 띄엄 띄엄 봤던 것과는 다른 느낌이다. 왜 글들이 '책'이 되어야 하는지 알려준 책이다. 저자의 케릭터가 살고 저자의 언어가 보인다. 일정한 흐름이 있고 맥락이 있다. 글과 글 사이에 여백이 숨결이 되어 시트콤이었던 것이 한 편의 대하드라마가 되었다.
그녀에게서 평소 느꼈던 결이 글에 고스란히 전해진다. 마음과 글과 행동이 모두 일직선상에 놓여있다. 이럴 때 저자에 대해 안다는 것은 독자로서 글의 힘을 더 크게 느끼게 한다. 의심이나 상상하는 방해꾼이 없으니 글에 더 몰입하게 된다. 나 또한 빠졌다. 그녀의 글에. 그녀는 지금부터 동료가 아닌 덕질의 대상이 되었다. 나도 그녀를 따라 낡아가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