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애가 뒤집어쓴 방해꾼이라는 오명에 대하여.
자신에 대해 더 많은 것을 알기 위해서는
사랑에 빠져보아야 해요.
- 존 윌리엄스, <스토너> 중 -
성적 하락의 주원인으로 꼽혀, 연애 못하게 딴짓 못하게 단속받는 것이 당연했던 중고등학생 때부터였을까.
사랑과 성공 중 하나만 선택해야 한다고 굳게 믿었다. '어른들 말 들으면 다 잘된다'는 소리에, 다 잘 되고 싶어 말을 듣다 못해 진짜 믿어 버린 모범생의 말로였다.
'해야 할 것'보다 '마냥 좋아하는 것과 좋아하는 사람’이 우선하는 건 곧 패망의 지름길이라는 뒤틀린 사고가 나의 시간을 이리저리 마음대로 사용했다. 사랑하지 않는 자 모두 유죄라던 노희경 작가님 말대로라면, 난 중범죄자 무리에 속해 있었던 것 같다.
아- 의심 없이 내재화되어 온 당연한 진리들은 진실과 얼마나 거리가 먼 가.
'쓰고 싶다'는 욕구에 지배받고 있으면서도, 단 한 줄도 쓰지 않는 날들이 며칠씩 지나갔다. 뭐부터 써야 할 지도, 왜 써야 하는 지도, 어디에 어떻게 써야 할 지도 갑자기 모두 막막해져 오는 바람에 할 일을 무기한 미루는 찝찝한 기분에 사로잡혀 있었다. 답답한 마음에 남자 친구에게 말했다.
"뭘 써야 할지 모르겠어. 왜 써야 하는지도 모르겠고. 내가 쓰려고 하는 게 세상의 나무를 베서 담을 만큼의 가치가 있는지도 모르겠고."
"가치가 있어야 되나. 쓰고 싶으면 쓰는 거지." 그는 담담하게 대답했다.
"그래도 쓴다는 건 뭔가 모순적인 활동이잖아. 쓰는 걸로 끝나는 게 아니라 누군가에게는 읽혀야 완성되는."
"그럼 내가 읽을게."
"그럴래?"
"응.”
하는 심심한 대화가 이어진 후, 그 날 저녁 나는 양껏 썼다.
신기하게도 글자들이 다시 모여들기 시작했고, 쓰고자 했던 것들이 다시 보였다.
그는 말을 주는 법이 없다.
'힘내. 믿어. 너는 할 수 있어.'하는 말에 '고마워'하며 눈물을 흘리지만, 이전과 똑같이 한 글자도 만들어내지 못하는 말이 아닌 진짜를 준다.
그가 툭 던지는 담담하고도 간결한 대답을 받고 나면 대개 웃음이 나서 킥킥 웃는데, 정신을 차려 보면 내가 봉착한 '문제'(진짜 문제는 아닐지언정, 당시에 문제라고 생각되는 것)은 이미 소멸하고 없다.
문제가 더 이상 문제가 아니게 된다.
그가 마법사여서가 아니라, 나에게 힘 있는 사람이어서 그렇다.
그리고 그가 그런 힘을 가지는 것은 내가 그를, 그가 나를 사랑하기 때문이다.
둘 중 하나를 선택하고, 나머지 하나를 희생할 수밖에 없는 양자택일의 관계도 아니다.
둘의 관계는 어떻게 성공을 정의하느냐와 어떤 사랑을 하느냐에 따라 무한한 변주가 가능하다.
나의 경우, '성공'은 하고 싶은 걸 잘하게 되는 것이며, ‘사랑'은 하고 싶은 걸 계속하게 하는 힘이다. 사랑 없는 성공은 어딘가 불안한 것이 내 연주다. 오랜 시간 방해꾼이라 여겨져 온 사랑은 심각한 명예 훼손을 겪고 있었던 셈이다.
내가 쓴 글을 읽겠다던 그는 정말로 읽고 있다. 그것도 가장 먼저.
아마 이 글을 올리고 나면, 10분이 채 지나지 않아 '두둥실 님이 라이킷 하셨습니다.' 알람이 울릴 거다. "좋은 글이다. 사람들이 많이 봤으면 좋겠다."라고 말하는 그 덕분에 오늘도 살짝 행복하고, 계속 쓸 수 있겠지. 큰 일이다.
「어렸을 때 두 사람은 마음과 몸이 별개의 것이며 서로 적대적인 관계라고 배우며 자랐다. 그래서 별로 깊이 생각해보지도 않고, 둘 중 하나를 선택하려면 나머지 하나를 희생할 수밖에 없다고 당연한 듯이 믿고 있었다. 둘 중 하나가 다른 하나를 강화해줄 수도 있다는 생각은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었다.
그런데 두 사람이 진실을 깨닫기도 전에 체험이 먼저 찾아왔으므로, 이 새로운 발견이 오로지 두 사람만의 것처럼 보였다. 두 사람은 이처럼 '기존 관념'이 기이하게 달라진 사례들을 모아 보물처럼 간직해두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것이 기존 관념을 고수하는 세상으로부터 두 사람을 분리시키는 데 일조했다.」
- 존 윌리엄스, <스토너> 중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