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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살짝 Oct 28. 2018

평면 너머 입체를 보는 시선.

테라스하우스 시즌3을 보다가.

넷플릭스에 테라스하우스 시즌3가 업로드됐다.

테라스하우스는 일본판 '하트시그널'이라고 칭해지는 방송 프로그램인데, 재미의 포인트가 꽤나 다양하다.

보시는 분 또 있나요 :-)

  

일단 방송 출연 종료 시점을 출연자가 정하기 때문에 한 시즌 내에서도 다양한 사람들의 조합을 볼 수 있는 점이 흥미롭다. 게다가 대내외적으로 홍보하는 것처럼 대본이 없어서인지, 일본 방송의 수위가 한국과는 달라서인지 모르겠지만, 출연자들이 맥락 없는 돌발 행동을 할 때가 (정말) 많다. '하트시그널'처럼 출연자들 간에 연애를 하지 않아도 상관없다. 테라스하우스에 들어와서 이 사람 저 사람 데이트하다가 아무래도 자신은 전 남친을 아직 좋아하는 것 같다면서 전 남친을 다시 만나 고백했는데 차이고, 깔끔하게 테라스하우스를 나가기도 한다.(시즌1 이름은 기억나지 않는 의대생.) 중간중간에 MC들이랑 개그맨들이 나와서 드립 치면서 멘트 하는 것도 진심 웃기다. 매번 낄낄 거리면서 보게 된다.


주로 밤에 tv를 보는 편인데, 이건 볼수록 말똥말똥해져서 '다음화'를 누르다 보니 이틀 만에 8화까지 달렸다. 이후 방송분이 아직 업로드되지 않아 애타게 기다리는 마음으로 글까지 쓴다.




늘 그렇듯, 문제의 캐릭터는 화면을 장악한다.

시즌3 8화까지를 지배하는 문제의 캐릭터는 유다이다. 19살 (한국 나이로는 20살)의 가장 어린 출연자.

유다이는 한 사람도 빠짐없이 모두에게로부터 미움을 산다. 이상형이 '자신의 모든 것을 받아주고 이해해주는 엄마 개'라고 표현하는 것부터 머리맡에 판다 인형 두 개를 꼭 두는 행동, 상대방이 싫어할 말과 행동을 남발하는 눈치 레벨, 실천 없는 말만 떠벌리는 허세, 돈도 안 벌고 있으면서 아빠 카드로 명품을 사려는 소비습관까지. 유다이는 어느 면을 보나 욕먹기 적합한 캐릭터다. 다른 출연자들은 그를 포기하거나 대놓고 유령취급을 하게 되고, mc들은 '쓰레기'라는 표현을 서슴없이 한다. 욕을 먹다 못해 장 보러 가서 양파 냄새 맡은 걸로도 욕을 먹는다. 양파 사건은 자의적 행동이 아니라 방송 연출 주문 같아 보였는데 말이다.


내가 보기에도 그는 밉상이다. 만약 내가 그와 같이 지낸다면, 뒤에서 뒷담을 엄청나게 하고 앞에서는 멸시 어린 눈초리를 보낼 확률이 8할 이상은 될 것이다. 하지만 화면 너머 시청자이기에 조금은 무섭다. 한 사람이 다수의 사람들로부터 쓰레기라고 손가락질받는 게 이렇게 쉬울 일이라니.


사실 그는 인성 쓰레기보다는 결핍 중증에 가까워 보인다. 결핍이 심한 상태가 오래 지속되어 뒤틀린 에너지가 온몸에 배여 버린 느낌이다. 악덕은커녕, 오히려 영악하지 못해서 자신 안에 있는 미운 모습을 여과 없이 뿜어버린다. 불안하고 위태스럽다. 괜한 오지랖이 발동하여, 이 방송 때문에 혹여 세상으로부터 더 문을 닫아버리지는 않을까 걱정도 될 만큼.




화면에서와 달리, 사람은 누구나 어느 정도 입체적이다.

우리는 말도 못 하게 어렸지만 조금씩 커가고 있으며, 얼마 전까지 결핍에 시달렸지만 지금은 충만함에 마음이 차있기도 하고, 자기애적인 집착만 하던 사람이 성숙한 사랑을 해내는 것 또한 가능하다.


화면 속에서 한 마디로 정리되는 고정적 캐릭터가 실제로는 너무나 다양한 면모와 그보다 더 다양한 변화 가능성을 지닌 한 사람인 것이다. 편집적 시각은 이런 입체성을 무시하면서 한 가지 측면만 극대화시키고, 그래서 등골이 서늘할 만큼 무서워진다. (무섭다면서, 파트 2가 업로드되면 재밌다고 줄곧 재생할 나는 또 얼마나 모순적인 인간인가 싶다.)


어쨌거나 결론. 사실 결론 따위 없지만, 유다이 3번 욕할 거 1번만 해도 충분하지 않나- 하는 별 거인 생각.

또는 한 인간이 지닌 입체성을 바라보는 눈이야말로 사랑이 담긴 시선일지 모르겠다는 별 거 아닌 생각.


「 아이는 어른에게 사랑의 다른 측면을 가르쳐준다. 진정한 사랑은 까다롭고 불쾌한 행동의 이면에 놓여 있을지 모르는 무언가를 최대한 관대하게 해석하려고 끊임없이 시도한다는 점이다.

부모는 아이가 기본적으로 선하다는 가정에서 시작한다. 아이가 울 때 우리는 아이가 심술궂거나 자기 연민에 빠졌다고 비난하지 않고, 무엇이 불편하게 만드는지를 생각한다. 아이가 깨물 때 우리는 아이가 틀림없이 겁을 먹었거나 순간적으로 골이 났을 거라 생각한다.

만약 이 본능을 성인들의 관계에 조금이라도 도입한다면 우리는 얼마나 친절한 사람이 되겠는가? 그렇다면 성인들의 관계에서도 심술궂음과 잔인함을 보아 넘기고 거의 항상 그 이면에 깔려 있는 두려움, 혼란, 피로를 감지해낼 수 있다. 인류를 사랑으로 바라본다는 것은 이런 의미일 것이다. 」

- 알랭 드 보통, <낭만적 연애와 그 후의 일상> 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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