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샐리드부아 Jan 22. 2020

남편은 해외 입양인

[프롤로그]

"어디서 왔어요?"

"미국 포틀랜드에서 왔어요"

"아, 그럼 미국 교포예요?"

"아니요~입양인에요~!"

"아 그러니까, 교포잖아요! 재미교포!"

"아니에요~ 해외 입양인인데요."

"...?"


남편과 함께 있으면 위와 같은 질문들을 자주 받는다. 아직도 우리나라에서는 해외 입양인에 대한 인식이 별로 높지 않은 듯하다. 해외 입양인에 대해 막연히는 들어는 봤어도, 어떤 사람들을 해외 입양인이라 칭하는지, 그들은 한국 국적을 갖고 있는지, 얼마나 많이 한국 문화에 노출되어 자랐는지, 재외교포들과는 어떻게 다른지 등등 정확하거나 깊게 이해하고 있는 사람들을 만난 적은 사실 적다.

남편이 해외 입양인이라고 할 때면 대부분 좋은 마음으로 동정심을 표하거나, 조심스럽게 몇 가지 질문을 건네 오곤 한다. 왠지 모를 미안함에 친절을 베푸는 사람들도 있고, 조심스럽기는 하지만 궁금함을 참지 못해 끊임없이 질문을 해오기도 한다. 나도 그랬다.


사실 난 남편을 알기 전부터 네덜란드, 독일, 미국 등지로 입양된 해외 입양인 친구들 무리와 어울리며 지내고 있었다. 오랜 일본 생활 후에 한국에 갓 돌아온 나는 완전히 한국생활에 적응하지 못한 또 다른 이방인이었다. 어디에도 속하지 못할 것 같은 불안한 마음을 함께 공감할 수 있었던 친구들도 대부분 이방인들이었다.


해외 입양인 남편을 처음 만났을 때, 끊임없는 질문 공세를 피할 수 있었던 건, 남편을 알기 전에 미리 친해진 해외 입양인 친구들 덕분이 아녔을까 싶다. 해외 입양인 친구를 처음 만났을 때는 나는 궁금함을 참지 못하고, 갖가지 질문공세를 펼치며 실례를 범하기도 했다. 내 인생에 있어야 할 자리에 항상 있어 왔던 나의 친부모님 그리고 친동생의 존재가 누군가에겐 당연한 일이 아니라는 사실은 가히 충격적이었다. 한 때는 친부모가 있었지만 어떤 사연으로든 부모에게 버려졌고, 또다시 양부모님이 생긴다는 것을 인생에서 겪는다는 것은 어떤 느낌일까, 나에게는 도저히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다.




남편은 4살 때 홀트 아동복지회라는 입양기관을 거쳐 미국 오레곤주 포틀랜드에 살고 있던 미국인 부모에게 입양되었다. 입양될 당시 양부모님 혈육의 친딸인 누나가 위로 있었고, 남편을 입양하고 몇 년 후에 한국에서 또 여자아이를 입양한 부모님 덕분에 피는 섞이지 않았지만 같은 한국인 피가 흐르는 여동생도 생기게 되었다. 아마도 서로 비슷한 처지를 이해해가며 서로 힘들 때는 기대고 보듬어 주라는 뜻에서 둘을 모두 한국에서 입양하지 않으셨나라는 추측을 해본다.




남편의 양부모님이자 나의 시부모님은 매우 온화하고 성실하며 자식을 끔찍이도 아끼시는 분들이다. 안타깝게도 시어머니를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뵌 것은 2017년 장례식 때였다. 얼마나 한국에 떨어진 아들을 얼마나 그리워하셨고 사랑하셨는지 직접 들을 수는 없었지만, 남편에게 살아생전 마지막까지 꼬박꼬박 보내오신 이메일과 때마다 부쳐오신 선물꾸러미들과 손 편지들을 보면 대략은 그 그리움과 사랑이 얼마나 컸는지 알 수가 있다.


남편 생일과 크리스마스에는 지금도 어김없이 각가지 선물꾸러미가 담긴 소포가 예정일에 딱 맞춰 도착한다. 예전에는 시부모님이 함께 보내오셨고, 지금은 시아버님 홀로 보내오시지만 예전이나 지금이나 보내오시는 선물은 늘 거의 비슷하다. 남편이 어릴 때 좋아하고 자주 먹었던 간식들, 학생 때나 입을 것 같은 옷가지, 남편의 출신 대학 로고가 박혀있는 각가지 물건들을 정성껏 포장하여 보내오신다. 대학 졸업 직후 바로 한국에 온 남편은 가끔 휴가 때 미국에 돌아가는 것 외에 쭈욱 한국에서 살아왔는데, 그 세월이 무려 14년 정도가 되어가는 바람에, 시부모님의 아들에 대한 마지막 기억은 대학생 아들에 멈춰계신 듯했다. 오랫동안 떨어져 지낸 39살의 성숙한 사회인이 돼버린 아들의 취향은 더 이상 알 수가 없으셨지만, 그들의 어렴풋한 마지막 기억의 대학생 아들을 생각하며 끊임없이 선물을 보내오셨던 것이다.  


남편은 양어머니 아니 낳아준 친어머니보다도 가까운 그의 유일한 어머니가 돌아가시기 전에 마지막으로 보내신 이메일을 아직까지도 열어보지 않고 있다. 아들에게 보내온 수많은 이메일들은 아직 가슴이 아파 열어볼 준비가 되지 않은 아들의 메일함에 열리지 않은 채로 보관되어있다. 답변도 거의 없던 아들이었지만 어머니는 아들과 대화하듯 그 날의 소소한 일상을 이메일로 전하셨다. 오늘도 당신 아들의 생각을 하고 계신 어머니의 삶 속에 아들은 멀리 있었지만 늘 함께하는 존재였던 듯하다.


 


남편을 처음 만났을 때 남편은 세 마리의 길고양이를 데려와 키우고 있었다. (지금은 우리의 소중한 가족들이다) 세 마리 중에는 본인이 구조한 고양이도 있고, 보호소에서 데려온 고양이도 있었다. 왜 이렇게 길고양이들에게 애착이 많은지를 묻자 남편은,  "얘네도 나처럼 길에서 왔잖아.”라고 답하였다.


남겨진 기록에 따르자면, 남편은 홀트 아동복지회를 통해 미국 가정에 입양되기 전 사실, 대구의 한 병원 대기실에 버려진 세 살배기 길 잃은 아이였다. 졸지에 미아에서 고아가 된 남편은, 대구의 한 고아원을 거쳐 홀트 아동복지회까지 오게 되었고, 미국에까지 입양가게 되었는데, 길에서 구조되어 보호소를 거치고 집사들에게 입양되는 운 좋은 길냥이들과 다름없었다.


운 좋은 이란 표현을 쓴 것을 불편해하는 입양인이 있을지도 모른다. 길냥이에 그들의 인생을 비유하는 것도 옳지 않을 수도 있지만, 구조된 고양이를 입양 보내는 것 자체에 나쁜 의도는 적어도 없지 않았다는 것을 설명하기 위해서 예를 들었을 뿐이다. 입양 간 고양이가 좋은 집사를 만나 행복하게 살 수도, 나쁜 집사를 만나 불행하게 생을 마감할 수도 있겠지만, 나쁜 집사를 만나지 않기 위해 길냥이의 구조 자체를 시도하지 않거나 입양을 보내지 않고 보호소에 평생 가둬둘 수 만도 없는 일이다.


만약 내가 해외입양을 가지 않았더라면이라는 해외 입양인들이  번쯤 인생에서 경험하는 고뇌는 '외국으로 입양을 갔다니 쟤는 그래도 복이 있네' 라는 입양의 밝은 면만 보고 치부해버리는 우리 사회와 충돌하여 해외 입양을 흑백으로만 정의하도록 몰아세운다. 하지만 길냥이의 사례처럼, 해외 입양 또한 반드시 질타만을 혹은 찬사만을 받아야 하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전쟁 직후 해외입양을 악용하여 자본적인 이익을 챙긴 사람들이나, 해외입양을 보내 놓고 그들이 무국적자가 되도록 방관한 기관들과 양부모들은 질타받아 마땅하다. 양부모가  자격도 없이 부모가 되어 입양인들을  좋은 상황으로 몰고  사례들을 접할 때도 매우 화가 나지만, 혈육의 부모도 좋은 부모가 있고 나쁜 부모도 가끔 있는 것처럼 나쁜 해외입양의 사례들로 모든 해외입양 자체를 모두  나쁘게 부정할 수는 없을 것이다.




사실 남편이 대학 졸업  한국에  이유는,  본인의 과거에 대한 궁금증을 해결하기 위해서도, 친부모를 찾기 위해서도 아니었다. 영어강사로 일본에 가려했다가, 모집이 마감되는 바람에  나라 한국으로 오게  것이 바로 한국에  이유였다. 남편은 자신이 태어나고 버린 나라에 대해서나, 자신을 낳고 버린 부모에 대해서도 원망감도 기억도  없다고 했다. 그냥 80년대생 또래 미국 아이들이 어린 시절부터 동경했던 일본이란 나라의 옆나라여서 오게 되었다는 이야기는  우리가 기대하는  드라마틱한 스토리텔링과는 거리가 멀다.


해외입양인 작가가 만든 '피부색 꿀색'이라는 다큐멘터리 애니메이션을 본 적이 있다.  작가가 말하길 많은 한국인 해외 입양인들이 일본이라는 나라에 집착하거나 동경하게 된다는데, 그 이유가 나를 버린 나라인 한국에 대한 복수심과 애증의 잠재의식 때문이라고 한다. 한국과 숙명적인 경쟁 구도면서도 경제적으로 우위인 일본을 좋아함으로써 복수와 애증의 대리만족을 느끼는 것이라고 하는데,, 남편은 “에이~” 라며 이에 대해 가벼운 부정을 했지만 속내는 모른다.




스포츠를 유난히도 좋아하는 남편은 아마추어 하키팀에 소속되어 해외로 원정경기를 나가기도 한다. 오키나와의 경기에 나갔을 때의 일이다. 한국에서 온 팀으로 출전하긴 했지만, 남편이 속해 있는 팀의 대부분의 선수들은 한국에 사는 캐나다, 미국 출신의 외국인들이었기 때문에 단지 '한국팀'이라고 하기에도 애매한 상황이었다. 팀 유니폼을 다들 맞춰서 입고 나왔는데 각자 왼팔에 자신의 국가의 국기를 새겨 입기로 한 것 같았다.


경기가 시작되자 하나 둘 자신의 국기를 왼팔에 붙인 채 스케이트를 타고 미끄러져 나왔다. 관람석에서 남편을 찾았고, 멀리서 남편이 스케이트를 타고 유유히 미끄러져 나왔다. 남편의 왼쪽 팔에 붙어있는 성조기가 보였다. 잠시 후 남편이 획 몸을 돌리며 턴을 했고, 남편의 반대편 오른팔에 붙어있는 태극기가 보였다.


남편을 이토록 잘 알기에, 그것이 얼마나 남편에게 큰 의미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더욱이 잘 알기에, 갑자기 뭉클해졌다. 나를 낳아준 고국이지만, 나를 버리기도 한 원망스럽고 미운 존재편에 서기까지 많은 감정이 교차했을 것이다.


14년이라는 긴 한국에서의 생활은 쉽지만은 않았을 테다. 미국에서 다른 피부색으로 차별을 받았다면 한국에서는 또 검머외라고 차별을 받기도 한다. 미국에서 남편은 자신의 아버지 혹은 어머니와 있을 때도 수많은 시선들과 관심들을 견뎌야 했다. 아무리 미국이지만 그 당시 1980년대 동양인 아들을 안고 있는 양어머니의 모습은 익숙지 않은 모습이었다고 한다. 수많은 편견과 수군거림으로부터 꿋꿋하게 아들을 지켜냈다는 이야기를 시어머님의 여동생인 남편의 이모님을 만났을 때 듣게 되었다.  



남편에게 있어 한국은 사랑하고 싶지만 막연히 사랑할 수만은 없는 애증의 관계임에 분명하다. 왜 일본에 열광하는 것처럼 한국을 좋아할 수는 없냐고 남편에게 다그치지 않는다. 표현에 서툴지만, 14년의 세월이 대신 말해주듯, 남편은 자신을 한때는 버렸던 한국을 이젠 용서하고 이 땅에 다시 희망의 뿌리를 내리고 살아가고 있었다.  


남편의 "해외입양인으로서의 삶"에는 잔잔한 흉터들이 남아있지만, 그 흉터들을 더 이상 애써 반창고로 가리지 않는다. 잔잔한 흉터들은 단단하고 아름다운 삶의 흔적들이다.  


아직도 우리 사회는 아직 ‘입양인’ 이라는 단어조차 입에 담기 어려워하고, 해외 입양이라는 과거사에 대해 엄숙하고 너무나 조심스러운 주제로 받아들이곤 한다. ‘남편은 해외입양인' 브런치북을 통해, '해외 입양'과 '해외 입양인'이 단지 민감하고 껄끄러운 소재가 더 이상 아닌 우리 주변의 또 하나의 이야기로 알려지길 바란다.




남편의 입양서류에 붙어있던 사진. 이름 대신 번호표가 붙어있다.




    









작가의 이전글 프랑스 샤토 결혼식과 노르망디 여행기 - 2.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