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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샐리살리 Oct 22. 2021

피넛버터 젤리와 낫또 그리고 김치

우리 집엔 세 개의 언어가 있다.

우리 집엔 세 개의 언어가 있다.

한국어와 영어 그리고 일본어. 

말로 오가는 건 한국어와 영어뿐이지만, 서재엔 일본 책들이 빼곡하고 낫또와 미소된장은 김치처럼 늘 냉장고의 자리한켠을 차지하고 있다.  ‘*알렉사’를 부를 땐 영어로, ‘*짱구’를 부를 땐 한국어로 이야기한다. 난 남편만큼 '*시리'는 자주 안 쓰지만, 다른 두 AI들처럼 '시리'도 자기 담당부서가 있으면 좋을 것 같아 내 '시리'는 일본어로 설정해야 하나 고민도 해봤다. 


비영어권의 영화를 볼 때 불편할 때가 있다. 남편과 나 둘 중에 한 명의 희생을 요한다. 남편이 한국어 자막 읽기에 서툴기 때문이다. 처음엔 여러 방법을 시도해 보았다. 영어 더빙으로 바꾼 후에 한국어 자막으로 설정했더니, 나는 편하지만 남편은 때때로 어색한 더빙 때문에 영화에 온전히 집중하질 못했다. 반대로 더빙 없이 영어 자막으로 틀자니 내가 불편했다. 호러나 액션 영화야 감으로 어느 정도 볼 수 있지만 법이나 의료에 관한 전문적 말들이 나오기 시작하면 영어 자막이 있어도 별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걸 알았다. 그래서 이젠 비영어권 영화는 암묵적 동의하에 자연스럽게 패스하게 되었다. 


한국에서 결혼식을 준비할 때도 세 개의 언어가 필요했다. 미국, 일본, 중국, 독일, 스페인, 프랑스, 네덜란드, 나이지리아, 캐나다 등등 각지의 하객들이 모이게 되어, 청첩장과 결혼식 순서지를 한국어 버전, 영어 버전, 일본어 버전 세 가지로 만들었다. 결혼식 뒤풀이에서 한국어, 영어, 일본어가 뒤죽박죽 되어 전혀 생뚱맞은 사람에게 다른 언어로 이야기하기를 반복했다. 


세 개의 언어가 있는 만큼 우리 집의 냉장고 안도 다양하다. 한국인의 가정에 김치가 꼭 있어야 하는 것이라면, 미국집에도 항상 있어야 한다는 음식에 대해 하루는 남편이 항의하기 시작했다.  


“여보, 아메리칸 하우스에는 늘 있어야 하는 게 있어. 식빵이랑 피넛버터와 젤리, 햄이랑 치즈! 언제든지 샌드위치를 먹고 싶을 때 먹을 수 있어야 한다 구우!”


딸기잼과 땅콩버터를 식빵 위에 바른 열량 폭탄의 음식을 '딸기잼과 땅콩버터 샌드위치'가 아닌 '피넛버터 젤리'라고 부른다는 것을 남편을 통해 알았다. 아무튼 남편의 항의 이후로 땅콩버터와 딸기잼을 꼭 사다 놓는데, 아니 식빵에다 땅콩버터를 발라 먹는 날보다 날로 숟가락으로 퍼먹는 날이 더 많아져 아예 찬장 깊숙이 숨겨버렸다. 


남편이 한식을 안 좋아하는 것은 아니다. 고등어구이, 닭갈비, 파전, 도토리묵, 순댓국 등등 못 먹는 게 거의 없다. 유럽 여행 중 일주일 동안 삼시 세 끼를 빵만 먹다가 도저히 하루는 안 되겠는지 "안 되겠어. 얼큰한 김치찌개가 너무 당긴다...." 라며 한국 음식점을 찾으러 다니기도 했다. 하지만 이런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곤 "오늘 저녁 뭐 먹지?" 물으면 열 번 중 열 번 돌아오는 답은 한국음식이 아니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우리 집 냉장고는 외국 음식재료들로 채워지기 시작했다. 외국음식을 요리하다 보니 각가지 소스와 향신료들을 늘 상비해두게 되었고. 치즈, 올리브, 피클, 살라미, 고수, 살사 소스, 렌치 소스, 바질 소스 등으로 냉장고의 공간이 빼곡히 채워지게 되었다.


내가 삼시 세끼 한식 없이 못 살아하는 사람이었다면 남편과 정말 입맛 맞추기가 힘들었을 거다. 하지만 일본에서 자취를 하며 보낸 20대의 버릇 때문인지, 김치 없이도 단품요리 하나만으로도 끼니를 때우는 게 익숙한 타입이다. 일본에서 살 때, 한국 마트까지 가서 한국 김치를 공수해서 먹는 파 와는 거리가 멀었다. 그냥 반찬으로 집 앞 일본 마트에서 쉽게 살 수 있는 일본에서 '베니쇼가'라 불리는 '적생강'이나, 일본에서 카레와 먹을 때 주로 곁들이는 '후쿠진즈케' 란 빨간 장아찌를 김치 대신해 먹었다. 


단품 식사에 반찬 하나면 충분했다. 학교생활로, 사회생활로 바쁜 정해진 시간 안에서 오늘 뭘 해먹을지보단 뭘 하고 시간을 즐길까가 더 중요했기에, 가장 최고의 식사는 가장 빨리 해결할 수 있는 음식이었다. 제일 많이 해먹은 음식은 아마 카레랑 파스타 일거다. 100~200엔이면 레토르트 카레 한 봉지나, 파스타 소스 한 봉지를 살 수 있었다. 집에 귀가하면 햇반을 돌려 그것들을 고명으로 올려 덮밥처럼 해 먹었다. 아주 간단해 손도 별로 안 가고 설거지 거리도 안 나왔다. 


아침으로는 늦게 일어나는 날을 빼고는 매일매일 빵을 먹었다. 빵 위에 치즈를 올리고 마요네즈를 듬뿍 올린 채로 토스트 오븐에 굽는다. 뜨거워진 마요네즈와 치즈에 입천장이 매번 데는데도 상관없다. 지금도 나에게 있어 이것은 최고의 토스트 레시피인데 남편은 마요네즈가 싫다고 빼 달라고 했다. 한 번은 *과카몰레를 만드는데 마요네즈를 몰래 넣었다가 남편에게 크게 혼났다. 


"그 버릇은 일본에서 들인 거라고!!" 

익숙해진 식습관 때문에 어쩔 수 없다며 과카몰레에 마요네즈를 넣은 것을 정당화시켜보려 했지만 이상한 레시피라고 놀려대는 남편을 말리기엔 역부족이었다. 


일본 사람들의 마요네즈 사랑은 정말 못 말린다. 생각지도 못하는 곳에 다 뿌려 먹는다. 한 번은 아이스크림 위에 뿌려 먹는 사람도 방송에서 봤다. 남편도 왜 이렇게 일본 사람들이 마요네즈를 좋아하는지 모르겠다며 혹시 마요네즈가 원래 일본음식인 건 아닌지 하고 궁금해했다. 지금 우리 집 냉장고에 있는 마요네즈만 해도 '명란 마요네즈', '비건 마요네즈', '저칼로리 마요네즈, ' 그리고 '올리브유 마요네즈' 이렇게 네 종류가 있다. 마요네즈가 없으면 불안하다. 아무튼 일본에서 든 식습관은 한국에 돌아온 후로도 쉽게 변하지 않았다. 집에 마요네즈를 비롯해 베니쇼가, 후쿠진즈케, 미소된장, 가쓰오부시, 낫또, 타코야끼 소스 같은 게 없으면 안 된다.  


그렇다고 한식을 아예 안 먹을 수는 없다. 김치는 친정네에서 받아오고, 반찬은 가끔 사다 먹는다. 안타깝게도 끝까지 반찬을 먹지 못하고 버릴 때가 많다. 한식을 매일 먹는 게 아니다 보니 하루 먹고 나면 다음날은 피자를 시켜먹고 그다음 날은 파스타를 해 먹고 그다음 날은 일본풍 타코 라이스를 해 먹으면 냉장고에 반찬을 사다뒀다는 사실조차 잊어버린 채 일주일이 가고 한 달이 가버리는 바람에 남은 반찬들은 쓰레기통이 되어버리기 일수다. 


엄마와 동생이 우리 집에 놀러 와 찬장과 냉장고를 열어보더니 기겁했다.

"이게 다 뭐야. 정말 없는 게 없잖아!! 마요네즈만 네 종류고 치즈만 해도 여섯 종류가 넘네. 이건 도대체 뭐야? 타히니 소스? 어따 해 먹는 거야?"


타히니 소스가 집에 있었던가. 홈메이드 후무스를 만든다고 사두긴 했는데 한번 만들고 손이 많이가 이후로 기억 속에서 자연스럽게 사라져 냉장고 깊숙한 곳에 들어가 있었다. 동생은 일주일 내내 삼시세끼 한식만 먹어도 괜찮은 타입이라, 김치에 반찬 몇 가지면 며칠을 먹기 때문에 냉장고가 우리 집만큼 북적거리지가 않는다고 했다. 아 그렇지만 우리 집은 그렇게 안된다. 식빵과 피넛버터 젤리를 사다 놓지 않으면 아메리칸 와이프로 실격이고, 일본음식도 한국음식도 생각날 때마다 먹어줘야 하니 그 무엇도 버릴 수 없다. 


남편이 웃으며 말했다. 

" 자긴 진짜 머릿속이 바쁘겠다. 'Department(부서)'가 도대체 몇 개야? 한국 부서, 일본 부서, 미국 부서, 와이프 부서, 딸 부서..." 


적절한 비유였다. 내 머릿속에 수많은 부서가 있고, 필요할 때마다 그 부서들이 튀어나와 제 일을 한다. 오늘은 한국의 내가, 내일은 일본의 내가, 그다음 날은 미국인 와이프의 내가 된다. 


작년 크리스마스 즈음 이케아를 갔을 때였다. 

"아! 엄마 생각난다. 우리 엄마가 미트볼을 진짜 잘했었는데! 누나한테 레시피 좀 보내달라고 해볼까." 


4년 전 돌아가신 시어머님은 미국으로 이주 온 스웨덴 이민자들의 피를 잇고 계셨기 때문에 남편은 어린 시절 스웨덴식으로 요리한 미트볼, 크랜베리 소스를 곁들인 메쉬 포테이토, 펌킨 파이 등 약간의 스웨덴식 풍미를 가미한 미국 홈 요리를 먹고 자랐다. 어머니의 어머니로부터 대대로 물려받은 스웨덴식 홈 요리 레시피가 한 손으로 쥘 수도 없이 두꺼운 파일철 한 권으로 되어있는데, 언젠가 여유가 생기면 그 레시피들을 받아 한번 시도해봐야겠다고 생각하고 있다. 하나의 Department(부서)가 더 늘어나겠지만 말이다.  



*알렉사 : 아마존의 AI

*짱구 : LG유플러스의 AI

*시리  : 애플의 AI 

*과카몰레 : 아보카도, 토마토, 양파, 고수, 라임즙 등을 넣고 으깨 토르티야 칩스를 찍어 먹는 요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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