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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alli Sep 13. 2021

MOM

남편이 친정엄마를 맘이라 부르기 시작했다. 

남편과 친정엄마의 관계는 마치 아들과 엄마처럼 돈독하다. 물론 처음부터 그랬던 건 아니지만 어떠한 계기들이 차곡차곡 쌓여 지금의 관계를 만들었다. 친정엄마를 한마디로 표현하자면 ‘헌신’이다. 아빠와 결혼하고 평생을 전업주부로 살았다. 어린 시절 나와 내 여동생은 항상 엄마와 함께 했다. 우리 집엔 언제나 맛있는 엄마표 음식들이 가득했다. 외국음식들이 그리 흔치 않은 시절에 리조또나 파스타 같은 음식들을 어디서 배워와 새로운 음식들로 우리의 배를 행복하게 해 줬다. 


엄마는 엄마의 모든 시간을 우리에게 바쳤다. 엄마의 인생은 나와 내 동생이었다. 늘 엄마랑 붙어있다가 중학교 3학년 말쯤 호주로 유학을 가게 되어 엄마랑 처음으로 떨어지게 되었다. 그땐 나 자신이 다 큰 성인이라 생각할 정도였는데 아직 엄마와 떨어지기엔 조금 이른 나이였을까? 엄마와 생이별을 해야 했던 나는 호주 학교에서 하도 말썽을 피워 결국 엄마를 1년에 서너 번도 더 왔다 갔다 하게 만들었다. 마지막으로 호주에 또 불려 왔을 때 엄마가 말했다.


“이제 돌아가자~. 괜찮아”


한 번의 호주유학의 실패를 딛었지만 이번엔 일본의 대학으로 또다시 유학을 가고 싶다 떼를 쓰는 나를 엄마는 말리지 않았다. 이번엔 잘하겠지 의심반이었겠지만 엄마는 나를 믿어주었고 다행히 일본에서의 대학 생활을 나름 만족스럽게 보내고 있었다. 대학교 2학년 말쯤 아빠의 회사가 부도나기 전까진 말이다. 그 충격으로 아빠는 뇌출혈로 쓰러지셨고 나는 일본에서 돌아와야 할 상황 근처까지 가게 되었지만 다행히 할머니의 금전적인 지원 덕에 일본에 남아 계속해서 공부할 수 있게 되었다. 


문제는 생활비였다. 넉넉했던 가정환경에서 자란 터라 나의 씀씀이는 보통이 아녔을뿐더러 애초에 돈에 대한 관념이 없었다. 돈은 버는 게 아니라 주머니에서 나오는 것이었다. 이전엔 한 달에 약 30~50만 엔을 엄마는 생활비로 보내왔었는데 난 저축하나 못하고 홀랑 그 돈을 다 써버렸다. 아빠의 부도 후 엄마는 나에게 신신당부하였다. 


"아껴 써. 제발 좀 아껴 써. 이제는 옛날처럼 보내줄 수가 없어."

"알았어. 그렇게 할게!"


말은 했지만, 정말 그렇게 했냐고? 버릇이란 게 정말 고치기 힘들어서 버릇인 것이다. 


"엄마, 이번 달에 또 생활비가 모자란데.. 더 부쳐줄 수 있나?" 

미안한 마음은 있었지만 엄마에게 뻔뻔하게 매달 전화를 걸었다.  


"왜 이렇게 또 많이 썼어... 제발 아껴 써.. 엄마 힘들어..."

라고 엄마는 말했지만, 늘 마지막 엄마의 말은 같았다.


"어떻게 좀 해볼게.. 좀 기다려봐."


엄마와의 통화 후엔 언제나 얼마 안가 내 통장에 돈이 들어와 있었다. 홀로 일본에 있으니 한국에서의 엄마의 재정문제가 얼마나 힘든지 알 수가 없었다고 더 이상 말하진 않겠다. 그냥 난 이기적인 딸이었다. 엄마는 어떻게든 매달 부족한 돈을 보내왔고, 나중에야 알았는데 엄마는 그 돈을 마련하기 위해 이곳저곳 돈을 빌리고 카드론을 하도 써 이자에 허덕여했다. 


엄마는 넉넉할 때도 힘들 때도 매달 먹을거리며 생활에 필요한 물건 꾸러미를 소포로 보내왔다. 나는 당연한 걸로 알았고 감사의 인사조차 제대로 한 적이 없다. 엄마는 일본의 우리 집에 올 때면 맨날 방바닥과 화장실을 쓸고 닦았다. 음식들로 냉장고를 채웠다. 공항에서 엄마와 헤어질 때면 나는 덤덤한 척했지만 집에 오는 길에 펑펑 울었다. 


'다시는 엄마랑 떨어지기 싫어서.'


남편이 미국 사람이니 외국에 가서 살아도 되지 않아라는 질문을 받을 때마다 한국을 떠나기 싫은 이유를 굳이 찾자면 그것뿐이다. 실패하는 딸을 늘 사랑으로 다독인 엄마. 이기적인 딸을 또다시 믿어주고 모든 걸 헌신으로 바치는 엄마. 엄마한테 미안한 건 엄마의 헌신을 당연하게만 생각해왔다. 엄마의 헌신이 얼마나 소중하고 특별한지 그리고 남편을 통해 알게 되었다. 




엄마는 딸의 남편인 사위에게도 늘 헌신을 다했다. 남편을 처음 만난 순간부터 지금까지 늘 존중과 정성으로 남편을 대하였다. 누가 고양이가 아니랄까 봐 남편은 물론 처음엔 엄마를 경계했지만 엄마의 헌신과 사랑에 마음의 문을 활짝 여는 걸로도 부족해 그 문을 모두 부수어 없애 버렸다.   


그냥 심심할 때마다 엄마한테 전화를 걸어

"MOM, 지금 뭐해요? 밥 먹었어요." 묻는다. 

어느 날은 전화를 끊으면서 

"MOM~ 사랑해요. "라고 말하기도 한다. 


딸보다 사랑한다는 표현을 더 많이 하는 사위. 어떻게 해서 남편은 이토록 친정엄마를 따르고 믿고 사랑하게 된 걸까. 작은 것 하나라도 남편이 소외감이 들지 않게 엄마는 남편을 챙겼다. 한 번쯤은 신경이 곤두설 것 같은 상황에도 엄마는 한 번도 남편을 탓하지 않았다. 엄마는 딸과 사위로 우리를 대하지 않았다. 엄마는 딸은 딸대로 사위는 아들처럼 대했다.  


남편 때문에 *키토 다이어트를 무리하게 하다가 응급실에 실려간 적이 있었다. 남편이 바들바들 거리며 응급실에서 엄마 아빠를 기다렸다. 남편이 바들바들거린 이유는 내가 혹 어떻게 될까 봐 여서도였겠지만 딸을 이렇게 만든 걸 보면 장모님, 장인어른에게 얼마나 실망감을 드릴까에 대한 걱정이 커서였을 것이다. 엄마, 아빠가 곧 응급실에 달려왔다. 놀란 기색 역력하며 달려올지 알았는데, 이래서 어른인가 보다는 생각이 들만큼 차분하게 엄마 아빠가 나에게 다가와선 말했다.   


"괜찮아~~ 걱정 마. 별거 아닐 거야."

그러고는 바로 옆에서 사시나무처럼 떨고 있는 남편에게 다가갔다.

"존도 많이 놀랐지?" 

엄마는 남편의 두 손을 꼭 잡았다. 

"제가 너무 무리하게 시켜서... 죄송합니다..." 

울먹이는 남편의 목소리가 정신없는 와중에도 들렸다. 

"괜찮아 괜찮아."

그런 남편을 다독이는 엄마, 아빠의 목소리를 들렸다. 


이러한 사건들은 가족의 매듭을 더 단단하게 한다. 다시 한국에서 가족이 생길 거라는 것을 남편은 쉽게 기대하지 못했을 텐데, 그런 남편에게 이제는 한국에서 가족이 생겼고 그 가족이란 울타리 안에서 온전한 사랑을 받게 되었다. 그것이 너무나 소중하기를 알기에, 그것을 잃을 수 없기에, 남편은 가끔 과도하게 반응할 때도 있다. 전보다 처우가 좋아진 직장으로 이직하고 얼마 안 돼서 회사가 무척이나 힘들다며 매일매일 시무룩하게 있는 남편이 어느 날 또 눈물을 글썽이며 말을 꺼냈다. 


"내가 회사에 잘리면, 엄마 아빠가 날 미워하시겠지? 나를 안 보시면 어떡해. "  


"회사에서 잘렸다고 우리 엄마 아빠가 자길 미워하겠어? 얼마나 자기를 위로하겠어. "

조금은 안심한 듯한 표정의 남편. 하지만 그걸로도 부족할 것 같아 한마디 더 보탰다. 


"안심해도 돼. 잘못했거나 실수해도 버리지 않아. 가족이 자나" 


아무리 큰 잘못을 해도 엄마 아빠는 나를 버리지 않을 것이라는 건  나에겐 의심조차 필요 없는 생각들인데. 남편은 무언가 실수나 잘못을 해서 사랑받던 누군가에게 버려질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늘 하고 있는 걸까. 자기 친자식을 버리는 부모도 있는데 미운 사위를 안 보는 일쯤 일어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일까. 




이사 입주일을 맞추느라 남편과 나는 두 달 동안 친정에 들어가 살 기회가 생겼다. 엄마를 너무너무 좋아하는 남편은 친정에 들어가기 전부터 신이 나 있었다. 두 달 동안 엄마는 사랑과 정성으로 사위를 아들처럼 챙겼고, 남편도 그런 친정엄마에게 감사로 답했다. 친정에 들어가 사는 두 달 동안 남편은 얼마나 엄마가 자신에게 매일매일 헌신적으로 자기를 대하는지를 다시 한번 확인했다. 그것은 남편에게 돌아가신 양어머니를 생각나게 했고, 친엄마도 어땠을까 생각해보게 했고, 새로운 엄마가 생긴 것 같다고 남편은 이야기했다. 


새로운 집 입주가 시작되었는데도, 남편은 며칠만 더 친정에 있자고 했다. 여기가 편하다고. 엄마와 헤어지는 걸 그렇게 아쉬워하더니 결국 새집 입주 예정일 2주 후에나 마지막 짐을 챙겨 새집에 들어갔다. 두 달간 감사했다며 엄마한테 삐뚤삐뚤 손편지와 사이즈가 한참 안 맞는 앞치마를 선물로 남기고 갔다.   





남편은 친정엄마를 '어머니'로 부르다 얼마 전  '어머니'는 좀 먼 느낌이 들어 싫다고 했다. 그러더니 나에게 몇 번이고 나의 의견을 물었다. 


"이제 엄마라고 부르고 싶은데... 아니면 'MOM'이 괜찮나? "

"그래 그럼 그렇게 불러봐."

"그래 봐야겠다." 

라고 다짐은 했는데 한동안은 쑥스러운지 실행에 옮기지는 못하는 것 같았다.

그러다 어느 날 엄마 집에 놀러 간 날이었다.


"MOM~탄산수 있어요?" 


드디어 엄마를 'MOM'이라고 불렀다. 그러고선 성공했어! 란 눈빛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사랑스러운 아들 같은 사위를 두어서 엄마는 좋겠다. 


'엄마'가 아닌 'MOM'이라고 부르길 선택한 남편. 미국에 입양 간 이후로 '엄마'라고 한 번도 불러본 적이 없을 테니 '엄마'는 그저 그에게 있어 '코끼리'같은 단어이겠지. 남편에게 있어 'MOM'과 '엄마'가 의미하는 차이는 비교할 가치조차 없는 것. 남편에게 있어 'MOM'은 진짜 엄마를 의미하는 말이고, '엄마'란 단어는 그저 '코끼리'일뿐이다.




*키토 다이어트 : 탄수화물을 적게 섭취하고, 지방을 통해 하루 필요한 열량의 75~80%를 섭취하는 저탄고지방식의 다이어트 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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