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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alli Oct 22. 2021

하키를 좋아하던 아이

남편을 따라 아이스링크에 왔다. 

*퍽이 날아온다. 시원하게 뚫린 빙판을 가르고 깡충깡충 뛰어오는 사람이 있다. 분명히 스케이트를 신었는데도, 깡충깡충 뛰어간다. 퍽이 가까이 오자 하키 스틱으로 쳐 용케도 공중에서 받아내더니 이내 슛을 한다. 슛은 순식간에 골리의 어깨너머를 지나 네트를 흔든다.  


남편의 경기를 보러 갈 때마다 숨을 죽이고 경기를 응원한다. 한국에 몇 없는 외국인 아마추어 아이스하키팀 몇 곳에서 가끔 경기를 하는데, 정말 애매한 시간에 멀리서 경기를 하는 터라 - 예를 들면 일요일 밤 11시 인천에서와 같은  -  연애 초반에는 잘 보이려고 노력하느라 자주 보러 갔지만 지금은 자주 안 간다. 참 배려 없는 시간이라 투덜거리면서도, 스포츠가 없으면 인생이 없다는 남편을 위해 일요일 저녁 가족의 시간을 하키에 양보하기로 했다.


서울에서 인천까지 차를 몰고 달려가, 고작 몇 분을 뛰고 다시 차를 타고 돌아온다. 다음날 아침부터 직장에 가야 하는데, 별 개의치 않아하는 것을 보면 신기하다. 나는 직장에 다닐 때, 보통 일요일 오후 세시 정도부터 내 주말이 벌써 끝났다는 생각에 우울모드로 돌입했었는데, 남편에게는 일요일 밤 11시까지도 본인의 주말 이벤트가 끝나지 않은 것이니, 주말이 남보다 더 길어 좋겠다.


남편을 쫓아 수도권의 수많은 아이스하키장을 다녀보았는데, 정말 하나같이 춥고 춥다. 겨울에는 하키장 밖도 추운데, 안도 난방이 잘 안되어 춥고, 여름에는 하키장 밖은 따뜻하지만, 안은 춥기 때문에, 롱 패딩을 꼭 챙겨가야 한다. 남편 덕에 롱 패딩과 장갑, 털모자는 우리 집에서는 겨울용품이 아니라 사계절용이다. 한여름에도 하키 응원 갈 때는 롱 패딩을 꺼내 입어야 하기 때문이다. 남편은 경기 후 특히 겨울철엔 춥다며, 드라이어와 휴대 가능한 온열 난방기를 챙겨가기도 한다.


목동 링크장은 낡았지만, 거대하고 원조랄까 대장 느낌이다. 선학 아이스링크는 시설은 가장 신식이고 깔끔하지만 좀 춥다. 안양 링크장은 제일 자주 따라다니던 곳이라 정이 간다. 성남시에 있던 링크장은 유일하게 기억에 남았던, 화장실이 다른 데에 비해 매우 따뜻했던 곳이었다. 관람하다 추워서 지치면 혼자 화장실에 들어가 몸을 녹이고 다시 나왔다.   


관객 없는 일요일 11시 경기에 가면 휑한 관객석은 모두 내 차지이다. 높은 곳에도 앉아보았다, 낮은 곳에도 앉아보았다, vip석으로 보이는 곳에도 앉아보았다, 링크에 바짝 서서 구경하기도 한다. 약 1시간 반의 시간이 전혀 쓸쓸하지 않다. 모든 관람석이 내 차지였다.


일 년에 한두 번 관객들로 북적거리는 날도 있다.  

'김치 컵’이라는 매해 추석에 열리는 외국인 아마추어 토너먼트 경기 때이다. 사실 남편이 나를 처음 하키장에 데려간 날은 큰 대회 날이었다. 일단 하키 경기도 처음이었는데, 한국인 없이 빼곡히 찬 경기 관람실-지하 작은 링크장에서 열린 경기라 관람석이 매우 협소했다- 에서 하키의 룰도 모른 채, 뭘 어떻게 응원하는지도 모른 채, 날아오는 공이 퍽이라고 부르는지도 모른 채 홀로 경기를 관람했다. 그때의 그 공간과 나는 참 어색했다. 이 공간에 어울리지 않는 사람은 나뿐인 듯했다. 그러나 이제는 하키 경기 관람에는 능숙하다.


아이스링크는 나에게 결코 낯선 장소가 아니었다.

초등학교 6학년 때까지 스피드 스케이팅을 했었는데, 엄마와 함께 방방곡곡을 스케이트와 함께 돌아다녔다. 안타깝게도 스케트에 관한 별 좋은 기억은 남아있지 않다. 기억나는 거라곤, 스케이트 끝나고 육개장 라면을 늘 사 먹었다는 것 -비슷한 예로 수영장에 관한 기억은 닭꼬치였다. 억지로 끌려다니다, 나도 이제 우아하게 피겨스케이팅을 하고 싶다고, 초등학교 5학년 때 엄마에게 선언을 하였다. 그러나 피겨로 갈아탄 후 피겨 스케이팅에 별 재능과 흥미를 느끼지 못하고 1년도 안되어 그만두게 되었다. 나와 아이스링크의 연은 그렇게 끝이 났다.  


남편 덕분에 다시 링크에 돌아왔을 때, 많은 기억들이 떠올랐다. 얼마나 스케이트가 재밌었었는지, 스트레스였었는지에 대한 기억은 그리 중요치 않았다. 육개장 라면이 그토록 맛있었었다는 기억과 함께 생각난 건 엄마였다. 내가 스케이트를 타는 동안 저 멀리서 나를 애타게 보고 있을 엄마를 생각해 본다. 엄마의 아이스링크에 관한 기억은, 대부분 나일 것이다. 관람객으로써.  


어느새 내가 엄마의 상황이 되어버렸다. 시간이 아깝다고 생각해본 적이 없다. 온전한 희생은 아니다. 나는 그 순간들을 즐기고 있기 때문이다. 남편이 골을 넣거나 멋있게 스케이팅을 하는 순간만이 중요한 것은 아니다. 멋진 남편의 순간만큼 함께 일요일 밤 11시에 차를 타고 링크장에 향하는 길, 관람석에서 외롭게 남편의 경기를 관람하는 것, 경기가 끝나고 함께 돌아오는 길은 나의 시간이기도 하다.


남편은 여러 아마추어 팀에서 하키를 뛴다. 이태원의 유명한 펍이 오래전 서포트를 시작해 생겨나게 된 'Geckos 개코스' 란 팀에서 소속감 있게 뛴다. 캐나다인과 미국인이 대부분이고, 교포, 한국인, 그 외 국적의 사람들도 아주 간혹 섞여있다. 한국에 오래전에 와서 정착한 외국인들이 가장 많은 것 같고, 단기적으로 거주하는 미군이나 영어강사들도 꽤 있다. 캐나다에서는 하키를 처 본적도 없는데 한국에 와서 처음으로 하키를 접했다는 개코스의 팀의 주장 기비는 팀의 정신적 지주이기도 하다. 그는 해마다 팀과 팀원들의 가족이나 연인들을 초대해 재미있는 크리스마스 파티를 준비한다. 대부분은 먹고 마시고 소리 지르는 일이지만, '올해의 수상식' 같은 서프라이즈도 나름 재미있다. 


가끔 '인천 아이스홀' 이란 팀에서도 뛰는데 그래서 남편과 함께 연말엔 꼭 두 개의 하키 연말 파티에 참가한다. 아이스홀 팀과는 주로 인천에서 어울리는데 팀과 어울릴 때마다 서울에 돌아올 생각은 꿈도 못한다. 팀의 주장인 캐나다 교포 친구 데이브의 멋진 야경이 보이는 송도 아파트 게스트룸을 맘대로 예약하고 마음껏 놀다 오곤 한다. 



"근데 왜 하키를 시작했어 “

남편에게 물었다.


"음… 잘 모르겠어... 그냥 아빠가 데려가셔서 시작한 거지~."



남편이 어렸을 때, 어버님이 어느 날 중고 아이스하키 장비를 사다 주셨다 한다. 그때부터 매주 남편은 아버지를 따라 스케이트장을 다녔다. 스케이트 장비를 신는 작은 동양인 꼬마를 데리고 오는 아버지는 꽤 주목을 받았을 것 같다는 상상을 해본다. 아버님의 아이스링크에 대한 기억은 남편과 많은 연관이 있겠지. 아버님은 맹렬한 하키 팬이시다. 하키뿐만 아니라, 라크로스, 골프, 슈퍼볼 등의 스포츠의 열렬 팬이시다. 아버님은 남편이 어릴때부터 스포츠와 친해지도록 누구보다 열심히 뛰어 다니셨다. 지금도 처음 남편을 축구클럽에 데려간 날을 정확히 기억하고 계신다. 스포츠에 흥미를 보이는 남편을 위해 그 다음엔 농구를, 그 다음엔 야구를 그 다음엔, 라크로스와 아이스하키에 데려가 주었다. 


나중에야 들은 이야기인데, 아버님의 아버지인 남편의 할아버지께서 열혈한 스포츠맨이였셨고, 스포츠는 그 부자관계를 엮는 강력한 연결고리 같은 존재였다. 아버님은 그 끈을 자식에게도 이어 쥐어주고 싶어 하셨다. 덕분에 지금도 남편과 아버님은 스포츠 이야기로 밤을 샐 수도 있고 그 둘은 스포츠를 통한 유대감으로 강력하게 엮여있다. 


남편의 아마추어 하키 토너먼트를 응원하러 한국에 놀러오신 시아버님을 모시고 몇년 전 오키나와에 간적이 있다. 남편이 대학 졸업하고 바로 한국에 왔으니, 아버님은 남편의 경기를 대학교 이후 본 적이 한번도 없으셨을것이다. 아버님은 오키나와에서 경기가 열리는 3일 내내 링크장 옆을 떠나시지 않으셨다. 나야, 아무리 남편의 경기지만 하루종일 이어지는 경기에 조금 지쳤다. 오키나와의 링크장은 생각보다 매우 낙후되어 있었고, 관람석 조차 거의 없었다. 서서 경기를 봐야 하는데 무섭게 날아오는 퍽으로부터 보호받을 방어막 조차 없어 가까이서 구경조차 할 수 없었다. 아버님은 그런 것들은 신경도 쓰지 않으시는 듯, 퍽이 가깝게 날아다니는 링크에 바짝 붙어 아들의 움직임에 한시도 눈을 떼지 않으셨다. 골을 넣는 아들을 보고 환호하셨다. 


"Hey, this is my dad"

(여기 우리 아빠야 )


현장에서 조인한 같은 팀 무리에게 다가가 남편이 아빠를 소개한다. 남편이 입양인이란 걸 아는 팀 멤버들도 있었지만, 교포라고 알고 있던 멤버들의 눈이 갑자기 놀라 휘둥그래 졌다. 아무리 봐도 닮지 않은 둘을 번갈아 보며 잘못들었나, 재차 확인하고 싶지만 실례일까, 티를 안내려고 노력해도 티가나는 팀 멤버들의 얼굴을 멀리서 바라보며 터져 나오는 웃음을 애써 참았다. 


링크에 바짝 붙어 응원하는 아버님에게 지역신문 기자가 다가왔다. 아버님이 아들의 경기를 보러 오셨다 하니, 기자가 아버님을 인터뷰하고 싶다 한다. 

아버님은 자랑스럽게 남편을 가리키며 말씀하셨다.


"That's my son."

(저쪽에 있는 사람이 제 아들이에요)


일본인 기자는 역시 둘을 번갈아보며 다시 한번 백넘버를 확인하였다. 아버님은 남편에 대한 이야기를 기자에게 끊임업시 늘어놓으셨다. 결국 -대화 내용과는 별 상관없지만- 아버지의 인터뷰 내용이 짧게 지역신문에도 실렸다. 아버님은 아들의 경기를 단 하나도 놓치지 않으셨고 자신의 블로그에 빠짐없이 올리셨다. 성인이 되어 한국에 돌아간 아들의 하키 골 순간을 12년 만에 다시 본다는 것. 그것만으로 벅차 이 여행길에 오르셨으리다.  


스포츠는 부자관계를 잇는 중요한 끈이었다. 아버님은 남편에게 가르칠 수 있는 모든 스포츠를 가르쳐 주었다.



*퍽 : 아이스하키 경기에서 쓰이는 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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