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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샐리드부아 Oct 21. 2021

인간 카멜레온

그 남자 그 여자, 부부가 되다.

<Part 1. 그 여자>

누군가가 일본은 나에게 어떤 존재냐고 묻는다면 서슴없이 답할 수 있다. “일본은 내 청춘의 고향이야. 단지 미워할 수도 단지 사랑할 수만도 없어.”라고. 난 일본을 사랑했고, 일본을 미워했다. 완전히 일본에 터전을 잡기 시작한 건 대학교 유학생 때였지만, 아빠의 일 때문에 어릴 때부터 일본을 자주 접했고, 고등학생 때부터 방학 때면 나 홀로 약 한 달 동안 일본에 머물며 입시미술학원을 다녔다.

 

일본을 왜 그리 사랑했냐고. 아빠가 일본에 자주 출장을 다녔는데 그때마다 선물을 정말 트렁크 하나를 꽉 채워 가져오곤 하셨다. 아빠가 출장에서 돌아오는 날을 손꼽아 기다렸다. 아빠가 트렁크를 열고 하나 둘 선물들을 꺼내기 시작한다. 찍어도 찍어도 계속 찍히는 헬로우 키티 스탬프, 아기자기 먹고 싶게 만드는 도시락 모양 지우개, 세일러문이 그려져 있는 필통… 그러나 나이가 좀 들자 J-POP에 빠졌다고 *아무로 나미에는 나의 우상이 되었다. 그리고 초등학교 6학년 때 일본 축구의 전설 *나카타 히데토시에 홀딱 맘을 뺏겨버렸다. 나카타가 나오는 모든 신문이며 잡지를 스크랩했다. 나카타의 등번호 8번. 지금도 난 8이 옆으로 누운 인피니티 심볼을 가장 좋아하는데, 은연중에 8을 좋아해서 일거다. 난 일본을 사랑했다. 일본 사람이 되고 싶었다. 일본의 모든 게 좋아 보였다.


나는 중학교 3학년 때 조기 유학의 붐을 타고 호주 시드니 교외의 사립 여학교로 유학을 갔다. 20년 전의 호주는 이상하리만큼 다양성이나 다문화에 익숙할 것 같으면서도 익숙하지 않았다. 나는 먼저 이민 가 있던 외삼촌네 집에 들어가 살았는데 내가 살던 시드니의 Turramurra라는 동네는 부유한 백인들이 대부분인 곳이었다. 집에서 차로 10분 정도 떨어져 있는 학교도 마찬가지였다. 같은 학년의 동양인은 나를 포함해 6명이 전부였다. 동양인은 거의 동양인들끼리만 몰려다녔는데 그것은 암묵적이고도 거스를 수 없는 선택지였다. 학교에 입학한 첫날부터 내 의지 따윈 상관없이 친구들이 정해져 있었다. 피부색으로 친구가 정해지는 것이었다. 


어찌 된 일인지 6명의 동양인 중 한 명은 백인 무리에 들어가 있었는데 동양인 친구에게 물었더니 “쟨 우리랑 좀 달라. 해외 입양인이거든. 엄마 아빠가 호주 사람이야.”이라는 답을 들었다. 인생에서 처음으로 해외입양인이라는 존재를 마주하는 날이었다. 그날은 몰랐다. 미래의 나의 남편이 지금 미국에서 누군가에게 그렇게 불리고 있을 줄은. 


유학생은 물론 0명이었기 때문에, 영어를 모국어로 하지 않는 사람은 나뿐이었다. 분명 영어를 못하는 사람을 마주한 게 처음일지도 모르는 그들 사이에서 난 한순간에 바보가 된 느낌이었다. 15살이란 어린 나이에 처음으로 절대 뚫릴 것 같지 않은 유리천장을 올려다보았다. 학교에서 일주일 동안 내가 바보가 되지 않는 시간은 두 번 뿐이었다. 첫 번째로 미술시간, 두 번째로 일본어 수업일 때다. 수학도 잘하지만 계산기 쓰는 법이 익숙하지 않아 바보가 되었다. 난 완벽히 겉도는 이방인이 되었다. 


난 일본어 수업시간만을 손꼽아 기다렸다. 학교에서 유일한 동양인 선생님이자 나 말고 영어를 모국어로 쓰지 않는 유일한 한 사람은 일본인 선생님뿐이었다. 그녀는 학교 적응에 힘들어하는 나를 수업 때마다 따뜻하게 맞아 주었다. 난 일본어 수업 때마다 일본인 친구와 일본 잡지를 보고, 잡지에 나온 루즈 삭스를 따라 신고 방과 후에 시내에 나가 파라파라 댄스를 구경하고 프리쿠라를 찍었다. 일본은 나를 호주에서 으쓱하게 만들어 주는 유일한 존재이자 유일한 나의 편이었다. 일본에 대한 집착과 애정은 더욱 깊어만 갔다.

 

‘ 일본에 가야겠다. 일단 피부색으로 대놓고 차별받진 않을 테니.’

 

난 그렇게 호주에서 1년간의 학업을 간신히 채운 후, 바로 한국에 돌아왔다. 그리고 2년 뒤, 일본에 완전히 정착했다.


일본에 가면 차별을 덜 받을 거라는 나름의 직감은 어느 정도 맞기도 했고 틀리기도 했다. 호주에서 '너는 우리와 달라!'라는 말을 면전에 대고 듣는 느낌이었다면, 일본에서는 처음에는 내가 외국인인지 구분을 못하다가, 내 이름을 보고 한국 사람인 걸 알아채거나, 한국인 특유의 내 억양을 듣고는 갑자기 "한국인(혹은 외국인이라)이라 안됩니다~"라며 '너는 우리가 될 수 없어!'라고 벽을 치는 느낌이었다. 왠지 나에겐 후자가 더 슬펐다. 그토록 좋아했던 일본에게 거부받는 것은 정말 힘든 일이었다. 


일본에서 대학생활과 직장생활을 거쳤지만 해를 거듭할수록 나는 그 사회에 동화되기보단 튕겨져 나오는 자신을 발견하게 되었다. 완전히 그 사회에 속하고 싶었지만 '너는 달라'라고 말하는 사회는 섭섭함과 좌절감으로 일본을 더욱더 애증 하게 되었다. 그러다 어느 순간부터 모든 것을 내려놓고, '그 어디에 완벽히 속할 필요는 없잖아. 그냥 새로운 환경에 따라 나를 변화시켜 어느 정도만 맞춰 살자. '라고 현실을 인정하게 되었을 때 일본 생활이 편해지기 시작했고 마음도 가뿐해졌다. 


돌이켜보면 지금껏 내가 완벽하게 속하는 곳은 없었을지도 모른다. 앞으로 또 다른 새로운 곳에 가도 마찬가지일지도 모른다. 어디에 있던 어느 정도껏 맞추며 살아갈 뿐이다.  




<Part 2. 그 남자>

남편은 일본을 사랑한다. 증오 따윈 없는 일방적인 사랑이다. 남편에게 왜 일본을 그토록 좋아하냐고 묻는다면 서슴없이 답할 것이다. “일본은 너무 쿨해.”라고. 남편은 ‘카라테 키드’와 ‘(오리지널) 닌자터틀’에 매료됐었고,  플레이스테이션은 그의 최고의 장난감이었다. 코지마 히데오는 남편의 히로였다. 소니와 파나소닉은 80년대~2000년대 초까지 세상에서 제일 쿨한 전자제품들을 만들어냈다. 일본은 같은 동양인으로 자부심을 갖게 하는 유일한 것이었다. 일본을 통해 남편은 함께 쿨한 것에 함께 속할 수 있었다. 같은 시절 한국은 단지 나를 버린 나라였다. 애정도 관심도 가질 이유가 없었다. 한국 이름을 억지로 받았지만, 큰 의미는 없었다. 읽지도 쓰지도 누군가가 불러주지도 않는 이름이었다.

 

'피부색 꿀색'이라는 다큐멘터리 애니메이션을 본 적이 있다. 해외 입양인 디렉터가 만든 작품인데, 그가 말하길 많은 한국인 해외 입양인들이 일본이라는 나라에 집착하거나 동경한다고 한다. 그 이유가 나를 버린 나라인 한국에 대한 복수심과 애증의 잠재의식 때문이라고 하는데, 한국과 숙명적인 경쟁 구도면서도 경제적으로 우위인 일본을 통해 우월함을 느끼고 이 때문에 일본에 본의 아니게 빠져든다고 했다. 남편에게 이 이야기를 해주었더니, "에잇, 설마."라고 부정을 했지만, 지금껏 생각 못해봤던 누군가의 통찰을 듣고는 조금은 놀라 하는 것 같아 보였다.


우린 아주 어렸을 때야 부모님이 소개해준 친구랑 허물없이 놀다가도 사춘기가 오고 모든 것에 민감해질 나이가 되면 어느 순간부터 자신이 친구를 선택해야 한다는 것을 자연스럽게 배운다. 남편은 나이를 먹어가면서 자신이 놓인 환경에서 자신의 설 곳이 점점 변화하고 있다는 것을 점차 느끼게 되었다. 한 때는 친하게 지내던 백인 친구들이 점점 자신을 동양인이라는 것을 인식하게 시작했다. 남편은 고등학생 때 라크로스팀 에이스가 되어 큰 활약을 했는데도 왠지 모르게 교내 신문 인터뷰는 자신보다 훨씬 실력 없지만 키 크고 훤칠하기만 한 백인 친구가 대신했다. 아무리 스포츠를 잘해도, 학교에서 인기 있는 학급 친구들도 자신에게는 관심이 없어 보였다. 뭔가 예전에 느끼지 못하는 것들을 새롭게 느끼기 시작했고 그것이 자신의 피부색과 관계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기 시작했다. 


대학 졸업식날, 남편은 반 친구가 일본에 영어 선생님으로 가게 되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귀가 솔깃해져 집에 와서 인터넷으로 찾아보았다. 안타깝게도 친구가 말한 프로그램은 모집이 마감되어 있었다. 그 대신 옆 나라 한국으로 가는 프로그램은 아직 참가자를 모집하고 있었다. 남편이 한국에 오게 된 이유는 단지 그 하나뿐이었다. 자신의 과거에 대한 궁금증을 해결하기 위해서도, 친부모를 찾기 위해서도 아니었다. 모두가 으레 기대하는 아무런 드라마틱 스토리텔링과는 거리가 멀었다. 어린 시절 동경해왔던 일본이라는 나라의 옆 나라 한국. 어느 정도는 비슷할 것이라는 기대로 남편은 한국 땅을 다시 밟은 것이다.


남편이 약 14년 전 한국에 처음 돌아왔을 때 한국은 기대 이상으로 남편을 반겨주었다. F4 동포비자를 주고, “해외입양인입니다.”라는 한마디에 자신이 잘못한 것도 아닌데 동정심에 남편에게 친절하게 대해주는 사람들을 만났다. 남편은 그런 한국에 마음의 문을 쉽게 열었다. 한국인처럼 보이는 옷을 입고 머리를 하고 한국인처럼 말하려고 노력했다. 택시를 타거나 우연히 모르는 사람과 대화를 시작했을 때, 남편의 외국인 엑센트의 한국말을 듣고 어느 나라에서 왔느냐, 교포냐 대화가 오가다, 남편이 자신이 해외입양인이라고 소개를 하면, 그들의 눈과 말이 한없이 부드러워지곤 했다. 사탕이나 간식을 건네주며 이야기를 더 듣고 싶어 했다. 


남편은 처음 몇 년은 한국에서 영어 선생님으로 일하다가 몇 년 뒤 전공을 살려 광고회사 쪽에 취직했다. 거의 16년을 한국 직장인으로 살아왔다. 영어를 주로 쓰는 업무를 하지만 한국 직장에서 일하다 보니 어느 정도의 한국어 실력도 요했다. 남편의 한국어는 완벽하진 않지만 그래도 어쨌건 한국 직장과 사회에서 16년간 생존했고 자신의 위치에서 잘 살아가고 있으니 사실 칭찬을 받아도 될만한데, 주변의 기대치는 점점 높아져만 갔고 그것에 부응하지 못할 때면 남편은 푹 기가 죽었다.


"사람들이 내가 한국사람처럼 생기고, 입양인이라서 한국사람처럼 한국어를 완벽하게 말하고, 한국인처럼 완벽하게 행동하는 걸 기대하는 것 같아. 내가 대놓고 외국인처럼 생겼으면 좋겠어. 난 사실 얼굴만 한국인이지 부모님도 외국인이고 속도 외국사람이란 말인데 말이야. "


한국에서 긴 사회생활을 하고, 한국을 알아가면 갈수록 남편은 한국에 완벽히 속할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앞으로 몇 년 후면 미국에서 인생을 보낸 시간보다 한국에서 보낸 인생의 시간이 길어질지도 모르는데 남편은 아직도 한국에서 이방인이라 느끼며 살고 있었다. 미국에 돌아가도 비슷할 것이다. 얼마나 노력한들 자신은 이 사회의 가장자리를 겉돌고 있는 이방인이라 느낄 수밖에 없다.


한국은 남편을 미국으로 입양 보낼 때, '잘 가!'라는 인사를 했고, 남편이 다시 한국에 돌아왔을 때, '오! 미안해 다시 돌아왔네. 잘해줄게'라고 동정심과 친절을 베풀었다. 하지만 역시 시간이 지나니, '근데 넌 좀 달라. 여기 속하고 싶으면 좀 더 한국인처럼 행동할 수 없겠니?'라고 말하기 시작한 것이다. 


남편에겐 한국을 애증 할 충분한 이유가 있었고 난 그것을 함께 충분히 공감할 수 있는 경험을 갖고 있었다. 우린 급속도로 친밀해졌다. 우린 그것이 무언지 알고 있었다. 다가가려 하면 할수록 밀려나는 느낌. 어딘가에 억지로 속해보려 안간힘을 써 보아도 역부족이라는 느낌. 너는 우리와 다르다고 말하는 사회. 완전히 속할 수 없는 곳. 자신의 환경에 따라 자신을 바꾸어 눈에 띄지 않게 위장하는데 능해진 우리는 마치 인간 카멜레온이다.


전통혼례와 발리식 웨딩으로 치룬 우리의 결혼식



*아무로 나미에 : 90년대부터 활약해온 일본 J-POP의 전설의 여가수

*나카타 히데토시: 일본 역사상 최고의 선수로 평가받고 있는 축구 영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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