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안에 균열이 생기기 시작했다
왜 항상 다음 스텝을 준비해야 할까?
어렴풋이 기억나는 순간은 초등학생 입학부터였던 것 같다. '이제 초등학생 되니까, 밥도 잘 먹고 선생님 말씀도 잘 들어야지.' 정확한 문장은 기억 안 나지만 대략 이런 맥락이었다. 초등학생이 되니 뭔가를 더 잘해야 한다는 느낌.
한국인의 DNA가 서서히 새겨지는 순간이었다.
이후로도 비슷한 느낌으로 늘 다음을 준비해야 한다는 걸 무의식적으로 느꼈다. 초등학생 고학년이 되니 조금 더 공부를 해야 했고, 중학생을 입학할 때는 피아노를 취미로 남길지 전공으로 할지 조금은 일찍 진로를 정해야 하기도 했다.
나갔던 콩쿨에서 대상 두어 번, 준대상, 특상은 탔지만 나는 알고 있었다. 전공까지 할 정도는 아니라는 걸. 내 흥미도 능력도 딱 거기까지였다. 중학생 때부터는 여느 학생들과 비슷했다. 학생 신분으로 공부가 1순위여야 했고, 고등학생 때가 되니 그 강도는 더 심해졌다.
고등학생이 되어 처음 겪은 스트레스성 편두통으로 일시적으로 시야가 좁아진 경험은 아직도 잊을 수 없다.
아직 해가 뜨지도 않은 어스름 새벽에 나가 야자까지 끝내고 나면 어김없이 밤이었다.
해를 보지 못하고 학교에서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야 하다니. 막 고등학생이라는 신분을 가진 나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본능적으로 나를 방어하기 위해서였을까. 아니면 서서히 가족들과의 시간에서 내가 점점 빠진다는 걸 인지해서였을까. 아니면 정말 해를 못 봐서였을까.
특별할 것 없던 기술 가정 시간에 머리가 빠개질 정도로 아프더니 순간적으로 옆 시야가 좁아졌다. 나도 모르게 수업 시간의 정적을 깨고 손을 들고 외쳤다.
"선생님, 저 눈이 안 보여요."
지금 생각하면 선생님께서 얼마나 놀라셨을까. 하지만 당시에는 선생님의 기분까지 살필 여력이 없었다. 한 번도 경험 못 한 내 몸의 반응에 그저 눈물이 나올 뿐이었다.
그 길로 학교는 조퇴하고 엄마와 병원을 갔다. 결과는 스트레스성 편두통. 편두통이 심할 경우 순간적으로 시야가 좁아질 수도 있다는 걸 그날 처음 알았다. 이때를 시발점으로 환경이 확 바뀔 때면 편두통이 종종 찾아오기도 했다.
이런 한 바탕 소동을 벌이고서는 역설적이게도 금방 고등학생 생활에 적응했다. 아침 일찍 나갔다가 밤늦게 돌아오는 생활이 곧 고등학생 신분으로 당연한 일이라는 생각을 할 정도였으니. 인간은, 아니 한국인 DNA의 극강점은 적응력이다.
고등학생 때의 목표는 또 여느 학생과 마찬가지로 '대학 잘 가기.' 내 목표인지, 아니면 당연하게 요구되는 목표인지 가늠도 안 된 채 무조건 좋은 대학을 가야만 성공한다는 막연한 믿음 속에 나를 집어넣었다.
그리고 대학에 가서는 취업을, 취업을 하고 나서는 적당한 때 결혼을. 다음 단계는 언제나 이미 정해져 있는 게임 같았고, 세상은 늘 그 다음을 향해 나를 밀어붙이는 것만 같았다. 그 무의식에 처음 틈이 생긴 건 스물한 살, 처음 떠난 캐나다 여행에서였다.
특히 나이아가라 폭포 앞에 섰을 때. 지금도 슬로우모션처럼 그때의 순간이 생생하게 기억난다. 말로 설명하기 어려운 압도감에 두 눈이 번쩍 뜨인 순간 이런 생각이 들었다.
'와, 이런 세상도 있구나. 내가 알고 있던 세상이 전부가 아니구나.'
내 안에 작은 균열이 생기기 시작한 것이다.
세상을 더 보고 싶다는 마음, 정해진 흐름 밖으로 나가보고 싶다는 마음이 내 안을 뒤덮었다. 그리고 대학을 졸업한 뒤, 나는 다시 캐나다로 떠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