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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성냥 Feb 23. 2021

체리토마토파이/ 베로니크 드 뷔르

생각하기 나름

나는 죽음보다는 장례식을 상상한다.


 솔직히 제목과 표지가 마음에 들어서 고른 책이 맞다. 생각과는 조금 다른 내용의 이야기였는데, 나름의 매력이 있는 책이었다. 이 책은 일기형식으로 쓰여 있는데, 이게 소설인지, 에세이인지 모를 만큼 장면들이 생생하게 묘사되어 있다. 무엇보다 주인공의 긍정적인 힘이 나에게 전달이 돼서 읽는 내내 힐링이었고, 너무나도 평범한 일상을 전달하고 있는데도 다음장, 그 다음장이 궁금해서 계속 읽게 되었다.


 이야기의 주인공은 아흔 살 할머니 잔이다. 남편은 죽고 혼자서 시골에서 지내고 있지만, 이웃 페르낭과 마르셀 부부, 친구들 질베르트, 닌, 투아네트, 자클린, 샹탈, 드니즈, 프랑세트를 만나 카드게임도 하고 차도 마시고, 집안일을 도와주는 앙젤, 정원사, 가끔 들르는 딸과 아들, 손주들을 만나고, 중심가 라팔리스로 운전도 하고 다니고, 매주 십자말풀이도 하고, 성당에도 가고, 계절마다 텃밭에 난 것들로 이것저것 요리도 하고, 앞 산자락 오솔길 산책 운동도 꼬박꼬박 한다. 그래서인지 매일 지루할 틈이 없다. 남은 생이 얼마 남지 않았지만 우울해하기보다는 잔은 주어진 시간을 좋아하는 사람들과 좋아하는 일을 하면서 즐겁고 명랑하게 보낸다. 가끔씩 남편과 옛날 일들도 회상하며 그렇게 봄, 여름, 가을, 겨울을 모두 보낸 1년 동안의 일기를 끝으로, 결국 잔이 원했던 잠이 들면서 죽음에 이르는 장면으로 이야기가 끝난다.


  본문에 이 책의 제목이 된 '체리토마토파이'에 관련된 내용이 등장한다. 잔의 귀여운 실수가 나타난 내용이다. 이 책을 읽고 체리토마토가 방울토마토인 걸 처음 알았는데, 마지막 단락이 정말 명언이었다.

'어차피 옛날에도 없던 정신, 이제 와 잃을 일은 없겠구나.'

 요즘 어떤 단어를 말할 때 이미지만 떠오르고 말이 생각이 안나는 적이 많은데, 지금도 그러고 나중에도 그런다면 오히려 차이가 없어서 다행이다(?)는 생각의 전환을 해본다. 생각하기 나름.


 나이를 먹는다는 건 어찌됐든 변해간다는 뜻이다. 그리고 한해 한해가 점점 더 빠르게 지나가는 것 같아서 마음이 조급해진다. 분명히 나는 무언가 하고 있고, 살아나가고 있는데, 이 방향이 맞는 건지, 내가 놓치고 있는 건 없는지 항상 불안하다. 그렇게 나이가 들어가고 마음의 여유 공간은 좁아진다.

 잔의 나이듦에 대한 생각 중에서 '살날이 줄어들수록 마음이 강퍅해지는 것 같다. 감정도 다른 것들과 마찬가지로 닳아빠지고 무뎌진다. 분노는 꺾이고, 애정은 잠들고, 연민은 시든다.'라는 부분에 참 공감이 갔다. 모르는 어떤 것을 놓치는지 불안해할수록 주변의 가까운 것을 놓치게 되고야 마는 것이다. 그럴 때 오히려 차분히 내 옆에 있는 것들을 다시 새롭게 바라보고 감사함을 느낄 수 있다면, 나이가 드는 것도 꽤 재미가 있을지도.


 잔은 지인의 죽음을 겪으면서 자신의 죽음에 대해서 생각한다. 잔은 '나는 죽음보다는 장례식을 상상한다. 그 편이 기분이 좀 낫다. 장례식에는 꽃과 노래가 있다. 적어도 고인에게 가장 힘든 순간은 이미 지나고 난 후다. 아름다운 음악이 있는 장례미사였으면 좋겠다. 슬프고 처지는 분위기가 아니었으면 좋겠다.'라고 생각한다. 죽음을 주체적으로 생각할 줄 아는 잔의 모습이 멋있었다. 남들의 장례식만 생각해봤지, 정작 나의 장례식에 대해서는 깊이 생각해본 적이 없었는데, 내 장례식이니까 내가 참여하는 게 당연한 것임을 깨달았다.


 어떤 평범한 할머니가 하루하루를 열심히 살아내는 모습을 엿보는 기분으로 책을 읽어가다 보니 점점 기분이 좋아지는 나를 발견할 수 있었다. 마음이 따뜻이 데워지는 느낌이다. 중간중간 프랑스의 계절과 여러가지 식재료들, 가정요리도 만날 수 있어서 읽는 재미가 쏠쏠했다. 잔은 주변 사람들과의 관계에도 진심을 다하고, 스스로도 소중히 여길 줄 아는 사람이었다. 생의 마지막 순간, 편안한 미소로 죽음을 맞이할 수 있는 사람. 나도 이렇게 나이가 들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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