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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성냥 Jan 30. 2021

체호프 단편선/ 안톤 체호프

인간의 생애 의지에 관하여

그는 울며 웃었고, 이내 먹을 것을 주지 않는다고 투정하기 시작했다.

 예전에 대학교 희곡 수업에서 과제로 안톤 체호프의 '갈매기'를 보러 저녁쯤 명동극장에 갔던 적이 있었다. 그때는 내용도 하나도 모르고, '무슨 바닷가 이야긴가?' 하는 생각으로 연극을 보러 갔었는데, 연극이 다 끝나갈 무렵 많은 감동을 받았던 기억이 난다. 그리고 내 좌석이 오케스트라단이 바로 옆에 붙어 있었는데, 뮤지컬도 아닌 연극에서 배경음악의 실시간 연주를 직접 보고 듣는 것도 참 신기했다. 그동안 우리나라 배우가 외국 문학작품을 연기하는 것에 대해서 어색하다고 생각했던 편견이 없어질 정도로 매우 몰입해서 보았다. 지루하고 재미가 없었다고 하는 학생들도 더럿 있었지만, 나에겐 조금 신선한 충격일 정도의 매력적인 작품이었는데, 그렇게 안톤 체호프는 내 안에 처음 스며들었던 것 같다.


 그래서 오랜만에 그의 작품을 한번 읽어보고 싶었다. 역시 그의 작품은 군더더기 없이 깔끔했고, 적절한 유머와 기승전결이 돋보였다. 요즘 꽤 긴 장편소설만 읽다가, 부담 없이 체홉의 단편을 읽으면서 머리를 조금 식힐 수 있었다. 1월이 되자마자 꽤 정신없고 바쁜 나날의 연속이었는데, 그래도 틈틈이 책을 손에서 놓지 않으려고 했다. 체홉의 소설이었기 망정이지, 다른 작가들의 긴 작품이었으면 이번 달에 다 읽지도 못했을 것 같다.


 우선 이 책에는 체홉의 단편 중에서 역자가 옮긴 작품으로, <관리의 죽음>, <공포>, <베짱이>, <드라마>, <베로치카>, <미녀>, <거울>, <내기>, <티푸스>, <주교>가 선발되어있다. 역자는 체홉의 작품 중 덜 알려진 작품을 위주로 엮어 놓았다는 말을 덧붙이고 있다. 좀 덜 알려진 작품이어도 저마다 임팩트있는 결말의 내용들이다. 그중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작품에 대해 적어보려 한다.


 우선, 체홉이 살았던 시대에도 감염병이 정말 많은 사람들의 목숨을 앗아간 듯하다. 특히 장티푸스가 많이 등장하는데, 제목마저 '티푸스'인 작품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 현재에도 많은 사람들이 코로나 때문에 이전과 달라진 생활로 육체적, 정신적으로 많이 고통을 받고 있는데, 이 작품을 읽으면서 지금의 상황과 닮은 모습에 이런저런 생각이 들었다.


이야기는 클리모프 중위가 숙모와 누이가 있는 모스크바로 가는 기차에서 몸상태가 점점 악화되고 있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기차 안에서 마주 보고 앉아있는 핀란드인이 피워대는 담배냄새와 목소리에 진절머리가 난 그는 점점 몸이 무거워지는 것을 느낀다. 그리고 마침내 집에 도착했지만 쓰러져버리고  만다. 그가 혼수상태에서 잠깐씩 눈을 떴을 때는 의사가 있다가, 신부가 있다가, 누이가 와서 기도를 하고 있었다. 그리고 마침내 따뜻한 햇살과 함께 깨어난 그는, 누이가 자신한테서 옮은 티푸스 때문에 죽었다는 소식을 듣는다. 그럼에도 그는 이를 실감하지 못하고 그저 동물적인 생존의 기쁨에 굴복하며 먹을 것을 달라면서 투정을 부린다. 그리고 그가 겨우 몸을 회복하고 나서야 상실감을 깨닫는 장면으로 마무리된다.


 체홉의 작품들은 어떤 암시도 없었다가 갑자기 극적으로 이야기가 마무리되는 특징이 있음을 감안하고 읽어나갔음에도, 이 이야기의 결말은 꽤 충격적이었다. 마지막에 주인공의 누이가 감염되어 죽고, 그 사실을 인지하지 못한 채 생명의 갈망만이 남은 인간의 모습을 통해 동물적 본능만 남은 인간 존재에 대해 생각해보게 되었다. 인간이 아무리 생각을 할 수 있는 동물이며, 정신이 육체를 다스릴 수 있다고 믿는다고 해도, 결국 최소한의 생리적 욕구가 해결되지 않은 상태에서는 그 어떤 정신적 충족도 이루어질 수 없다. 따라서 살아감에 있어서 어느 정도의 육체적 만족감은 필수적이다. 주인공 클리모프의 모습에서도 이와 같은 점을 발견할 수 있다.


클리모프가 혼수상태에서 깨어났을 때, 침실에는 아무도 없었다... 햇살과 낯익은 가구들과 문을 보고 중위가 맨 처음 한 일은 웃음을 터뜨리는 것이었다. 그의 가슴과 배는 달콤하고 행복한, 간지럼 태우는 듯한 웃음으로 떨려왔다... 그는 자신의 호흡과 웃음소리에 기뻐했으며 물병과 천장과 햇살과 커튼에 달린 끈에도 기뻐했다.


"너에게서 티푸스가 전염됐어. 그래서...... 그래서 죽었단다. 장례를 치른 지 삼 일째야," 이 무시무시한 뜻밖의 소식은 클리모프의 의식 속으로 온전하게 전달되었지만 그것이 아무리 무섭고 강력한 것일지라도 회복기의 중위를 가득 채우고 있는 동물적인 기쁨을 이기지는 못했다. 그는 울며 웃었고, 이내 먹을 것을 주지 않는다고 투정하기 시작했다. 


 어떨 때는 육체가 정신을 지배하고 있는 것 같다는 느낌을 받을 때가 있는데, 지치고 피곤한 상태에서 가벼운 스트레칭과 운동이 오히려 활력을 생기게 하고, 정신적인 피곤이 사라지게 했던 적이 종종 있다. 그리고 운동을 꾸준히 한 사람이 정신적으로도 건강한 사고를 할 가능성이 높은 것도 사실이다. 기본적인 건강한 몸을 바탕으로 어떤 철학적 사유나 사고를 할 에너지가 생성될 수 있다.

 그런데 유명한 인물들 중에는 병투병, 장애 등으로 건강하지 않은 신체를 가짐으로 인해 더욱 노력해서 절실한 정신적 성취를 얻어내는 사람들이 있다. 이 경우에는 정신이 육체를 초월하여 압도할 수 있지 않은가 하는 생각이 든다. 결국엔 육체와 정신은 생의 마지막 날까지 상호작용을 끊임없이 반복해야만 하는 관계이다.

 체홉은 평범한 사람들의 사소한 이야기들을 통해 삶의 의미에 대해 질문을 던지고 있다. 그 질문에 나는, 치열한 삶 속에서도 '살아남는다'는 것 자체로 중요하고 의미있다는 답을 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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