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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성냥 Dec 26. 2020

올해는 다른 크리스마스/ 메이브 빈치

소중한 사람, 다정한 시간

당신은 그런 사람이야. 빛나는 총천연색.

 

 크리스마스 동안 독서를 하다니.. 책 제목처럼 올해는 정말 다르긴 달랐다. 매년 크리스마스에는 어딜 가야 할지를 미리 정했었고, 작년에는 겨울왕국인 핀란드를 다녀왔었다. 청춘의 마지막을 ‘나 홀로 해외여행’을 해보고 싶다는 생각에 용기를 냈었고, 산타할아버지와 루돌프를 만나고 왔었다. 그런데 그게 마지막이 될 수도 있을 줄이야... 올해는 칩거를 하면서 소중한 사람들과 함께 성탄절을 보냈다. 그러면서도 시간이 남아서 따뜻한 방 안에서 책을 읽었는데, 이런 조용한 명절도 나쁘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크리스마스와 관련된 책을 크리스마스에 읽고 싶어서 메이브 빈치의 단편소설 <This year It will Be Different>를 선택했다. 이 책은 다양한 사람들의 크리스마스에 관한 이야기이다. 요즘 시대에는 가족 구성원이 예전과 달리 여러 모습들이 있다. 특히 이혼과 재혼이 증가하면서 엄마, 아빠, 아이들로 구성되었던 핵가족이 여러 가정이 합해진 대가족이 된 경우가 많다. 이 책에서는 이러한 가정의 모습을 크리스마스라는 명절 안에서 담아내고 있다. 19개 단편 이야기들은 크리스마스를 앞두고 처음엔 오해 속에서 어긋나는 가정을 보여주고, 마지막에는 모든 구성원이 서로를 이해하고 담담히 보듬어주는 훈훈한 장면들로 마무리된다. 그중에 기억에 남는 이야기 두 개를 적어본다.



티나와 ‘우아한 이혼’을 한 마틴과 그의 아들 스티비와 함께 살고 있는 젠의 이야기다. 젠은 눈에 띄는 미모를 가진 티나와 비교될까 봐 항상 불안해하며, 그것을 들키지 않고 화목한 가정을 만들기 위해 항상 넓은 마음과 우아한 대처로 가족들을 대한다. 심지어 전처에게 아들을 데려다주는 일도 젠이 도맡아 한다. 평소 가정에 전혀 신경을 쓰지 않고, 매년 크리스마스도 카지노에서 보냈던 티나가 올해는 아무 데도 갈 데가 없이 혼자 크리스마스를 보내게 될지도 모르겠다며 마틴에게 연락해온다. 마틴과 스티비가 티나를 걱정하는 듯한 분위기와, 조금이라도 가정에 보탬이 되고자 크리스마스 휴일에 슈퍼마켓에서 일을 해야 할지를 물어보는 젠의 질문에 대해 돌아온 마틴의 ‘당신 좋을 대로 해’라는 한마디는 꾹 참았던 젠을 결국 폭발하게 한다. 젠은 그동안 거짓으로 상관없는 척, 씩씩한 척 가면을 썼던 지난날들에 대해 마틴에게 처음으로 솔직하게 말하며, 화려하지 않은 자신이 티나를 볼 때는 항상 자격지심이 들었으며, 처음으로 맞는 크리스마스에까지 티나를 초대하지는 않겠다며 분노한다. 그 말을 들은 마틴은 티나를 초대할 생각은 전혀 없었고, 티나가 이제 외국으로 가서 살 예정이며, 앞으로 티나를 위해 할 일들이 없게 된다는 설명을 한다. 그리고 젠이 연휴에 일을 하러 가겠다는 말을 했을 때, 티나도 도망치고, 젠도 주말마다 도망을 치는 게 결국 자신이 따분한 존재여서라고 스스로 생각했다는 말을 한다. 젠과 마틴은 서로 자신이 문제라는 생각을 해왔던 것이다. 그리고 오해가 풀리며 마틴은 젠에게 사랑스러운 말을 한다.


“오래 전에.” 마틴이 말했다. “주로 흑백영화가 나오던 시절에 컬러영화가 개봉하면 ‘빛나는 총천연색’ 어쩌고 했잖아. 당신이 그런 사람이야. 나한테는 빛나는 총천연색이야.”...”빛나는 총천연색”. 그는 그 말을 반복했다.


 재혼 가정이 증가하면서 분명히 또 다른 갈등도 나타나고 있다. 전남편, 전아내에 대해 안타까운 마음을 가졌던 적은 많았는데, 이 경우처럼 새아내의 위치에서 감당해야만 하는 것들에 대해서는 잘 생각해보지 않았던 것 같다. 무슨 행동을 해도 전처와 비교될뿐더러, 아무리 잘해주어도 새아내와 새엄마로서는 당연한 의무인 것이다. 작가는 재혼가정이 겪는 진심어린 갈등을 그려내고 있었다. 그래서 젠과 마틴이 서로를 아끼는 모습이 더욱 애틋하고 사랑스럽게 느껴졌다.



에설은 남편과 두 아들, 딸을 가진 평범한 중년 주부다. 일을 하면서도 집안 살림을 도맡아 하고 있으며, 매년 크리스마스 준비는 에설의 몫이다. 그런데 올해는 그 모든 준비들을 하고 싶지 않아서 그냥 소파에서 티브이를 보며 지내고 있었는데, 아무것도 하지 않는 에설을 보며 당황한 가족들이 긴급회의를 한다. 그리곤 에설에게 본인들이 구체적인 계획을 세웠고, 올해는 다른 크리스마스를 보내게 될 거라며, 준비할 게 있으니 에설에게 퇴근도 조금 늦게 하라고 신신당부한다. 올해는 정말 다른 크리스마스가 될 것 같다는 기대 반 걱정 반으로 퇴근한 에설의 눈 앞에는 훈훈한 분위기로 그녀를 둘러싼 가족들과, 선물이라며 부엌에 설치된 커다란 티브이가 있었다. 가족들은 에설의 반응을 잔뜩 기대하며 바라보고, 에설은 그들의 기대에 부응하는 기계적인 호응과 함께 다시 부엌일을 시작했다. 그리고 앞으로 조금씩 천천히 변화를 꿈꾸는 애설의 마음이 나오면서 이야기는 끝난다.


에설은 평면 텔레비전 주변에 옹기종기 모여 앉아 적절한 조치를 취했으니 조만간 저녁이 차려질 거라며 만족감에 젖은 그들을 바라보았다. 앞으로 모든 게 정말 어떤 식으로 달라질지 그들은 전혀 모르고 있었다.


 이 이야기는 자동으로 엄마를 떠올리게 했다. 예전에는 엄마라면 누구나 가정을 돌보고 집안일을 알아서 해치워야 하는 존재였다. 그러나 지금은 가정을 이루는 가족 구성원 모두가 가정을 지키기 위해 각자의 위치에서 최선을 다해야 한다. 우리 집도 엄마는 항상 부엌일을 제일 잘 알고, 뭐든 척척 해내는 그런 사람이었다. 그래서 부엌에 있는 엄마의 모습이 익숙하다. 그런데 그 모습이 익숙하다는 것 자체도 참 슬픈 일이다. 엄마 또한 다른 사람이 해준 음식을 먹고, 뒤처리 생각하지 않고 편안하게 집에서 시간을 보낼 권리가 당연히 있는 것인데, 참 불공평한 것이다. 내가 엄마가 엄마가 된 나이가 되니 그동안은 신경도 쓰지 않았던 것들도 눈에 보인다.


 이전까지는 크리스마스는 특별한 공휴일처럼 느껴졌다. 가족이나 연인과 함께 파티를 하고, 여행을 떠나 사랑을 확인하는 그런 행복한 하루라고만 생각했었다. 그건 우리나라의 명절이 아니어서였던 것 같다. 그런데 이 책에서는 크리스마스 명절에 대해서 부담과 피로감을 느끼는 내용이 종종 등장한다. 그래서 나는 서양사람들에게는 크리스마스가 설날과 같은 명절 증후군을 가져오는 힘든 날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가족이 멀리 있거나 없는 사람들에게는 크리스마스는 외로운 날, 매년 파티 준비를 도맡아야 하는 사람들에게는 크리스마스는 지치는 날일 것이고, 크리스마스에 억지로 같이 있는 게 오히려 도움이 안 되는 사이도 있을 것이다. 나 또한 설 명절을 그리 달갑게 생각하지 않는데,  사실 설날을 생각하면, 일 년에 한 번 볼까 말까 한 친척들을 모아놓고 말없이 재미없는 티브이만 바라보고 있는 장면이나, 다 먹지도 못하는 엄청난 양의 음식들을 하려는 할머니 때문에 하루 종일 부엌에서 서있어야 하는 엄마의 모습, 집으로 돌아오면 다들 기진맥진해서 잠만 자느라 끝나버리는 아쉬운 마음만 떠오른다. 하긴, 크리스마스도 어떻게 보면 그리스도의 제삿날이니까, 어떤 형식적인 의무감이 우리와 다를 바 없을지도 모른다. 다만 화려하고 신나는 겨울날의 모습이 떠올라 우리와는 조금 다른 듯하다.


 메이브 빈치의 소설은 극적인 감정에 파고들기보다는 평범한 사람들의 소소한 행복들을 그려내면서 읽는 독자들도 주변 가까이에 있는 행복을 바라볼 수 있게 해 준다. 그래서 감정을 차분히 정리하고 싶을 때, 어두운 마음을 가볍게 날려버리고 싶을 때 그녀의 소설을 읽게 되는 것 같다. 올해는 빈치의 소설과 함께 집콕하며 예년과는 다른 크리스마스를 보내면서 고요히 생각에 잠길 수 있었다. 어떻게 보면 크리스마스는 밖으로 나가서 야단스럽게 맞는 것보다는 지금처럼 소중한 사람들과 집에서 도란도란 보내는 게 맞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코로나가 오히려 삶의 방향을 올바르게 잡아주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래도 크리스마스는 크리스마스니까! 남은 시간도 최선을 다 해서 따뜻하고 행복하게 보내보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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