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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성냥 Mar 17. 2021

명랑한 은둔자/ 캐럴라인 냅

내가 나에게 건네는 위로

그리고 생각했다. 정말로 명랑하게. 이게 내 집이야.


 책 제목의 여섯 글자가 내 눈에 띄었다. 책의 작가는 캐럴라인 냅. 처음 보는 작가였다. 그렇지만 그녀의 책을 읽고 싶은 마음이 들게 만드는 작가였다. 그녀는 정신분석가 아버지와 화가 어머니 사이에서 쌍둥이로 태어나, 살면서 중독에 빠진 경험이 있었고, 혼자 사는 삶에 대한 여러 가지 감정들을 에세이로 녹여냈다. 현실의 내가 느끼는 감정들과 비슷하게 연관된 그녀의 경험들을 즐거운 마음으로 읽어 내려갔다. 처음엔 가볍게 읽기 시작했는데, 책장이 넘어갈수록 점점 심오해지는 그녀의 다양한 생각들을 보면서 나도 함께 고민해볼 수 있었다. 그중에서 몇 가지 인상적이었던 부분들을 적어보려 한다.




울음은 마음을 좀 편하게 해 준다. 하지만 고통을 정말로 줄여주진 못한다. 무엇보다도 힘든 점은, 이런 순간에 내 기분을 정말로 낫게 해 줄 수 있는 유일한 사람, 내가 정말로 기대고 싶은 유일한 사람이 엄마라는 것이다. - '회복으로 가는 먼 길에 대하여' 中


 작가는 부모님을 비슷한 시기에 둘 다 잃었고, 그때 그녀가 느꼈던 힘들고 절망적이었던 감정이 고스란히 그녀의 글에 묻어난다. 특히 엄마에 관련된 내용은 나에게 더욱 크게 다가왔는데, 엄마가 없을 때 나를 위로해줄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 바로 '엄마'라는 사실이 내 마음을 울렸다. 지금까지 부모님이 언제나 내 곁에 있다고만 생각해왔었는데, 이제 내가 엄마가 나를 낳은 나이를 훌쩍 넘어가고 있다는 걸 생각하며 놀라고, 늘어가는 엄마의 주름과 흰머리와 말라가는 몸을 보는 게 슬프다. 소심한 어린 시절부터 유달리 엄마에게 애착을 느꼈던 나는 지금도 엄마를 잃는다는 건 생각만 해도 너무 슬퍼서, 언젠가 그 날이 온다고 상상하기도 힘들다. 언제나 그 자리에서 나를 누구보다 진심으로 생각해주는 한 사람을 영영 다시는 보지 못한다는 건 가장 힘든 순간일 것 같다. 나 혼자 먹고 입고 사는 데 바빠서, 부모님에 대한 생각까지 미치지 못하고 살아가고, 어쩌다 보는 시간도 습관처럼 입을 삐죽거리며 부모님한테 철없이 반항만 하다가 보내는 나 자신을 문득 반성해본다. 부모님과 매일 붙어지내는 시기에는 내가 꼼짝없이 두발이 묶여있고, 내가 훨훨 날아갈 수 있는 시기에는 부모님과 점점 멀어진다. 나의 자유와 부모님과의 시간은 동시에 가질 수가 없다. 그래도 부모님이 더 이상 이 세상에 없을 때 후회할 일을 남기지 않는 게 더 중요할 것 같다.



하지만 모녀 관계가 얽히고설킨 관계가 되기 쉬운 게 그 때문이라면, 역시 그 덕분에 모녀 관계는 유달리 풍성한 관계가 될 수 있다. 누가 뭐라 해도 어머니란 딸의 내면에 있는 로드맵 혹은 거울이다. 우리와 어머니와의 관계에는 우리가 평생 배워온 교훈들, 우리가 과거에 걸어오다가 계속 걷기로 결정했거나 포기하기로 결정한 길들이 반영되어 있다. 여자는 어떤 문제에 대해서든 -일이나 연애 문제든, 어디에서 살고 어떻게 입고 어떤 친구들을 사귈까 하는 문제든, 어떤 사람이 될까 하는 문제든-다소나마 자신의 결정을 어머니의 결정에 견주어 평가해보기 마련이고, 어머니의 노력들이 어떻게 어머니를 형성하거나 제약했는지, 강화하거나 약화했는지 따져보기 마련이다. - '모녀의 관계가 주는 가르침' 中


 엄마와 나의 관계도 다르지 않았다. 나는 어떤 일이든 결정을 내려야 할 순간에 항상 엄마를 찾았고, 엄마의 선택과 그 이유를 곱씹은 후 나의 선택을 했다. 주로 엄마의 의견에 동의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나중에는 의식적으로 엄마와는 반대로 굴기를 택했다. 그때의 이유는 단순했다. '엄마처럼 뻔한 인생을 살지 않으려고.' 내가 특히 예민하게 굴었던 것 중 하나는 연애에 관한 문제였다. 엄마는 불같은 성격의 아빠와 시댁 사람들로 인해 결혼한 내내 힘들어하면서도, 나의 연애와 결혼 상대에 대해서는 직업적으로 능력 있는 사람을 원했다. 아빠의 성격에 그만큼 시달렸으면, 성격이 좋은 사람을 사윗감 일 순위로 말할 법도 한데 말이다. 엄마는 아마 다시 태어나도 같은 선택을 할지도 모른다.

 내가 중요한 선택을 해야 할 때마다 엄마는 항상 나의 의식과 무의식 속에 존재하며 나를 따라다니면서 잔소리를 늘어놓는다. 엄마의 탐탁지 않은 표정과 말투를 느끼면, 나는 반사적으로 혹시 내가 바보처럼 엉뚱한 길로 가는 건 아닌지, 부족한 부분이 있는 건 아닌지 불안해진다. 내가 경제적으로 독립을 하고 나서부터는 '착하고 바르게 자라야 한다'라고 말하는 엄마로부터 벗어나 자유로워지기 위해서 나는 '엄마'라는 내 안의 틀을 깨려 했다. 결과는, 생각만큼 만족스럽지는 않았다. 내가 진심으로 원하는 게 아닌, 단지 반대를 위한 행동이었을 뿐이었다. 어쨌든 엄마는 의도하든 의도하지 않든 간에 존재하는 그 자체로 딸에게 엄청난 영향을 끼치고, 딸은 늘 자신의 미래를 엄마의 과거, 현재와 비교해보며 자라난다.



내가 질투심이 든 것은, 내가 열여섯 살이었을 때 수학 수업을 들었던 기억을 떠올려보면 그보다 훨씬 덜 야한 경험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때 나는 책상에 앉아서 여드름을 걱정했다. 혹은 내 옷차림이 괜찮은지 걱정했다. 혹은 내가 좋아하는 남자아이가 그날 한 번도 나를 쳐다보지 않은 것 같다는 점을 걱정했다. 그 아이는 아마 느닷없는 발기에 신경 쓰느라 나를 쳐다볼 틈이 없었던 것이었겠지만, 그때는 내가 그런 걸 몰랐기 때문에 그게 내 탓일 거라고 생각했다. 내가 재미없는 아이라서, 혹은 예쁘지 않아서 그렇다고 생각했다.

바로 이 점이 핵심이다. 남자로 자라는 것, 즉 자신의 섹슈얼리티와 성적 충동을 그렇게 자주 접하면서 자라는 것,... 그리고 남자아이들은 어릴 때부터 그래도 괜찮다고 배운다. 그게 당연한 거라고 배운다. 하지만 여자로 자랄 때는 다르다.... 여자아이들의 섹슈얼리티는 굴절되어, 성가시고 외부적인 문제들에 투사된다. 자신의 외모가 어떤가, 옷차림이 어떤가, 학교 식당에서 엎어지면 코 닿을 거리에 남학생이 다가왔을 때마다 자신이 어떻게 행동했는가, 등등의 문제로. - '섹슈얼리티에 대한 남자들의 태도' 中


 이 책에서 한 가지 더 주목했던 점은, 페미니즘에 대한 작가의 시각이었다. 보통 페미니즘을 생각하면, 과거의 시대로 거슬러 올라가서 어떤 점들이 여성에게 영향을 미쳤고 등등 역사적인 내용들부터 떠오르는데, 작가는 바로 자신의 어린 시절 겪었던 경험과 기억들로부터 여성과 남성이 섹슈얼리티를 대하는 것의 차이점을 보여준다. 나 또한 어린 시절 친오빠와 내가 성별이 바뀌었으면 하고 생각했던 적이 많았다. 친구들과 마음껏 뛰놀고, 싸움질하고, 어두운 곳도 낯선 곳도 마음만 먹으면 걱정 없이 돌아다닐 수 있었으면 했던 적도 많다. 장남에 장손인 오빠가 알게 모르게 대접받고, 언제나 가족을 대표하는 기둥이었던 반면에, 나는 그저 귀여운 막내딸로서 큰 걱정 끼치지 않고 살아가면 됐다. 물론 오빠가 그러한 부담감 때문에 많이 힘들었겠지만, 그래도 나는 늘 그런 관심과 기대가 부러웠었다. 학생을 졸업하고 성인이 된 이후에도 남성이 부러웠던 적은 종종 있었다. 배낭여행을 안전보다는 가격을 우선시할 수 있을 때, 늘 생얼로 다닐 수 있을 때, 몸을 키우려고 많이 먹고 운동을 할 때조차. 부러움은 한도 끝도 없겠지만, 그래도 여자로 태어나서 신경을 쓰지 않으려고 해도 언제나 외적인 것들에 많은 신경을 써야 했는데, 그런 시간이 정작 나에게 쓸모 있는 시간이었다고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 언제쯤 이런 것들로부터 벗어나 '스스로 강해지고 당당해질 수 있을까?'를 고민하는 게 다른 게 아닌 페미니즘의 시작인지도.



물건을 버리기가 어려운 것은 그것이 꼭 선택지를 도려내는 것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혹은 자신이라는 사람의 어떤 측면을. 혹은 자신의 역사 중 한 조각을. 게다가 물건을 붙들고 있는 일의 실제 가치와는 무관하게, 그냥 그 물건을 포기하기가 힘들게 느껴질 수도 있다. - '사람들이 무엇을 못 버리는지 살펴볼 것' 中


 나는 자타공인 맥시멀 리스트다. 유치원 때 그린 그림부터 초등학교 때 쓴 일기장, 편지, 쪽지, 상장을 비롯해서 영화 포스터, 동전, 수많은 참고서와 교과서도 버리지 못하고 간직하고 있다. 이사를 몇 번씩 옮기면서 반강제로 물건들을 눈물을 머금고 버리지 않았다면 다람쥐처럼 모으기만 하고 도무지 버리지 못하는 습성 때문에 나의 집은 아마 물건들로 발 디딜 틈 없이 꽉 들어차 있을 것이다. 내가 가장 버리기 힘든 건 힘든 시절을 함께 한 것들이다. 남들은 끝나기만 기다렸다는 듯이 버리는 수험서, 시험지, 수험표, 각종 리포트를 나는 아직도 박스 안에 소중히 간직하고 있다. 그리고 인형도 잘 못 버리는데, 슬플 때 나를 위로해주었던 귀여운 인형의 얼굴을 보면서 버리는 건 정말 힘들다. (그리고 또 귀여운 인형의 얼굴을 보고 집에 데려오지 않는 것도 힘들다.)

 주위에 물건을 못 버리는 사람이 또 있는데, 우리 아빠다. 아빠는 심지어 내가 버린 물건들도 다시 몰래 꺼내서 놔둔다. 그래서 본가에 가면 내가 태어나기도 전에 쓰던 물건들이 아직도 여전히 있다. 특히 책이 정말 많은데, 수많은 책을 꽂아 넣은 서재가 따로 있을 정도였다.

 아직도 물건을 모아놓는 것에서 안정감을 느끼고 있지만, 요즘에는 '잘 버리는 것'도 필요한 것 같다. 이미 끝난 추억이 깃든 물건에 집착하기보다는 앞으로 다가올 새로운 생각과 감정들에게 자리를 마련해 주어야 할 것 같다.



그날 밤 부엌에서 켈로그 만찬을 준비하며 내 집의 단정함과 조용함을 즐길 때, 그 시간이 고마운 선물이자 일종의 승리로 느껴졌다.... 따라서 나는 혼자 있는 걸 늘 대단히 편하게 여겼지만, 그러면서도 그 상태를 만끽할 줄은 잘 몰랐다. 혼자 방에 앉아 있으면서도 초조해지지 않는 것, 연애의 틀 밖에서도 안락과 위로와 인정을 얻을 수 있다고 느끼는 것, 내가 가진 자원만으로도-나라는 사람, 내가 하는 선택만으로도-고독의 어두운 복도를 끝까지 걸어서 밝은 곳으로 나아갈 수 있다고 믿는 것, 이런 것을 잘하지 못했다.

나는 시리얼 그릇을 들고 거실로 가서 TV 앞에 자리 잡고 앉았다. 그리고 생각했다. 정말로 명랑하게. 이게 내 집이야. - '명랑한 은둔자' 中


 이 부분을 읽으면서 많은 공감이 되었다. 명랑한 기분으로 혼자 보내는 시간이 스스로에게 얼마나 위안을 주는지 겪어본 사람은 안다. 내가 나에게 위로를 건네는 바로 그 순간, 편안한 그 순간에서 나는 계속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힘을 얻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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