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민 시대와 민족의 비극 속에서 생존한다는 것
제목은 많이 들어봐서 왠지 모르게 친숙했던 책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 입니다. 느낌은 친숙하지만 저한테는 막상 손이 잘 안 가는 책이었어요. 서재에 몇 년 동안 꽂혀 있던 이 책을 무심하게 지나치다가 드디어 읽어보게 되었습니다. 왜 읽었냐고요? 저희 아버지의 직장에 새로운 동료가 부임하셨고, 그 분 성함이 "싱아"라는 소식을 듣게 되었습니다. 아버지는 그 이야기를 전해주면서 싱아가 사실 식물이라는 말씀도 해주셨죠. 이렇게 뜻밖의 일로 이 책에 대한 관심이 생겨 드디어 책을 펼친 거죠.
이 소설은 박완서 선생님이 어린 시절을 떠올리면서 개성의 시골 박적골 생활에서 부터 독립을 지나 대학을 진학하고 6.25 전쟁 속에서 피난을 떠날 때까지의 삶을 재구성한 내용입니다. 이 책을 읽으면서 시종일관 과장 없이 담담하게 자신의 삶을 풀어낸다는 느낌을 받았는데요. 문체는 담담하지만 박적골의 풍경이나 현저동의 빈촌 생활, 일제 시대의 소학교 생활은 정말 생생하게 묘사되었습니다. 책을 읽으면서 무엇보다 유려한 문장이 여러 번 감탄을 자아냈습니다. 선명하게 목격하신 역사의 굴곡과 이를 헤쳐나가며 형성된 선생님만의 철학이 이런 문장의 자양분이 되지 않았을까 생각해 봅니다. 이중 몇 가지를 나누며 이번 글은 줄이도록 할게요.
- 나이 먹을수록 지난 시간을 공유한 가족이나 친구들하고 과거를 더듬는 얘기를 하는 경우가 많은데 그럴 때마다 같이 겪은 일에 대한 기억이 서로 얼마나 다른지에 놀라면서 기억이라는 것도 결국은 각자의 상상력일 따름이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 사람의 노후가 늙은 호박만큼만 넉넉하고 쓸모 있다면 누가 늙음을 두려워하랴
- 조그만 목숨 하나가 집안에 드리운 죽음과 우환의 어둑신한 그림자를 몰아내고 밝은 웃음을 가져왔다.
- 자유니 민주주의니 하는 말은 도처에 범람했지만 별안간 그 눈부신 걸 바로 보기엔 우리가 눈을 뜬 지 불과 얼마 안 돼 있었다.
- 죽이지 않으면 죽게 돼 있는 전쟁을 동족끼리 한다는 것은 끔찍한 일이었다. 적은 피부색이나 언어가 다른 이민족이 아니라 그냥 공산당이었다. 국군과 함께 적의 수중에서 우리를 구해 준 유엔군도 고마웠지만 독립된 정부가 있음으로써 그런 도움을 받을 수가 있었으니 나라있음이야말로 얼마나 감격스러운 일인지 몰랐다.
- 승리의 시간은 있어도 관용의 시간은 있어선 안 되는 게 이데올로기 싸움의 특성인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