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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성은 Aug 24. 2019

질투

사랑하기 때문에

가진 것보다, 가지지 못한 것이 커 보일 때가 있다. 이뤄온 것보다 지금 이루지 못하는 일들에 마음이 더 쓰일 때가 있다. 어제보다 오늘 내가 더 작아 보인다. 불행의 원인이 나에게로만 향한다. 어쩌면 행복은 순간이라고. 순간이 지나면 다시 나의 존재가 줄어든다.

이럴 때 커지는 감정이 있다. 질투다. 결핍으로 인해 생기는 빨간색 감정이다. 금방이라도 질주할 것만 같은 붉은빛이다. 내 안에 어디엔가 숨어있다가 이렇게 작아진 나에게서 스멀스멀 올라온다. 가뜩이나 속이 좁아진 것 같은데, 적색 신호까지 마음속에서 번쩍이다 보니, 대부분의 사람들은 '질투=안 좋은 감정'이라고 인식한다.

생각을 한 번 바꿔보자. 질투는 오히려 너무 사랑하기 때문에 생기는 감정이 아닐까. 질투의 대상이나 혹은 그 대상이 가져버린 것에 대한 깊은 애정 때문이다. 누군가에게 결핍은 당연하다. 전지전능한 신이 아니고는 모든 걸 가질 수 없다. 가지지 못한 것에 대한 욕구는 인간의 본능이다. 적절히 욕구를 성취하며 발전을 거듭해온 존재가 인간 아닌가.

그러나 우리는 질투를 인정하기보다는 부정한다. 어쩌면 질투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내 결핍을 숨기고 싶은 것일 수도 있다. 라 로슈푸코는 "사람은 질투하는 것을 부끄러이 여긴다. 그러나 무엇을 질투했든 질투할 수 있다는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한다."고도 말했다.

질투를 부정할수록 다듬어지지 않은 애정은 제 멋대로 자란다. 어느 순간 통제하게 어려운 불꽃이 되어버린다. 질투를 종종 불같은 마음이라고 비유하는 이유도 같다. 질주를 시작하는 것이다. 무릇 어떤 감정이든 지나치면 통제 밖에 놓이게 된다.

특히 질투의 감정은 증오로 이르는 길이 무척 짧다. 무언가를 지나치게 애정 하면서 시기하는 마음이 커지면 부정하기도 쉽기 때문이다. 감정을 잠재우기 위해서 애정이 아닌 증오와 부정을 택한다. 가령, 너무도 사랑하는 사람이 나 아닌 다른 사람과 즐거운 시간을 보내면 생각한다. "별 것도 아닌 사람이랑 왜 이렇게 즐거워하는 거야? 저 사람도 알고 보니 별로인 거 아냐?" 극단적인 생각이다.

이러한 증오와 부정을 애정으로 착각할 때는 더욱 위험하다. 사랑한다는 이유로 상대에게 폭력을 가하거나 가진 것을 빼앗는 경우가 이에 해당한다. 특히 애정이라는 근사한 이유를 들이밀기 때문에 상대가 폭력을 겪고도 넘어가기도 한다. 데이트 폭력, 가정 폭력이 정당화되는 이유도 지나친 애정인 경우가 대다수다. 지나친 건 모든 좋지 않다.

적당한 양의 질투를 갖는 건 어떨까. 아예 질투를 버리려다 보면 건강해지지 못한다. 생각해보면 꽤 긍정적인 아이다. 애정 하는 대상에 대한 의지를 키워주기도 한다. 사람이 아니라 일이라면 고르게 자란 질투를 통해서 노력하고 결국 원하던 꿈을 키울 수도 있다.

질투를 하는 사람들은 열망이 크다. 무언가에 대한 성취욕이 큰 사람들이다. 반대로 질투가 없는 사람들은 그만큼 욕심이 적다. 단조롭기도 하지만 어딘가 허한 느낌을 지울 수 없을 때도 있을 것이다. 때로는 우리를 뜨겁게 해주는 감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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