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혼주의 말고 결혼주의자
2023년 4월 어느 봄날 남편에게 사직서를 쓰라고 했다.
10년이 넘는 시간을 직업 군인으로 지냈던 남편의 방황의 시간은 길었다.
낙오된 자의 슬픔을 애도할 시간도 없이 생활 전선으로 뛰어들어야만 했던 그는 하고 싶은 일과 해야 할 일 사이에서 무수한 고민을 했던 것 같다. 참 서글픈 건 그렇게 시간을 보내는 동안 스스로가 무엇을 좋아하는지도 모르고 살아왔다는 것이었다.
내가 해줄 수 있는 건 그저 묵묵한 응원뿐이었는데, 당장 어린 두 아이를 키우며 할 수 있는 건 많지 않았다. 그렇게 사회의 쓴 맛을 조금씩 경험하고는 다시 군에 입대한 남편은 3년이라는 계약의 시간을 벌 수 있었다. 잠시 몇 년의 안정을 느끼면서 실은 마음속으로 엄청 간절했었던 것 같다.
‘제발 이번에는 장기복무 합격 할 수 있게 해 주세요.’
재임용한 인원 6명 중 5명 선발이라는 데 그렇게 남편은 6번째 사람이 되었다.
당시에는 눈물조차 나지 않았다. 분명 더 괜찮아질 거야.
계획성 없이 즉흥적인 성격의 대표주자 격인 나는 돌발적인 상황이 생겨도 덜 놀라는 편이다. 이럴 때 내 성격이 참 마음에 든다 싶다가도 그러니 매 번 즉흥적인 상황만 벌어지나 싶기도 했다. 아무튼 그렇게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이곳에서 무엇이라도 되겠지 하는 심정으로 시간을 보냈다.
당장이라도 먹고살아야 해서 남편은 막노동 일을 나가기도 했고, 어찌나 또 열심히 일을 했는지 작은 회사로부터 스카우트 제의를 받기도 했지만 그는 돌연 고시생을 자처했다. 끈질기게도 안정적인 삶을 원했다.
그렇게나 군대가 좋았는지 군무원 시험에 도전을 했고 나는 여러모로 버텨야만 했다.
3번의 낙방 속에서 그에 대한 마음은 변치 않으려 애썼고, 내가 할 수 있는 것들을 찾았다.
다시 한번 시험에 도전하겠다는 말을 조심스레 건네었을 때 나는 ‘이제 내가 돈을 제대로 벌 차례이구다.’ 생각하고 굳게 마음을 먹으려 했지만, 더 이상은 그만하라며 만류하시는 시부모님의 반대에 못 이기는 척 백기를 들어 그를 설득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지인을 통해 입사하게 된 중소기업.
그 후 인턴생활이 시작되었고 제대로 된 쉬는 시간도 없이 매일 12시간 가까이 직장에 머물며 체력과 정신이 피폐해지는 그를 보게 되었다.
가장 힘들었던 건 적은 월급도 아니었고, 그 회사가 어떤 회사인지도 아니었다.
단지 아침마다 짙어지는 그의 한숨을 듣는 것과 나조차도 어쩔 줄 모르겠는 미안함이 뿐이었다.
‘당신이 원하는 삶을 살아......’라고 해주고 싶었지만 그가 원하는 삶을 본인은 알까.
그리고 감히 가장의 마음의 무게를 감히 함부로 가늠하는 것도 조심스러웠다.
그렇게 지옥 같은 시간도 어느덧 1년이 지났고, 정직원으로 다른 곳에 발령받기 두 달 정도를 앞두고 있을 때였다. 업무 하던 중에 보건소에 전화를 했었단다. 정신 상담을 받으려고...... 막노동 일을 가서도 기쁜 마음으로 돌아오던 그가 이렇게나 괴로워했었다는 사실이 내 마음을 후볐다.
‘지금 구출해내지 못하면 평생을 후회할지도 모르겠다.’
인생 어차피 모르겠는 거 조금이라도 더 마음 편한 길로 가자.
‘때려치워’
‘시부모님은 내가 맡을 게.’
10년이라는 기간을 불안하게 바라만 보시던 부모님의 마음이 어땠을까. 짐작이 가지만, 어쩔 수 없다.
자식 이기는 부모 없고 어차피 당신과 내가 꾸려가야 하는 삶이다. 우리만 괜찮으면 뭐라도 괜찮아.
‘나는 네가 어떤 사람이어도 괜찮아.’
당장 두 아이를 보며 남편은 많은 고민을 했던 것 같다.
그리고 사직서를 냈다는 소식을 들었다.
이상하게 마음이 후련했다.
이제부터 정신 바짝 차리고 지금을 잊지 말자.
시어머님께 전화를 드렸다.
“어머니 애비 일 그만두기로 했어요.”
“회사에 다시 사정해서 없던 일로 하는 게 어떻겠니”
그렇게 처음으로 어머니와 팽팽하게 대립하며 통화한 적은 처음이었다.
기나긴 통화 끝에 마지막으로 내가 울부짖으며 소리쳤다.
“어머니, 저는요. 제 아들이 그러면요, 버티란 말 안 해요! 이거 정말 아니라고요!”
그렇게 퇴사는 이미 진행되었고, 남편은 최후의 결정을 내렸다.
“배 탈게.”
그렇게 우리는 시부모님을 사장님으로 모시게 되었고, 남편은 월급쟁이 뱃사람이 되었다.
아버님은 30년이 넘도록 어부 일을 해오신 분이다. 그나마 참 다행인 게 남편이 해군 출신이었기에 배를 타는 일은 크게 걱정하지 않아도 되었다. 게다가 군생활 중 소형선박조종사 자격증을 취득해 놓은 게 있어서 여러모로 쓰임이 있었다. 아들이 배를 타기 시작했지만 여전히 시부모님은 그 상황에 아쉬워하셨고, 정직원 자리를 놓친 것에 대해 종종 채근하셨다. 자식이 도시에 나가서 번듯하게 생활하면 동네 사람들에게 자랑도 좀 하고 좋으셨을 텐데 내가 그 마음을 모르는 건 아니었다.
뱃사람 일은 생각보다 더 많이 부지런해야 하고, 생각보다 고되고, 생각보다 더 위험하고, 생각보다 냄새도 많이 나는 일이었지만 남편은 웃음을 되찾았다.
7, 8월에는 바닷물의 온도가 높아서 조업을 나가지 않아 일이 없기에 막노동 일을 나갔다.
그래서 사람이 경험이 참 중요하다 싶었다.
가벼운 마음으로 막노동 일을 나가는 그의 뒷모습에서 행복이 보였기에.
남들 휴가 가는 기간에 더위를 이겨가며 일하고 돌아오는 그에게서 받은 메시지는
‘아 살아 있는 것 같아.’
울컥하더니 눈물이 흘렀다.
끝나지 않을 것 같았던 여름이 지나고 9월에 접어들면서 다시 조업 준비로 바쁜 나날들에 청천벽력 같은 소식이 들려왔다.
후쿠시마 오염수 방류가 시작된단다.
이제 헛웃음이 났다. 뭐가 좀 잘 풀린다 싶더라니......
‘자꾸 뉴스 보지 말고, 오늘의 할 일을 하자. 밧줄 묶는 연습 눈감고 해 봐.’
그에게 위로 대신 건넨 말이다.
우리는 이제 더 이상 물러설 곳이 없다.
그리고 나는 아이들을 데리고 바닷가에 쓰레기 줍는 봉사활동을 나갔다.
남편을 가만히 보고 있자면 그 안에는 내 모습이 가득하다.
나는 그를 위했지만, 결국은 나를 응원하고 있었던 거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주위로부터 무수히 많은 말을 듣고 살아간다. 그 안에는 응원의 말도 있고 좌절하게 하는 말도 있다. 그렇게 주위의 평가에 흔들리는 게 사람 마음이다 싶다.
그래서 계속 인정받으려 애쓰고, 그러다가 진정 내가 원하는 삶을 놓치고 살고 그게 또 괴로워지고......
하지만 누구 하나 나를 온몸으로 응원하고 믿어준다면 세상살이가 좀 더 즐거워지지 않을까.
나에게 그런 사람이 있었으면 하는 마음이 내가 그를 응원하는 마음이 되었다.
아무것도 가진 것도 없으면서 배포만 큰 마누라는 오늘도 이렇게 말한다.
‘괜찮아. 네가 원하는 대로 살아도 돼.’
우리 인생을 제대로 항해해 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