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이 방황할 동안 너는 무엇을 했냐 물으신다면
통화연결음이 들린다.
'얼른 받으세요. 아니 받지 말아 주세요.'
마음속에 감정이 뒤섞인 채 역시나 배포만 가지고 전화를 걸었다.
"여보세요."
"안녕하십니까. 저 이번에 보디빌딩 대회가 있다는 공고 보고 연락드렸습니다. 참가신청 하고 싶습니다."
얼마나 능력 있는 선수(?)이길래 다짜고짜 협회로 전화를 걸어서 당당히 대회에 출전하겠다고 하는지
놀랐던 모양이다. 그러면 일단 방문하라는 대답을 듣고 약속을 잡았다.
2살, 4살이었던 두 아이를 봐줄 사람이 없었고, 동네 빵집 사장님이 흔쾌히 봐주겠다는 말을 해주셔서 그렇게 여러모로 긴장한 채로 협회로 달려갔다.
'또 이렇게 일을 벌이네 내가......'
사실 두렵고 무섭고 안 당당한데 당당한 척은 해야겠고 많은 감정에 휩싸였지만
심호흡을 하며 사무실로 올라갔다.
이곳은 우리 지역 소속 보디빌딩 협회였고, 시 대표 선수들을 관리하는 곳이었다.
"반갑습니다."
키 155cm에 통통한 체형.
선수 깜냥이 되는지 두루두루 살펴보시는 것 같은 눈빛에 밝게 웃으며 대답했지만, 사실 나는 선수라는 타이틀조차 좀 간지러웠던 사람인지라 그저 작은 무대를 경험해보고 싶다는 말씀만 드렸다.
"그런 소규모 대회라면 뭐 나갈 수 있겠죠."
웃고 있던 '아줌마' 뒷모습이 너무 쓸쓸해 보이지는 않았을지, 그 와중에 그런 걱정을 해가며 나를 기다릴 아이들 품으로 돌아왔다.
저녁 무렵, 협회 담당자분께 전화가 걸려왔다.
사실 바로 이렇게 연락 와서 대회를 나가겠다는 사람이 드문 데다가, 몸이 완성이 되어 있는 줄 엄청 기대했다고 말씀하셨다.
도에서 열리는 큰 대회가 있는데, 시대표로 준비해 보겠냐고 물으셨고 그렇게 한 달 반 만에 몸을 만들어야 하는 미션이 시작되었다.
그렇게 지옥훈련은 시작되었다.
체지방은 다 털어내고 근육량은 올려야 하는데 다 모르겠고, 적어도 무대에서 망신만은 당하지 말자는 마음이었고, 경험이다 여기자는 마음 반, 이왕 하는 거 뭐라도 성취하고 싶다는 마음 반...... 그랬다.
이쯤에서 멋지게 수상이라도 한 번 해줘야 이 씁쓸한 생활에 드라마틱한 클라이맥스라도 생기지 않을까 하는 심정이었을까.
보통은 헬스장에서 트레이닝을 받다가 트레이너를 통해서 대회준비를 시작하는 게 일반적이다.
나는 PT는 고사하고, 매달 4만 원을 헬스비용을 내고 운동하면서 혼자서 대회준비를 해야만 했다.
초짜배기가 운동도 익히기 전에 혼자 대회준비하는 꼴이라니......
아무튼 안 되는 건 없으니까 누구보다 부지런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아이들 어린이집 보내고 오전에 3시간, 저녁에 남편 퇴근하고 오면 3시간
되도록 이 패턴을 가져가려 노력했다.
남편 퇴근하자마자 운동하러 달려가다가 다퉈서 다시 집으로 돌아온 적도 있고, 아이가 아파서 하루를 마냥 쉬어야 했던 날도 있었다.
'애들 크면 해라.'
'먹을 거 못 먹어가며 뭐 하냐'
'뭘 살을 더 빼냐'
시댁이나 친정으로부터 응원의 말보다 만류하는 말을 더 많이 들었지만, 나는 달려야 했다.
뭐가 나오는 일도 아닌데, 모르겠고 그냥 해야만 한다는 마음뿐이었다.
155cm 키에 79kg
학창 시절 보았던 63kg 이후로 이런 숫자는 처음이었다.
첫째를 임신하고 너무 살이 쪄서 임신중독증이라는 진단을 받고 응급수술을 했었다.
둘째 때는 나름 관리를 한다고 했는데 그때 본 마지막 숫자였다.
79kg
이 키에 저 무게를 감당해 가며 연달아 출산을 두 번이나 하고 나니 몸은 더욱 엉망이 되었고
걸음을 제대로 걷지 못해서 재활치료를 받으러 다녔다.
"체중을 반드시 줄이셔야 합니다."
초등학교 3학년 이후부터는 날씬했던 적이 없었기에 결국 또 이 굴레에 빠지나 싶었지만, 이제는 건강을 위해 움직이고 줄이고 해야 하니 어쩔 수가 없었다.
남편 출근 전, 아이들 잠든 시각
집 앞 강변을 걷기부터 시작했다.
처음에는 천천히 계절을 느끼며 걷고 들어오는 그 길이 그저 뿌듯했다.
별 거 아니다 싶었지만 하루라도 빠지지 않으려고 했다.
목표가 생겼다. 이번에는 이 나무에서 저 나무까지 한 번 달려볼까?
50m가량 되는 거리를 살살 뛰어보았다. 심장이 쿵쿵 뛰는 게 이게 살아있다는 거구나.
결혼 생활 10년 간, 남편의 불안정한 고용 상태 속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건 많지 않았다.
다만, 나는 무너지지 않아야 했고, 굳건해야 아이들과 남편을 지킬 수 있겠다는 마음뿐이었다.
나의 운동은 그렇게 더 든든하게 제 역할을 맡아주고 있었다.
모든 상황이 나를 도와주려는 듯 주위에서 많은 분들이 도움을 주었다. 내 여동생 친구가 현재 PT샵을 운영하고 있어서 운동을 가르쳐주겠다며 레슨을 해주었다. 이미 몸이 많이 망가졌던 상태라 무리한 운동보다는 기능적인 면을 보강해 주었고, 그때 잘 배워둔 덕에 다양한 운동을 응용할 수 있었다.
"생활스포츠지도사 자격증 취득해 보시는 건 어떠세요?"
선수 준비하면서 운동에 한창 재미를 붙이고 있었던 터라 자격증이라는 말에 솔깃했다.
써먹지 않더라도 제대로 알고 운동을 하고 싶었던 마음이었기에 공부를 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2살, 4살 두 아이, 그리고 남편.
대회 준비, 운동, 자격증 시험까지......
최소한의 비용으로 다 해내야 했기에 더욱 간절하고 처절했다.
그렇게 폭주기관차는 울면서도 계속 달리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