술 때문에 받은 상처는 고이 접어두자
애주가와 알코올의존증 그 어딘가에서 헤매던 아빠의 인생. 그 사이에 끼어있던 엄마를 포함, 우리 삼 남매는 술로 받은 상처가 많다. 참 슬프게도 한국에 이런 집이 적지 않은 것 같고 지금도 여전히 주변에서 심심찮게 보게 된다.
힘든 하루 일과를 마치고 소주잔을 기울이던 모습에서 이겨내지 못할 만큼 취해 고성방가를 지르고 싸움을 걸던 모습까지 그 기나긴 시간 속에서 나는 공부를 해야 했고 싸움을 말리고 아빠를 찾으러 다녀야 했다.
성씨가 ‘술씨’라고 늘 놀리듯 말하는 엄마는 우리 집안 대대로 술 때문에 망했다며 말씀하시는데 가만히 그 상황들을 들여다보면 삶이 나아지지 않음에 자책한 아픈 사연들이 있다.
아빠가 술을 좋아함에도 불구하고 그 모습을
그나마 짠하게 바라볼 수 있었던 이유는 가난의 대물림을 하지 않으려 발버둥 치셨던 세월과 실제로 뒤늦게서야 돈으로는 상처받지 않을 정도의 삶을 일궈주신 노력 때문이었다.
(무일푼에서 양반 흉내라도 내며 살 수 있다는 게 얼마나 피나는 노력이 필요한지를 두 눈으로 보고 배운 건 덤이었다.)
그래서 겉으로는 환갑이 지나도록 ‘여전히’ 술 취한 모습을 보이는 그 모습을 보면 울화가 치밀다가도 이내 단념하고 얼른 짐을 싸서 내가 가꾼 집으로 돌아오곤 했다.
멀쩡한 집 놔두고 노숙을 그리 즐기냐며 내가 모진 말로 놀려대던 아빠의 캠핑 사랑은 올여름에도 지속되었다. 집에서 조용히 있는 걸 잘 못 견디시는 아빠는 캠핑을 하며 별별 사람을 다 초대했고, 엄마는 그 모습을 보며 ‘지나가는 참새도 초대하겠네’라며 핀잔을 주었다.
술에 취해 계곡물에서 놀다가 바위에 엉덩방아를 찧었다는 소식에 모두들 걱정보다는 ‘어이구’하는 마음이 먼저 앞섰던 건 사실이다.
자꾸만 통증이 심해져서 물리치료를 받으러 정형외과에 다니셨는데, 어느 날 밤 고열이 나서 응급실 다녀왔다는 소식에 가슴이 철렁했고 엉덩이에 염증과 고름이 가득 차서 결국 수술을 해야 한다고 했다.
신나게 놀다가 이 꼴이 났다며 엄마는 힘들어했고, 그나마 엄마라도 건강해서 다행이라 여기면서도 매일 같이 걱정하며 하루하루를 보내다가 병문안을 가려고 먼 길을 나섰다. 수술 때문에 음식도 못 먹고 야윈 모습에 ‘아빠 참 많이 늙었다……‘ 하며 씁쓸해했다.
오랜 기간 수술과 세척, 소독을 반복하고 본의
아니게 ‘알코올디톡스’가 되었다며 다 같이
웃었다. 참 슬프게도 데자뷔처럼 어릴 적 그때가 떠올랐다.
사업에 실패 후 처음에는 마시던 술을 더 많이
드셨다. 그 평생에 반려자 같은 술을 끊었던 기간이 나에게 정말 강렬하게 남아있다. 정말 아빠가 백수가 되었던 그 시간. 1년도 채 되지 않았지만 그때의 마음은 비장했으리라 여겨진다. 그 좋아하는 술도 안 넘어갈 정도로 걱정이 많았겠다 싶은데 참 슬프게도 그 불안한 시기가 나에게는 가장 행복했던 시간이었다는 거다.
그렇게 내 소원은 아빠가 술을 끊는 거였는데, 소원을 이루지 못한 채 나는 술을 잘 안 마시는 남자를 만나 결혼해서 위안을 찾았다.
입원부터 퇴원하고 지금까지 한 달 넘는 기간 동안 ‘금주’하게 된 아빠는 이제 아예 술을 안 드신다고 했다.
아빠의 술사랑이 애정결핍에서 기원한 거라 주장했던 나는 한편으론 한 인간의 성장과정을 파노라마처럼 지켜보는 것 같아 감격스럽기도 하지만, 기대가 크면 실망도 크다는 걸 많이 겪은 인간이라(특히 술 끊는다는 말에는) 혹여나 다시 술을 드신다 해도 또 괜찮을 마음이다.
아빠가 술을 끊으니까 오랜 시간 친정에 머무르고 싶어졌다. 하루만 지나도 짐 싸서 집에 오던 걸 이번 추석 연휴 마지막날까지 지겹도록 있다가 왔다.
동생은 아빠 술 끊은 기념이라며 옷이랑 모자도 선물했다. 엄마는 이때다 싶었는지 각서를 쓰라고 하려는 걸 내가 극구 말렸다.
믿어주자.
혹여나 다시 마시더라도
‘그럴 줄 알았다’
하지 말자.
노력하고 있다는 걸 묵묵히 알아주고 응원해 주는 것만으로도 힘이 될 거라 믿는다.
그렇게 사랑이 충만함을 느끼면 더욱 힘을 발휘할 것이다.
그래서 내가 해줄 수 있는 가장 큰 응원은 술로 받은 상처를 고이 덮어주는 것. 그저 마음으로 안아주는 것.
살다 보니 아빠 빼고 술 마시러 가는 날도 온다.
그렇게 ‘술 안 마시는’ 아빠는 집에 두고 여자 셋이 호프집을 다녀왔다. 이런 날이 오다니 웃기기도 하고……
보는 앞에서 마시면 안 될 것 같아 밖에 나갔는데 여러모로 잘한 것 같다.
아빠의 평생 금주를 응원하면서 나도 내일부터는 술을 끊고 음식 조절을 해야지 싶다.
역시 부모를 보고 배우는 건 책 보고 배우는 것보다 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