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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홍은채 Oct 28. 2024

아무리 백수라도 함부로 부려먹을 생각은 말자

결혼 10년, 사랑에 필요한 노력

* 몇 년 전 이야기임을 밝힙니다*








"택배 좀 얼른 편의점에 가서 부쳐 주라. 김장 김치 형님네에 얼른 보내야 해."


"나 쫌만 자고 이따 갈게."





잔다고......?


잔다고.......?


잔다고........?




후우





실감이 나지는 않지만 남편의 백수라이프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남은 연차와 휴가를 모두 끌어다 써서 정식 퇴직은 며칠 남은 상황이긴 하지만 말이다.

아무튼 이 시간들을 잘 보내기 위해 몇 년간 나의 마음수양력은 계속 상승곡선을 타고 있었기에

호기롭게 이런 글도 쓰게 된다.




12년 11개월,

그의 청춘을 바쳤던 곳이다.


소위 계약직 상태로 긴 시간을 버텼다.

계약 만료로 인해 백수라이프 1년을 거쳐 다시 들어간 곳도 또 그곳이었다.

3년의 재계약 근무가 끝나고 이번에는 진짜 퇴사가 된 것이다.



우리 결혼한 지 7년 차,

안정되지 않은 고용 상태로 그 시간들을 보냈다.

그걸 알고도 결혼을 감행했던 그때를 돌아본다.

모든 일에 열정이 넘쳤던 나는 결혼에도 패기가 넘쳤나 가물가물하기만 하다.


결혼 생활 7년 동안 남편은 계속 고시공부를 했었다.

둘째가 곧 태어 날거라 한 번 말렸고, 두 번 세 번 낙방하길래 말릴 힘도 없이

아군이 되어 적극 응원모드로 돌아섰다.


그런 시간들이 쌓여 나의 수양력이 키워진 것이다.




속 얘기를 잘 안 하는 남편이 이번에는 다르다.


처음 나오는 것도 아닌데, 이번에는 진짜 마지막이라 생각하니 마음이 좀 이상하다고 한다.

그럴 법도 하다. 이제껏 준비하던 시험도 관련 직종이었고, 다시 그 분야로 들어갈 거란 확신이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제 전혀 다른 분야로 이직을 마음먹었기에 그게 또 크나큰 도전으로 느껴질 것이다.




친정엄마께서 김장을 잔뜩 해서 챙겨주셨다.

코로나도 심해지고 설상가상으로 주말부부까지 하게 된 서울 사는 시누 생각이 났다.

김치라도 좀 나눠주려고 열심히 택배 포장을 했더랬지.


김치 익어버리기 전에 얼른 보내야 하는데....


집안일도 해야 하고 아이들 유치원에서 돌아오기 전까지 해야 할 일도 많고 해서

남아 있는 인력 하나를 쓰려니 이렇게나 힘들다.


"조금만 있다가, 조금만 있다가, 쫌만 더 자고"



단전 아래에서 뭔가 울컥하고 올라와서 택배 상자를 있는 힘껏 끌어안고는 차키를 챙겨 길을 나섰다.


편의점 택배 기계는 참 내 말을 안 듣는다.

올 때마다 그렇다.


택배접수를 했고, 추워진 날씨에 붕어빵이 생각이 나서 또 들렀다.


뜨끈한 슈크림이 입안 가득 퍼질 때가 되어서야 비로소 화가 누그러졌다.



며칠 전 시댁에 다녀왔다.

텃밭에서 대파, 당근, 배추 이것저것 챙겨주시면서 하시던 어머니의 말씀


"돈 못 벌어온다고 구박하지 마래이!!!"


"어머니, 그 구박 안 하려고 제가 7년을 얼마나 수련했게요."



'그래 다시 한번 힘을 내보자.'








집에 돌아오니 트렁크 차림으로 자격증 책을 보며 나를 향해 웃는다.

"오디 갔다 왔쬬?“



이성은 온데간데없이 아웃사이더(저 옛날 사람) 보다 더 빠른 랩 속도로 잔소리를 퍼부었다.

"이럴 거면 내일부터 당장 독서실로 가든지!!!!"


아후, 시원하다.

하지만 1절로 끝내야지 2절, 3절까지 가면 위태로워진다.



새로운 일을 시작하거나 어떤 일을 마무리할 때 나는 버퍼링이 오래 걸리는 사람이다.

심지어 헬스장을 등록해도 적응하는 데까지 한 달이 걸린다.

정해진 루틴이 깨지는 순간 다시 루틴을 만들기까지의 시간이다.

나는 정작 그러면서도 남편의 버퍼링 시간은 이미 충분했다고 혼자 단정 지어 버렸던 것이다.


그래, 정식 퇴사일까지만 일단 빈둥대라 이거야.


백수라고 살찌면 더 못 봐주는 거 알지?

내일은 헬스장부터 등록하자. 오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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