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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만나러 간다

눈이 오면

by 발자꾹




오늘은 일주일에 한 번 도서관에서 책모임을 하는 날이다. 오늘 함께 이야기 나눌 책은 에리히 프롬의 <소유냐 존재냐>.


집을 나서려는데 눈이 온다. 몇 년 전 눈길에 넘어져 몇 달 동안 고생한 뒤로 눈이 오면 무섭다.


우선 신발을 골라야 한다. 운동화를 신을까 부츠를 신을까. 부츠를 고른다. 목이 긴 녀석을 신을까, 발목까지만 오는 녀석을 신을까. 날이 차니까 긴 부츠를 신어봤는데 바닥이 미끄러웠다. 너무 오래 신었나 보다. 발목 부츠로 갈아 신었다. ‘눈이 들어오면 어쩌지?’ 잠깐 고민하다 그냥 신는다. 넘어지는 것보다는 나으니까. 문을 열다 창문밖을 보니 눈이 펑펑 내린다. 아무래도 안 되겠다. 옷이 다 젖으면 도서관에 들어갈 때 바닥이 젖을지도 모른다. 우산을 찾는다. 또 고민한다. 긴 우산을 쓸까, 접이식 우산을 쓸까. 이번엔 빨리 골랐다. 제일 가벼운 접이식 우산.


이제 현관문을 열고 나선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1층으로 내려와 걷는다. 걷다 보니 이상하다. 손에도 주머니에도 휴대폰과 카드 지갑이 없다. 신발과 우산이랑 실랑이를 하느라 깜빡했다. 오늘은 눈이 와서 걸어가기 힘드니까 필수품이다. 다시 집으로 간다. 1층 출입구 근처에서 청소하는 분이 열심히 눈을 치운다. 겸연쩍어 인사도 못하고 냉큼 번호를 누르고 들어간다. 다행히 엘리베이터가 1층에 있다. 냉큼 올라타고 집에 가서 휴대폰과 카드 지갑을 가지고 내려간다. 여전히 비질을 하고 계신다. 미안하고 고맙지만 여전히 쑥스러워 상대방이 잘 듣지도 못할 만한 소리로 ’ 고맙습니다 ‘하고 눈길을 걷는다.


이웃 아파트를 지나치는데 이삿짐 사다리가 보인다. ‘미끄러울 텐데, 다 젖으면 어쩌냐’ 심각한 얼굴로 걱정을 하면서 지나간다. 책모임에 가는 길에 동네 도서관에 다 읽은 책을 반납하려고 들렀다. 다행히 입구에 물기 제거 기구가 놓여있다. 우산을 털고 2층으로 올라간다. 책을 반납하려는데 누군가 복사기가 고장 났다면서 사서를 부른다. 기다려야 한다. ’ 늦을지도 모르는데 ‘ 조바심이 나지만 어쩔 수가 없다. 다행히 시간이 오래 걸리지 않았다. 책을 반납하고 버스를 타려는데 18분이 지나야 마을버스가 온단다. 답답하다. 화도 나려 한다. 오늘은 반갑지 않을 일들이 자꾸만 길을 막는다.


화를 내도 상황은 바뀌지 않으니 그냥 기다려야 한다. 다른 버스를 타고 갈아타도 시간은 비슷하게 걸리니 그냥 마음을 내려놓고 기다리기로 했다. 오늘은 눈이 와서 힘들긴 하지만 눈을 보면서 화내기는 힘들다. 눈은 차갑지만 포근하다. 폭풍우처럼 내리는 눈이 아니면 눈 내리는 모습은 푸근하다. 그래서 화를 낼 수 없나 보다. 다행히 버스가 생각보다 일찍 왔다. 도서관에 도착해서 우리 만남 공간의 문을 여니 모두 반갑게 맞아준다. 고맙고 미안하다.


길을 나서면서 눈을 만나고 불안해하면서도 최선의 방법을 찾기 위해 노력했다. 에리히 프롬의 말대로 수동적으로 소유하는 삶을 사는 내가 능동적으로 삶의 방법을 고민하는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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