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래』 천명관 장편 소설 문학동네
몇 년 전 라디오 방송 책 소개 코너에서 극찬을 듣고 궁금해서 책을 덥석 사버렸다. 우리나라에서 보기 드문 책이라는 평이었다. 어떤 책일까 궁금해서 책장을 몇 장 넘기다 반편이가 죽는 장면에서 ‘탁’ 걸렸다. 더 이상 넘길 수가 없었다. 반편이가 무슨 죄가 있을까? 도대체 복수를 왜 그런 식으로 하는 걸까? 화가 났다. 책장을 덮어버렸다. 책꽂이에 꽂아버렸다. 그런데 이상하게 자꾸 맘이 쓰였다. 화가 나고 가슴이 덜컹거려 더 이상 읽어내기 힘들 것 같았지만 눈길이 가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지난주에 드디어 다시 책을 펼쳤다. 너무 낯설었다. 반편이의 이야기가 맨 처음에 나오는 줄 알았는데 춘희가 감옥에서 나온 이야기가 시작이었다. 내 기억 속에는 춘희가 없었는데 신기했다. 기억은 역시 편집이다.
이 책의 주요 인물은 ‘붉은 벽돌의 여왕’ 춘희, 자신의 욕망에 충실하게 살다 간 춘희의 엄마 금복, 이야기가 펼쳐지는 내내 벌어지는 복수극의 장본인 국밥집 노파라고 할 수 있다. 셋 중 누가 주인공일까?
노파의 뒤틀린 욕망과 금복의 새로운 세계를 찾아 나서려는 욕망이 교묘하게 만나면서 이야기가 흘러간다. 노파가 숨겨둔 돈을 찾은 것은 금복에게 행운인가, 불운인가? 인생사 새옹지마라면 그저 한판 크게 놀다간 삶이었을 수도 있다.
춘희는 평생 갈구했던 엄마의 사랑은 얻지 못했지만, 자신을 키워준 쌍둥이 자매와 벽돌 굽는 법을 세세히 알려준 양아버지 문 씨에게서 따뜻한 보살핌을 받았다. 그리고 잠깐이지만 남정네와 사랑을 하고 아이를 낳아 모성도 느꼈다. 가슴 아픈 일들이 생길 때마다, 코끼리와 정신적 교감을 통해 아픔을 다독인다. 세상을 떠날 때도 별 미련이 없어 보였다.
노파는 어긋난 욕망으로 세상도 자식도 모두 적으로 두고 돈만 좇아가다 허무하게 죽는다. 노파는 정말 자신이 말한 대로 복수를 하기 위해 돈을 벌고, 제대로 복수를 한 것일까? 춘희가 교도소를 나설 때 두부를 내민 노파의 얼굴은 춘희보다 지치고 외로워 보였다.
천명관의 『고래』는 대를 이어 벌어지는 가슴 아픈 이야기에 주변 사람들이 기이하게 연결되어 있다. 마르께스와 보르헤스 등 환상적 리얼리즘을 다룬 남미 소설을 연상시킨다.
『고래』에는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화자가 있다. 화자의 입담은 일제 강점기 변사를 떠오르게 한다.
“우리는 아무런 해답을 찾을 수가 없다. 이야기란 본시 전하는 자의 입장에 따라, 듣는 사람의 편의에 따라, 이야기꾼의 솜씨에 따라 가감과 변형이 있게 마련이다. 독자 여러분은 그저 믿고 싶은 것을 믿으면 된다. 그뿐이다.”
이런 서사 구조는 호메로스나 소포클레스가 쓴 고대 작품들도 생각나게 한다. 그만큼 이야기를 맛깔나게 이끌어간다.
『고래』에는 또 다른 특징이 있다. 온갖 이야기와 등장인물이 나올 때마다 자연의 법칙, 사랑의 법칙, 세상의 법칙, 의처증의 법칙, 금복의 법칙, 칼자국의 법칙, 신념의 법칙, 자본의 법칙 등 수많은 법칙이 나온다. 이 법칙이 인물과 사건에 어떻게 적용되는지 따라가며 글을 읽고, 내 삶에는 어떤 법칙이 적용될까 생각해 보는 것도 또 다른 묘미다.
책을 펼치면 덮기가 힘들었다. 400쪽이 넘는 조금 긴 소설이지만 이틀 새 다 읽었다. 휘몰아치듯 읽어내고 책장을 덮을 때는 『토지』 같은 대하소설을 읽은 듯했다. 이야기를 좋아하는 분이라면 꼭 읽어보시길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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