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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샐리 존스 Jun 25. 2021

단지, 딸이라는 이유 때문에

K-daughter 컴플렉스

  우리 엄마는 시집와서 언니를 낳고 "박카스"라고 부르며 예뻐했다고 한다. 나는 둘째 딸로 태어났는데, 연달아 딸만 둘을 낳았다고 아빠에게 엄청난 구박을 받았으니 엄마에게는 서러운 딸이다. 나를 안고 병원에서 돌아왔을 때 아빠는 뒤도 돌아보지 않았고, 바닥에 눕혀 놓은 나를 발로 슬그머니 밀어 버렸다고 한다.


  아빠는 '아들을 못 낳으면 다른 데 가서 낳아 올 테니 그런 줄 알어' 라며 엄마를 불안하게 했다. 그래서 엄마는 (엄마 말로는 '어쩔 수 없이') 애를 하나 더 낳았는데, 다행히 아들이었다. 그게 바로 내 남동생이다.


  남동생은 태어나서부터 병약했고 일 년이면 300일을 병원에서 지내야 했다고 한다. 나는 이때에 대한 기억이 없지만 내 신세가 가련했을 것은 어느 정도 짐작이 간다.


   남동생의 병치례 때문에 정신이 없었던 엄마는 막냇동생을 임신했는 줄도 몰랐다고 한다. 아빠가 (아들은 이미 있으니) 돈 까지 쥐어 주며 지우라는 걸, 아픈 아들이 잘 못 될까 봐 겁이 났던 엄마는 병원 문 앞에서 돌아 나와 그 돈으로 소고기를 사 드셨다지.

  

  남동생은 다행히 병을 이겨 냈고, 덤으로 얻은 넷째는 딸이었다. 그래서 우리 집은 딸, 딸, 아들, 딸. 4남매가 되었다.(참고로, 그때는 "둘만 낳아 잘 살아보세" 시대였다.) 귀하게 얻어 병치례까지 이겨 낸 하나뿐인 아들. 우리 엄마에게는 아들이 전부였다.


  내가 고등학교 2학년 때 겨울. 등교 준비를 하는데 보일러가 망가져 따뜻한 물이 나오지 않는 것이었다. 머리를 감아야 해서 급하게 들통에 물을 받아 팔팔 끓였다. 그런데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 그 물은 사라졌고 남동생 차지가 되어 있었다.


  아무리 공부를 열심히 해도, 아무리 엄마 말을 잘 들어도 언제나 더운물은 딸의 것이 아니었다.


  내가 사춘기 때 엄마를 죽도록 싫어했던 이유가 엄마가 남동생의 폭력에서 나를 보호해 주지 못했기 때문인지, 본인 기분에 따라 심하게 때리고 욕했기 때문인지, 아니면 나를 식모 부리듯이 부려 먹었기 때문인지 지금은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늘 엄마에게서 벗어나고 싶어 했던 딸들은 결혼을 탈출구로 삼았다. 막상 결혼을 할 때는 "드디어 엄마에게서 해방이다!" 였는데, 아이를 낳아 키우다 보니 어쩔 수 없이 다시 엄마의 곁에 와 있었다.


   나도 자식을 낳아 키워 보니 엄마가 조금은 이해가 된다. 고지식한 남편과 어려운 환경에서 자식 넷을 키우는 것이 마음처럼 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우리 엄마는 자식에 대한 애착이 누구보다 강한 사람이다. 셋이나 되는 딸들보다 하나뿐인 아들을 조금 더 많이 사랑하셨을 뿐. 엄마 딴에는 최선을 다하셨을 거라고 믿고 싶다.


  엄마가 '단지 딸이라는 이유 때문에' 우리를 차별 속에서 키우셨음에도 원죄의식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K-daughter]인 우리들. 우리는 여전히 엄마를 챙기고 돌보지 않으면 죄책감을 느끼고, 엄마는 언제나 딸들 앞에서 당당하다.


  그래도 이제는 엄마를 사랑해야지. 더 사랑하려고 노력해야지... 엄마와 나에게는 서로 사랑하고 용서할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노년에도 그놈의 아들 때문에 고생하는 엄마가 그저 불쌍하고 안쓰러운 나는, 어쩔 수 없는 [K-daughter] 인가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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