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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샐리 존스 Jan 01. 2022

혼자 걷는 사람

 우리 엄마는 걷는 것을 참 좋아하신다. 9남매의 맏며느리로, 4남매의 엄마로 살아오는 동안, 엄마에게는 사무치게 슬프거나 미치도록 화가 나는 날들이 참 많았을 것이다. 엄마는 그럴 때마다 겉옷도 안 걸치고 무작정 집을 뛰쳐나가 몇 시간씩 걸어 다녔다. 가끔씩 엄마는 그렇게 홀연히 사라졌다가 다시 나타나곤 했다.

자식을 넷이나 낳고, 젊어서 갖은 고생을 한 때문인지 엄마는 갱년기를 지나며 골다공증을 심하게 앓았다. 십여 년 전부터는 빨리 걷는 것도, 오래 걷는 것도 힘들어하신다. 예전처럼 자유롭게 걷는 것이 힘들어졌다는 것을 엄마가 스스로 인정할 수밖에 없었던 그즈음이 생각난다. '무언가 아주 중요한 것을 잃어버렸지만 어쩔 수 없이 체념해야만 하는' 그런 사람의 슬픈 눈을 하고 엄마는 억지로 웃고 있었다.

 미니 스커트를 입고 가늘고 예쁜 다리를 자랑하던  사진 속의 엄마는 이제 없다. 엉덩이가 가벼워 마음만 먹으면 어디든 쌩쌩 돌아 다녔다던 날랜 엄마도 이제는 없다. 이제는 발을 디딜 때마다 부자연스럽게 벌어지는 무릎 탓에 어그정 어그정 발바닥으로 땅을 쓸며 느린 걸음으로 불안하게 걷는 70대 노인이 있을 뿐이다. 하지만 우리 엄마는 지금도 여전히 걷는 것을 멈추지 않는다.

 몸이 불편한 지금도 명절이 다가오면 엄마는 무거운 장바구니를 양손에 들고, 등에는 배낭을 짊어지고 걸어서 30분이 넘게 걸리는 시장을 하루에 몇 번씩 왔다 갔다 하신다.  하루에 만 보를 꼭 채워야만 하는 사람처럼 엄마는 어떻게든 기를 쓰고 걷고 또 걷는다. 밤마다 다리가 아파 죽겠다고 하소연 하는 엄마를 나는 이해하기 힘들었다. ‘다리가 아프다면서 왜 걷고 또 걷는 걸까?’ ‘엄마는 왜 자신을 스스로 혹사하는 걸까?’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그때 나는 엄마의 마음을 몰랐다. 엄마는 그저 ‘혼자 걷는 사람’이고 싶었던 것이다. 발을 질질 끌면서 느리고 불편하게 걸을지언정, 남의 손에 의지하지 않고 내가 걷고 싶을 때면 언제든지 나가서 걸을 수 있는 이 하루하루가 엄마에게는 너무나 소중한 것을 나는 몰랐다. 젊은 시절 엄마가 슬프고 외로울 때마다 어두운 밤길을 홀로 걸으며 위로받았던 것처럼, 지금의 엄마에게는 아무 데로나 발이 이끄는 대로 혼자서 걸을 수 있는 하루, 그 자체가 커다란 행복이고 위로인 것이다.

우리 엄마에게도 머지않아 더는 혼자서 걸을 수 없는 순간이 올 것이다. 그럼  나는 엄마의 곁에서 엄마를 산책시켜주는 사람이 되고 싶다. 나는 엄마와 눈을 맞추고, 엄마의 이야기를 귀기울여 들을 것이다. 해가  쨍쨍한 날에는 넓은 차양으로 그늘을 만들고, 찬 바람이 부는 날엔 엄마의 옷깃을 단단하게 여며줄 것이다. 나의 상상 속에서 나는 엄마가 사랑하는 계절들을 엄마와 함께 걷는 그런 착한 딸이다.


 ……노인이 되면 필연적으로 요양 시설에 가게 될 거라고 생각하고 있다. 내게 요양 시설이 필요할 만큼 긴 시간을 살아낸다면 말이다. 살아 있는 사람에게는 언젠가 반드시 자력으로 살아갈 수 없는 날이 온다. 그럴 때 타인에게 홀대를 받지 않고, 타인이 나의 신체를 함부로 다루지 않고, 내가 나의 쇠락을 편안히 인지하는 가운데, 그러니까 나의 육체가 온전히 내 것이 아니게 되었다는 사실을 잠자코 받아들이면서, 자신을 비참하게 여기지 않고 살아 있을 수 있을까?

 시간에  맞춰 개를 산책시켜주는 사람이 있듯이, 매일 같은 시간에, 특별히 산책을 할 수 없는 날씨가 아닌 이상, 한결같이 집에 방문하여 나를 산책시켜주는 사람에 대해 생각하고 있다. 그는 미래에서 나의 상상 속에 도착하는 사람. 내게 못된 말을 하지 않고, 내 몸을 함부로 다루지 않고, 가끔씩 다른 길로 방향을 틀어 어제와 다른 풍경을 보여주는 사람. 산책에서 돌아오면 나를 창가에 앉혀주고, 내일 봐요, 하고서 떠나는 사람. 나는 창가에서 내일의 산책을 기다리는 사람

이것이 내가 상상할 수 있는 가장 평온한 나의 미래다.   

유진목, 「산책과 연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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